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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12 -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이사야 52:13 ~ 53:12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4-06

말씀내용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사 52:13~53:12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자 가운데 한 분인 빌립 집사는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에디오피아의 내시(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은 재무상) 간다게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개종자라고 했지만, 내시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식 개종자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매우 진지했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서 구약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서 그에게 다가가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묻습니다. 간다게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하고 대답하면서 빌립을 병거에 올라오라고 초대하고는 읽고 있는 구절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사야 53:7~8이었습니다. 내시 간다게는 빌립에게 이것이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를 묻습니다.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했고 간다게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에디오피아의 첫 성도로 기록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서 던지는 질문도 같습니다. 이 글이 누구를 가리킴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것에 대한 수많은 구약의 예언들 가운데 가장 정교한 예언입니다. 오늘 저도 빌립이 이 글로 예수님을 간다게에게 가르쳤듯이 하려고 합니다.

1. 고난 받는 종의 서론(52:13~15)
성경의 장 구분을 하게 된 것은 13세기에 파리에서 라틴어 성경을 편집하던 Stephen Langton 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이야말로 장 구분이 잘못된 부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53장에 있는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52:13~15을 보아야 하고 이 세 절이 사실상 53장 전체를 이해하는 서론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52:13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보라”라는 말은 이사야 선지가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서 많이 사용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선지자는 적고 있는데,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전체의 내용은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지만, 이 서론의 첫 마디는 그 고난을 통해서 이루시게 될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관점이고, 또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형통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형통 하다는 말은 그 뜻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지혜롭게 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공적으로 이루실 것이라고 여기서 하나님은 보장하고 계십니다. 그 결과가 13절 하반절에 세 번 반복된 유사한 동사들입니다. ‘받들어’, ‘높이 들려서’, 그리고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는 말들입니다. 이 예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 사도가 그 성취를 확인해줍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여호와의 종이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게 될텐데, 그 고난을 통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모든 이름 위에 높임을 받으실 것임을 먼저 선언하면서 이 본문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상하였고 그 모양이 상하였기 때문에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를 보고 놀라게 될 것이라고 14절에 말합니다. 여기 놀란다는 말은 ‘간담이 서늘해지다’ 혹은 ‘소름끼치게 되다’는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망하여 포로로 잡혀갔을 때, 사람들이 놀란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망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 이런 놀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종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얼굴이 상하고 모양이 망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상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15절에 있습니다. 우리 개역성경에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는 14절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게 만드는 번역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의 정확한 번역은 “그가 열방에 뿌릴 것이며”라는 것입니다. ‘뿌린다(sprinkle)’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아주 익숙한 말입니다. 특히 제사법과 관련해서 제사장이 기름이 피를 뿌림으로써 거룩하게 하거나 물을 뿌림으로써 정결하게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여호와의 종이 이렇게 상하게 된 것은 제사장으로서 열방을 거룩하게 하고 정결케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바르게 이해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라고 쓸 수 있었습니다(벧전 1:2). 그러므로 이 종의 사역을 보게 될 열왕들은 이토록 상하고 상한 여호와의 종이 일을 수행하고 나서 지극한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을 볼 때 너무나 놀라서 입을 다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자신들의 기대와 상식의 수준을 뒤집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한 말씀입니다.

