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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2010 - 부활을 사는 사람들.

골로새서 3: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2-04-08

말씀내용
<부활을 사는 사람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Happy Easter라고 인사를 하고 축하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부활절 행사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정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절의 의미를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알며, 그 풍성한 축복을 누리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부활절 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부활절만이 아니라 모든 주일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초대교회의 전통이었으며 오늘날까지 교회가 주일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매 주일 그 부활의 메시지가 복음 선포에서 제외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부활주일에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바르게 듣고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부활은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킨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가장 보편적이고 나쁜 견해는 무엇인가 하면 부활 사건을 단지 과거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아예 믿지도 않고 그것을 도덕적 교훈 정도로만 여기려고 하는 풍조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믿는다고 해도, 그 믿음이 단지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는 수준으로만 여긴다면 그 부활신앙은 현재의 우리의 삶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부활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태도는 부활을 미래에 일어나게 될 사건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부활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라고 가르칩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은 현재의 신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과거의 사건인 것도 옳고, 미래에 일어날 일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 이상입니다. 부활은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A. 세례의 의미(2:12; 롬 6:4): 옛 생명의 종말이고 새 생명의 시작이다.
바울 사도는 이 논의를 세례가 뜻하고 있는 바를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너희가 죽었고”라고 한 것과 1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한 것은 세례의 가장 중요한 두 요소를 언급한 것입니다. 2:12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도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에 언급된 두 가지를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장사한 바 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여기도 죽고 사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세례는 물 속에 들어가 죽었다가, 물에서 올라올 때 다시 사는 것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신앙 고백 속에서 그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죽었고, 이미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고 할 때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은 옛날,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살던 그 생명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갈 2:20).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세례라는 행위, 그리고 그 사건은 우리의 심령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그리고 가시적으로 분명하게 일어나는 사건인데, 그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것은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에게 자신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저런 어려움이 찾아와서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고 낙심케 할 때마다 이렇게 소리지른 것입니다. “나는 세례 받았다! 나는 세례받았다!”라고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그 믿음의 고백 위에서 세례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의 삶에서는 바울의 삶에서 일어난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B.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새 생명(3)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내가 사는 생명이 예전에 내가 살던 그 생명이 아니고 새 생명이라면,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한 마디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문제는 새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졌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지상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그 새 생명이 자신의 실체를 다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벵겔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인도 모른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조차도 자기 자신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감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감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지금 이 땅에 사는 성도들 자신이 감지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부분이 신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지게 되는 긴장의 원인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분명히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살아갑니다.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본질은 한국 사람인데, 법적으로 시민권을 취득하셨다면 합법적 미국 시민인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내라는 명령
비록 우리의 새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 생명을 살아내며, 그 원리를 가지고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요구되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은 사람, 새 생명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라는 차원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전제가 그래서 맨 앞에 있는 것입니다(1). 하나님께서는 새 생명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새 생명을 살아내라고 요구하시거나 명령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 새 생명을 이미 가진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A. 위엣 것을 찾으라(1)
그 첫번째는 “위엣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단어는 추구하라는 말인데, 주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을 때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은 의지의 방향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무엇을 추구하면서 사실 것입니까? 여러분의 의지의 방향은 어디로,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도전하고 있는 명령입니다. 이기적인 관심사보다 그리스도의 관심사,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들보다는 영혼의 욕구를 채우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것은 그저 한 번 하고 마는 행동이 아니라 일생 동안 몸부림쳐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사실, 이 명령을 좀 더 정확하게 헬라어법에 맞추어 의미를 전달하려면, “위엣 것을 계속해서 찾고 또 찾으라”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명령에 비추어 세례를 이해한다면, 세례는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선언하고 실천에 옮겨야 하는 영적 사건입니다. 세례는 우리의 삶의 분기점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이전의 생명이 죽고 새 생명,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B. 위엣 것을 생각하라(2)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두번째 명령은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2). 이것은 단지 지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의지를 복종시키는 행동을 명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어떤 사람의 편을 들다’ 혹은 ‘어떤 사람의 대의를 신봉하다’는 의미도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편을 들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시고 중요하게 여기시고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예전에 원했었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무슨 신비주의를 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 특별히 세례라는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는 실천적 명령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명령이 의미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곧 우상숭배이며(5), 분과 악의 훼방과 부끄러운 말들이며(8), 거짓말입니다(9). 이것들이 바로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구체적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위엣 것을 생각하는 삶도 구체적인 것입니다. 땅의 것들을 특징들과 정반대의 것들을 행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3. 부활과 현재: 그리스도의 부활이 요구하는 새로운 생활 방식
이와 같이 비록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생명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고 그 생명을 살아가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은 그저 과거나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새로운 생활 방식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쉽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A. 신적 수동태(2:12; 3:10):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
부활을 살아내는 것, 즉 새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이 중요한 표현들에서 수동태를 사용할 때 나타납니다. 가령, 1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할 때, 우리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내진 것이라고 표현됩니다. 2:12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고(수동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표현됩니다. 3:10도 보십시오. 새 사람을 입고 창조우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았다고 할 때도 수동태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수동태를 신적 수동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셔서 수동태로 표현되는 구절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되어진 것입니다(고후 5:17).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란 단지 결심과 실천이라고 하는 그릇된 이해를 배격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심 더하기 실천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동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4. 부활과 미래: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4)
그런데 이렇게 감추어진 생명이 영원히 감추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나타날 것입니다. 언제인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입니다. 재림의 시기를 가리킨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질 것입니다. 여기서도 수동태가 사용되었습니다. 신적 수동태입니다. 우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축복된 수동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임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보다 확실하게 보장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증명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옳았다는 것,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것,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것,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간 것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될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에 걸친 믿음의 순종과 인내,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갔던 것이 옳은 것이었음을 하나님께서 입증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옳은 것이었음을 하나님께서 그 죽은 몸을 일으키심으로써 입증해 주셨듯이, 장차 다가올 한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과 자기 부인, 그리고 헌신과 희생이 옳은 것이었다고 입증해주실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 날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제 신앙에 있어서 그 날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제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저는 간절히 그 날을 기다립니다. 그날에 저와 여러분이 부끄럽지 않은 자들로, 우리의 숨겨진 생명이 드러나게 되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삶과 신앙이 옳은 것이었음을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5. 구원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건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이미 얻은 것이고, 지금도 얻고 있으며 미래의 한 순간에 완전하게 완성될 것입니다. 2000년 전, 우리 주님의 부활 사건은 과거의 사건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래에 일어날 일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연결되어 우리의 실존 전체를 주장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우리의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는 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는 자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옛 생명이 다 죽은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 부활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기존의 관점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각, 우리의 안목,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위엣 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것인지를 그들은 압니다. 땅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축복된 삶인지를 압니다. 그들은 도무지 땅의 것을 추구하거나,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땅의 것을 추구하고 생각하며서 살아가시면서도 만족스럽다고 여기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땅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추구하면서 인생을 기쁘게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2000년 전 우리 주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십니까? 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가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