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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2009 -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

요한복음 11:25-2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04-12

말씀내용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

잔인한 자비란 말은 전에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종종 사람 편에서 고통을 수반하게 될 때 그것을 잔인한 자비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셨지만, 마르다가 믿은 것은 마지막 부활의 때에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부르시자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에서 걸어나왔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주셨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주님 자신이 부활하실 것에 대한,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것에 대한 사건으로서의 계시였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에 우리가 던질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연 죽음이 인생의 진정한 끝인가 하는 것입니다. 피해갈 수 없는 질문입니다. 온 세상이 부활절이라고 떠들썩하지만, 그들이 모두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부활을 믿는가? 그리고 그 부활이 나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러분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라고 이 질문을 피해간다고 해도 부활 자체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증언하는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부활이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초점입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이 사도들에게 준 의미
먼저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 사건이 제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이 그들에게 준 의미를 보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그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A. 십자가 사건이 사도들에게 준 충격: 십자가에 나타난 절망의 크기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후에, 제자들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감람원에서 주님이 붙잡히실 때,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주님이 심문을 받으시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바깥 뜰에서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제자는 오직 요한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후, 제자들은 다락에 모여서 문을 굳게 잠그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부활하여 그들에게 보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십자가 사건에서 받은 충격이 커서 제자들 여럿은 그들의 원래 직업인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당혹감과 두려움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했고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였으며 주님의 곁에서 들었던 많은 말씀들이 다 꿈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B. 십자가 절망의 크기만큼 부활 사건은 충격적 소망이 되었다.
우리가 십자가 사건이 제자들에게 미친 충격을 먼저 살펴본 것은 그 십자가에서 경험한 절망의 크기 만큼 그들에게 주님의 부활 사건은 충격적 반전이고,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절망이 깊었던 만큼, 주님의 부활 사건은 그들에게 놀라운 기쁨과 소망의 충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과 소망과 용기를 드러낸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변화를 이해하는 열쇠를 부활사건과 성령강림 사건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열쇠가 바로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복음은 한 마디로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또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고전 15:3).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절망이 소망으로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주실 것을 확신하였기에 모여서 일심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부활 이전에 볼 수 있던 그런 겁쟁이들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절망과 부활의 소망
십자가가 절망이라면 부활은 소망이고 환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두 가지 사건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절망과 소망을 다 같이 경험한 자요, 경험하는 자입니다.

A. 십자가는 죄의 죽음이 완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가의 절망은 죄가 얼마나 철저하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실 때, 우리는 거기서 죄의 죽음을 봅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완전하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철저하게 상하여 죽임을 당하시고 또 옆구리에 창을 찔러서 그 죽음을 확인까지 할 정도로 철저하게 죽으신 것은 죄가 그렇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완전한 절망에 이르러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경험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그런 절망을 그들의 눈 앞에서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다 끝났다는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 자기 능력으로 하는 모든 것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그들에게 그토록 의미있는 변화의 열쇠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음을 세워가시는 방식입니다.

B. 믿음이 세워지는 방식은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신자들과 우리 자신에게도 이것은 동일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세워지는가 하면 우리가 십자가의 절망을 경험하고나서 부활의 은혜를 맛볼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내 힘으로 가는게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부활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게 될 때 견고해집니다.

C.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의 결정판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십자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고, 잔혹함이며, 모든 것을 다 내어버림이고, 수치를 당하는 것이며, 절망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십자가를 달가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제자들의 모든 믿음은 다 무너져내린 듯 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찌해야할지를 몰랐습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다고 했던 제자들의 그 용기도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때 무너진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믿음이 그렇게 바닥이 났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들의 믿음을 회복하고 세워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자비의 크기가 드러날 수 없으며, 그 방법으로는 우리의 죄가 완전히 죽임을 당하고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게 세워질 길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잔인한 방식이지만, 그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부활절의 의미: 우리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
이것은 오늘 부활절을 지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의 삶에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을 전해줍니다. 우리 삶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되는 삶은 없습니다. 원치 않지만, 십자가같은 절망이 우리 삶에서 경험되기도 합니다.

A. 우리 삶에 절망을 주시는 하나님: 삶에서 경험하는 절망은 잔인한 자비다
분명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떠나서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아보이고 나빠보이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어떤 일들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을 드러내기 위해 주시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일들은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 삶에 절망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절망은 사실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입니다. 비록 우리가 당시에는 견딜 수 없고, 죽어버리고 싶다고 느낄지라도 그 절망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인간이 완전한 절망에 이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인간이 절망을 알지 못한다면 그가 자기 자신을 과연 알 수 있을까요? 그가 과연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어떤 면에서 절망에 이르를 때 자기가 쓰고 있는 교만과 온갖 더러운 가면이 벗겨지게 되고 가장 인간적이 되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주어지는 절망의 상황을 결코 낭비하지 마십시오.

B. 절망을 부활로 갚으시는 하나님: 나사로의 부활은 마리아/마르다에게 주신 절망의 끝
그러나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절망의 끝이 있다는 것이고, 그 절망의 끝이 바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한 죽음을 죽으신 주님이 계셨기에 우리는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이 준 깊은 절망은 부활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소망과 환희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절망을 주신 하나님은 절망을 부활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사로가 왜 죽어야만 합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 말고 아예 죽음이 없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와 같이 슬퍼하고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보여주려고 하시는 것 말고, 죽었던 나사로 자신과, 슬픔에 잠겼던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주변에 슬픔을 함께 하려고 왔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나사로의 죽음을 허락하셨고 또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인간은 믿음이 세워집니다. 절망 속에서도 장래의 은혜를 바라고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현실의 삶에 있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장래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부활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힘입니다.

C. 우리는 죽어도 산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죽어도 사는 신앙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말을 주님이 본문에 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은 인간 절망의 끝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것은 제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절망의 최고,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 죄를 다 뒤집어 쓰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완전한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절망의 십자가와 소망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얼마나 놀랍게 살아갔는지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절망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어도 사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그것은 죽어도 사는 신앙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이 죽음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합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자녀들을 키우면서, 가정적인 불화로 말미암아, 또는 정말 건강을 잃고 암 선고를 받으면서 죽음에 가까와졌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겪는 상황은 비록 잔인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절망의 끝에 내가 너를 위해서 예비한 은혜가 있다. 그것이 부활의 소망이다. 네가 나의 잔인한 자비를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 이 부활절에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