2. 골고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치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수난을 친히 목격한 사람처럼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일이 일어났지만,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1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세상은 복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 뒤에 있는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는 말은 그 앞에 있는 말을 설명해줍니다. 보통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선지자의 전한 바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군가 그 복음의 메시지에 반응을 하고 믿는다면 그는 여호와의 팔이 나타난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믿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교리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면 우리는 아무 할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에게 복음을 믿을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복음을 믿어야 할 사람의 의무를 조금도 면제하거나 경감시켜주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히 가르칩니다. 또한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복음을 들은 이들에게 여호와의 팔이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2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호와의 종은 연한 순 같아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고 중요하게 여김을 받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라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마른 땅에서는 어떤 식물이든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이 세상의 비참한 상황을 이보다 잘 묘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교라는 형식과 틀은 엄청났지만, 그들에게 생명은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아주 훌륭한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레바논의 백향목’같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주님에게는 그런 용어가 전혀 어울릴 수 없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양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모양이 없다는 말은 우리 한국말과 같이 히브리어에서도 훌륭한 용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종에게는 매력적인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용모를 그려보려고 하지만, 사실 이 말씀이 인간적으로도 아주 못 생긴 어떤 사람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면 그런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기도 하고 그분에 대해서 상당히 반응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외모에 대한 묘사라기 보다는 여호와의 종이 가진 영적 특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그분의 하시는 일을 제대로 본다면 도무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굴욕과 고난의 삶을 살아가시는 것을 보았을 때 도무지 그분을 여호와의 종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의 서론에서 말한대로, 그의 얼굴이 상하고 모양이 상했다는 표현에서도 드러납니다(52:14). 하지만, 2절에서 한 가지 중요한 언급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목전에서 사셨던 전생애를 말해줍니다. 비록 사람들의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3절부터는 여호와의 종의 비하(낮아지심)를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사람들에게서 받은 대우는 멸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소위 사회적 왕따였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종에 대해서 아무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거나 그를 구원의 주님, 여호와의 종으로 받아들이거나 할 뿐 입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는 표현은 슬픔의 사람이며 질병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그 여호와의 종은 고통을 겪는 슬픔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슬픔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실 때, 유대인들이 인간의 나이로는 이제 30이 조금 더 되신 예수님께 대하여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 하느냐”고 한 말을 생각합니다(요 8:57). 예수님이 얼마나 슬픔의 사람이었는가를 반증하는 말입니다. 왜 나이가 30을 갓 넘은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50이 넘은 사람으로 보여야했는가? 왜 그는 슬픔의 사람이라고 불리어야 했는가? 여호와의 종은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을 때, 그 질고는 질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의미가 깊습니다. 병은 근원적으로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인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분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그 고통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그냥 머리가 아니라, 그분이 입으신 육신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아신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여호와의 종에게 반응을 했던 이유가 4절에 설명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들의 생각에 그가 이렇게 얼굴이 상하고 모양이 상한 형편없는 모습이 되고 실패자와 같이 된 것은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맞는다’는 말은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취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를 재앙으로 치셨다고 한 말과 같은 말입니다(창 12:17). ‘맞았다’는 말과 ‘징벌을 받았다’는 말이 너무나 센 표현이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여호와의 종이 문둥병자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전반적으로 선지자가 표현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이 바로 사람들이 다 기피하고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 사회적 추방자인 문둥병자에 대한 묘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절을 잘 보십시오. 여기에 놀라운 대조가 보이십니까? ‘그’와 ‘우리’의 대조이고, 그들 사이의 관점의 대조입니다. 그는 단수이고 우리는 복수입니다. 우리라고 묘사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하나님에게 맞아서 저렇게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멸시하고 거부하고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의로우신 한 분이 계시고, 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병과 질고와 허물과 죄악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는 표현에 나오는 동사들을 주목해보면, 이것들은 모두가 제사법에 나오는 대속제물이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즉, 그분은 하나의 대속제물로서 이런 고통과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은 실로 여호와의 종이 당한 일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는가를 설명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에 대한 매우 명확한 가르침을 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그가 찔리고 상한 것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그의 죄악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허물이고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얻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평화이고, 나음입니다. 평화는 슬픔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번도 온전하게 누릴 수 없었던 행복의 상태를 말하고, 나음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한 번도 병과 연약함이 없는 진정한 건강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이 얻게 된 자유함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말하는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은 단지 우리가 인간 사회에 살아가면서 때로 다른 사람들을 침해하거나 규칙을 어긴 것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여호와의 종이 하나님으로부터 맞고 상해야 했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 사회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고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찔림’과 ‘상함’이라는 단어는 아주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들입니다. 