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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10 - 영문 밖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히브리서 13:10-16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4-02

말씀내용
<영문 밖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히 13:10~16

[내려받기]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2:2).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갈 6:14).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더 붙인다면 주님의 부활하심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고난주간과 오는 부활주일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최고의 절기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우려할만하게 일어나는 현상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경시하는 풍조가 점점 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그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그의 신앙의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다 당하셨으니까, 이제 우리는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성경에 대한 교회의 무지는 심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우리의 묵상이 그저 감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깊어지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성경과 교리에 대한 무지 그리고 순종과 실천의 결여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010년 고난주간 특별히 Good Friday를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가지는 의미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내용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1. 영문 밖에서 불태워진 속죄제물(10~11)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시대의 속죄제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속죄제사는 레위기 4장에서 6장 그리고 16장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속죄제사는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비중이 큰 것은 대제사장이나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 드리는 속죄제사이고, 그보다는 비중이 작은 것은 족장이나 한 개인이 범죄하였을 때 드리는 속죄제사입니다. 후자를 먼저 설명드리자면, 그것은 제사를 드리고 남은 속죄 제물의 고기를 제사를 드린 제사장이 먹게 되어있습니다(레 6:29). 번제단에 올려서 태우게 될 제물의 부분은 주로 기름이었습니다(레 4:8~9, 19, 26, 31). 레위기 6:26을 보십시오. “죄를 위하여 제사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나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사의 제물의 고기는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레 6:30). 이것이 오늘 본문 10절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해석입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대개가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들의 유대인 동료들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아야 했고, 자신들의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정체성을 모두 버려야 하는 고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게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이 히브리서가 쓰여졌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분명히 더 이상 제단이 없습니다. 더 이상 제사도 없고, 제사장 제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제단은 번제단을 가리킵니다. 성막(혹은 성전)에 있던 번제단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하나의 모형이었습니다. 유대교에 번제단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번제단이 가리키는 원형인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은유적으로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의 고기를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 곧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는 속죄제사 중에서도 대제사장이나 혹은 온 회중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제물의 피를 단지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단 아래에 쏟는 것이 아니라, 그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금향단의 뿔에 바르고 거기서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고 있는 휘장에 일곱 번 뿌린 후에 남은 피는 모두 번제단 아래 쏟게 되어 있었습니다. 레위기 6:30에서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찌니”라고 한 것이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외에도 제물의 고기를 제사장이 먹는 것이 금지된 하나의 속죄제사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일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의 제사였습니다. 이날에는 대제사장이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와 수양을 그리고 온 회중을 위하여 두 마리 염소를 드림으로써 속죄제사를 행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제사는 레위기 4장에서 언급하는 대제사장 자신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한 제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정기적으로 해마다 드려야 하는 속죄제사로서 특별한 차이를 가집니다. 대제사장의 죄나 온 회중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사에서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까지 들어갔다면 이 대속죄일의 제사에서 대제사장은 유일하게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도록 허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사의 절정입니다. 대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앞에 그리고 속죄소 위에 각각 일곱번씩 피를 찍어서 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물의 기름은 여호와께 번제단에 태워드리고 남은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 밖으로 나가 정한 곳에서 불사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 고기는 제사장에게 먹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일차적으로는 대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를 위한 속죄제사를 가리키고 궁극적으로는 대속죄일의 속죄제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제물의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제사였기 때문입니다(10). 그 고기는 다른 부분들과 함께 진 밖으로 나가 지정된 곳에서 다 태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본문 11절의 설명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은 바로 대속죄일의 속죄제사와 동일한 것, 아니 그 원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말입니까?