그 잔인하고 고통스런 죽음은 그가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짊어지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선지자는 선언합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분이 찔리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죽으시는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종의 고난이 필요했던 이유를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이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은 정도를 벗어나 길을 잃어버린 양의 신세와 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잘난 줄을 알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로 행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추구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향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누가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죄악이라는 단어는 실제적인 범죄 사실을 말할 뿐 아니라 그 범죄가 포함되는 죄책(guilt)과 거기 따르는 형벌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즉, 여호와의 종이 우리 모든 무리의 죄악을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는 슬픔의 사람일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얼굴이나 모양은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 모든 일의 궁극적 원인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종이신 예수님은 억지로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까? 7절이 설명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은 그가 곤욕을 당하시는 동안 자원하여 괴롬을 감수하셨고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 고난은 자원함으로 받으신 고난이었고 인내함으로 감수하신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 8절이 계속해서 이 부분을 더 설명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여기 곤욕이라는 단어는 감옥, 구금을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체포를 당하시고 심문을 당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에게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압니다. 주님에게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그 진정한 뜻을 알거나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여기서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하는 내 백성의 허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결코 아무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모두 다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성경의 일관된 교리가 여기서도 나옵니다. 오직 ‘내 백성의 허물’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라고 하신 사람들입니다(요 17:2). 이제 9절은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종의 죽으심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다시 한 번 선지자는 여호와의 종이 죽을 죄는 커녕, 어떤 죄도 범치 않은 의로운 종이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두 강도와 함께 달려 죽으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부자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는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인데, 개역성경에는 ‘그 묘실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는 ‘그의 죽음들 후에’라고 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의역하여 묘실이라고 번역된 것인데, ‘죽음’의 복수 표현을 통해서 선지자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의 참혹하고 비참한 죽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어의 용법상 그러한데, 이것은 예수님의 그런 비참하고 참혹한 죽음을 부자와의 연합이라는 것으로 대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후에,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시신을 받아 자기 묘실에 장사지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매우 구체적인 예언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 죽으심으로써 여호와의 종이 이제 승귀(높아지심)의 시작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의 승귀와 영화는 그의 죽으심과 더불어 이미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영광
이제 우리는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위대한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왔습니다. 10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종의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상함을 받기를 원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다시 한 번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상함’이라는 말은 완전히 으깨어지는 것을 말하는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그렇게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다’고 할 때 이 단어는 기쁨, 큰 기쁨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아들이요, 여호와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영혼이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속건제물로 표현된 말은 구약의 제사법에 있는 모든 제사를 대표하여 사용된 말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속건제물이라고 했을까요?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을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속건제물의 기본 개념은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즉 남에게 재산상의 해를 입혔을 경우에, 단순히 그 손해를 보상해줌으로써 피해자를 만족시켜 준다는 개념이지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대속제물로 드려지심으로써 인간의 반역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하게 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하셨다, 기뻐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가 완전하게 만족된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종은 이 제사로써 당신께서 짊어지셨던 자기 백성의 죄악과 허물을 해결하심으로써 그 씨를 보게 되고, 죽으신 그분은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게 됩니다. 여호와의 종은 스스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11절에서도 계속해서 그 결과를 설명합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여호와의 종은 그 영혼의 수고를 만족히 여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요 19:30). 그리고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말씀은 조금 주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자기 지식으로’라는 말은 ‘그분을 앎으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그 지식은 여호와의 종이 가지신 지식이 아니라, 그가 의롭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소유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이 지식은 여호와의 종이 누구시며, 그분이 이루어놓으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으로 인하여 유익을 얻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종, 여호와의 종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했을 때, 선지자가 말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 놀라운 이신칭의의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 지식은 바로 오늘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여호와의 종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위대한 본문의 마지막 절로 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다시 이 마지막 구절은 고난받으신 여호와의 종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전리품을 얻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환상 가운데 보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이렇게 되신 것은 그의 낮아지심, 고난, 죽으심 즉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고 범죄자 중 하나로 여김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심을 확언하는 말입니다(롬 8:34; 히 7:25).

4. 결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가 몹시 상한 모습으로 사셨고 그렇게 비참하게 악인들과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형통하게 그 사명을 다 이루셨고 받들어 높이 들려 지극히 존귀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52:13). 형통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모양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닙니다. 모양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있으면 형통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을 기념하며 우리는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700년 전에 예언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우리 역시 어떤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를 멸시하고 거부하고 싫어하든지, 아니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인하여 그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의 구주 하나님으로 섬기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2000 여년 전에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여호와의 종이 누구이며 그분이 행하신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드렸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를 아는 지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나님의 초청,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반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