2.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12)
예수님은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할 때(12), 그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성문 밖에서’라는데 있습니다. 피가 다 취해져서 회막 안에 뿌려지고 나머지가 다 번제단 밑에 부어지고, 기름도 다 취하여져서 번제단 위에서 태워지고 나면 남은 고기와 다른 부분들이 다 진 밖으로 나가서 태워져야 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제사와 똑같이 자신의 모든 아름다운 순종과 인내를 성부 하나님께 드리시고 마지막에는 성문 밖에서 다 태워지듯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A. 고난을 받으신 목적: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케 하심
속죄제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씻고 그 죄로 더럽혀진 성소를 정결케 할 뿐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와 교제를 회복하게 하기 위함이었듯이, 주님께서는 자신이 제물로 드려진 이 영단번의 속죄제사를 통하여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목적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B. 성 안(inside the city)이 의미하는 것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할 때, ‘성문 밖’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조금 더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히브리서 기자는 ‘성문 밖’, ‘영문 밖’이라는 구절을 교차적으로 반복해서 쓰고 있는 것일까요(11,12,13)? 분명히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예루살렘 성 밖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20은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라고 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진 바깥’이라는 표현은(‘영문 밖’과 같은 표현, outside the camp) 매우 위험한 경계 밖의 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은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었고, 성막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었는데, 진 밖이라고 하면 그것은 한편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령 문둥병자의 경우에는 ‘부정하기 때문에 회복될 때까지는 진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레 13:46). 여러분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문둥병이 발하였을 때, ‘진 밖에 칠일 동안 갇혔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민 12:13~14).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긴 사건이 벌어진 후, ‘진 밖에 장막을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고 이름하여’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출 33:7). 이것도 역시 상징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나가심으로써 이스라엘의 범죄하고 패역함을 드러내시는 표현이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게 되었을 때, ‘진 밖’이라는 표현은 ‘성문 밖’을 의미하게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도 ‘영문 밖’ 혹은 ‘성문 밖’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문 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있고, 유서깊은 그들의 영적 고향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 안전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절과 거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던 것이 결국에는 성문 밖에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사건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놀랍게도 구약의 대속죄일의 속죄제사가 가리켜왔던 그 실재였음을 이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영문 밖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13)
히브리서 기자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라고 말할 때, 그리고 구약의 대속죄일의 제사에서 제물의 고기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졌다고 표현할 때, 이 편지의 첫 수신자들이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것이 연상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나가는 것이고, 그것은 저주이고, 그것은 안전함과 보호가 보장되지 못하는 상태를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처해 있는 처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그들 자신이 바로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쫓겨나서 예루살렘 밖으로, 성문 밖으로 내몰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이든 아니든,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그들 자신의 뿌리깊은 정체성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성 밖으로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출교의 위협을 직면해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그리스도께서도 성 밖으로 쫓겨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속죄일의 속죄제물이 온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진 밖에서 태워져야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하기 시작합니다.

A. 영문 밖으로 나가라: 그리스도께서 지신 수치를 짊어져라.
그것은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하는 삶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말합니다(13). 그리스도는 이미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면 우리도 성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우리를 보호해주고, 우리의 가산이 있으며,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는 성 안에 머물기를 바라면서 성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출교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출교를 당하여 예루살렘에서 쫓겨나는 것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정당한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지신 능욕 곧 수치를 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바람에, 명예를 얻고 성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이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도, 느헤미야도, 다니엘도 다 당신의 손에 귀하게 사용하셨고 그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요셉도, 느헤미야도, 다니엘도 비록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자리에 오르기는 했을지라도 그들의 삶은 결코 성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과 신뢰의 끈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비록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죽음을 얻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어린 신뢰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대의와 거기에 참여하는데 불일치하는 모든 특권과 유익을 버리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능욕을 진다’는 것은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그에게 던져졌던 모든 비난과 조롱 아래에 계시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그를 예배하며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던져졌던 비난이거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의 인격에 던져지는 비난을 하나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적 신앙고백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세상의 특권과 공적인 특권들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의 최소한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할 의향이 없는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 각오와 그럴 자세를 가지고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1~2세기에 유대교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최소한의 신앙을 유지하는 듯 하다가 결정적인 시간에 성문 밖으로 쫓겨날 것을 두려워하여 유대교로 돌아가버린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서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B. 영구한 도성, 장차 올 것을 추구하라(14).
그리스도인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히브리서 기자는 앞서 11장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온 바 본향’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니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고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찬했습니다(히 11:9~10, 15~16).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약속의 땅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지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장차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땅에서 당하는 수치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장차 올 영구한 도성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C. 항상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
영문 밖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또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구약적 언어들을 가지고 유대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성전이 파괴되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 살았던 때가 없기에, 그들은 언제나 제사를 필요로 했고 합당한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사는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영단번의 제사로 구약의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런 식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가 15절에서 말하는 ‘항상’ 드려야 하는 제사가 무엇입니까?

i. 찬미의 제사(15)
먼저 그것은 찬미의 제사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드려야 하는 제사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제사장으로서 항상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제사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선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에는 찬송이 넘쳐나고 기쁨고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문 밖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겨졌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했으며,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서 축복과 기쁨의 대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주신 성부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오늘날 우리의 가슴 속에 적용해주시는 성령님의 지속적인 은헤의 역사를 인하여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의 모든 형편 속에서 불평으로 입이 삐죽이 나와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의 형편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제사, 성문 밖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며, 그 일로 인하여 그 마음이 떨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 입술에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은 그렇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런 제사가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지고 있습니까?

ii. 선행과 나눔의 제사(16)
그러나 찬미의 제사가 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드려야 하는 또 하나의 제사는 선을 행함과 나눠줌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이 요구되는 제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제사라고 표현한 것은 놀랍습니다. 바울 사도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제사입니다. 이것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서로 나눠주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소유보다 형제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소유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도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가 항상 드려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영문 밖 그분께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드려야 하는 제사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4. 성문 밖으로 나가라.
구약의 대속죄일에 드려진 속죄제사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하게 드려졌습니다.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제 그 속죄제사의 효력으로 구원을 얻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복음적 신앙고백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수치를 우리도 짊어질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드려야 할 신령한 제사는 찬미의 제사와 선행과 나눔의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것이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 동기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성 안에 머물면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속에 안주함으로써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전부를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오늘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또 주님의 뜻을 구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은혜 위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침과 저녁, 매일 매순간 드려지는 그런 교회를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