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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주일 2014 - 감사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십시오.

시편 49:1-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11-23

말씀내용
<감사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십시오> 시 49:1~20
우리는 1년에 한 번씩 감사절을 맞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가르침은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감사하랬으니까 감사하자 하는 과도한 순종의 태도도 나타납니다. 또는 감사하면 복을 준다는 식의 구복적 행위의 감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감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믿음의 큰 싸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사실상 범사에 믿음의 싸움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일상의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이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 눈으로, 우리 감각으로, 우리 기분으로 범사를 받아들이고 반응한다면 감사가 아니라 불평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1. 수수께끼 같은 현실(4; 시 73:3~5,12~14)
성경은 우리 인생의 현실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그것을 간과함으로써 뜬 구름을 잡으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과 인생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에 완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인생이 겪어야 하는 타락의 결과를 경험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현실 초월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거나 현실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가르치는 모든 시도는 다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처럼 우리 인생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가르치는 책은 없습니다. 가령, 욥기가 그려내는 고통과 인생의 문제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에는 감사 찬송의 시가 많습니다. 그 감사의 내용은 거의 모두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기자들은 늘 이렇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여기서 ‘오묘한 말’은 수수께끼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실상 세상과 인생에서 일어나는 풀기 어려운 문제, 즉 불의, 부조리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기자는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떵떵거리고 사는 부자를 언급하고 있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시편 73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시 73:3~5,12~14).”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데 불경건한 자들이 잘 되고 경건한 백성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수수께끼 같은 현실이고, 4절이 말하는 ‘오묘한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의 기자인 아삽은 13절에서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믿어봐야 소용없고, 열심히 하나님께 헌신하고 교회에 봉사해도 돌아오는 게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보는 인생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1~4).” 이 말씀, 지혜와 명철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귀하고 천하고 가지고 못 가진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 지혜와 명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들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난제들을 풀겠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이 시는 두 단락으로 그 ‘오묘한 말’을 풀어주면서 같은 결론을 유도하는데, 두 단락은 5~12절과 13~20절입니다.
2.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헛되다(5~12).
먼저 첫 단락을 보면, 5절에서 시편 기자는 환난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을 뿐 아니라 죄악이 자기 발뒤꿈치를 따라온다고 표현합니다. 솔직한 표현입니다. 6절에서 말하듯이,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정직하고 경건한 자들에게는 환난이 되고 자칫 불평하게 되고 죄를 범하게 되는 환경이 됩니다. 여기서 재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갈 수 있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다 된다고 믿는 세상이 아닙니까? 돈으로 명예와 안락, 쾌락과 미모, 건강과 심지어 친구도 사는 세상입니다. 돈으로 되지 않는 게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다들 재물을 의지하고 삽니다. 사실상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불평하게 하는 많은 부분은 이런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재물, 명예, 안락함, 쾌락, 미모, 건강, 주변에 넘쳐나는 사람들이 우리의 불평거리를 제공해줍니다. 불평은 이런 내용들 아닙니까? 재물이 없어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서, 좀 더 안락하게 살 수 없어서, 좀 더 원하는 것들을 즐기면서 살 수 없어서, 좀 더 아름답지 않아서, 건강이 안 좋아서, 이와 같이 우리의 불평은 끝이 없습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재물이 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을 지적합니다. 재물이, 찾아오는 죽음만은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다 죽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자기가 세상에 가지고 누리던 재물을 비롯하여 그 모든 것 가운데 어느 것 하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재물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자기 집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면서 많은 땅을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11). 본문은 재물이 세상에서 만능인 것처럼 보여도 생명은 살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생명의 값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7~8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주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15). 이것은 넉넉함을 추구하는 삶, 즉 탐심에 대한 경고입니다. 좀 더 많이 가지고, 좀 더 유명해지고, 좀 더 힘있는 자리에 가고, 좀 더 아름다워지고, 좀 더 건강해지고, 좀 더 즐겁게 누리면서 사는 것을 향한 인간의 탐심은 끝이 없고, 결국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때 사람은 진리에서 떠나 멸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재물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자나, 재물이 없어서 불평하는 자나 모두가 탐심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 어리석음의 본질을 12절, 첫 단락의 결론이 잘 보여줍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여기서 ‘장구하다’는 말은 ‘밤을 지낸다, 유숙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하룻밤을 지내지 못하는 제한된 삶을 사는 존재라는 사실과 함께 사람이 지니고 사는 재물 역시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것임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유한한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3. 자신을 신뢰하는 삶의 결과는 비참하다(13~20)
두 번째 단락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신뢰하는 삶의 결국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재물이 죽음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함을 이미 말한 시편 기자는 이제 명철이 재물 보다 나음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재물을 의지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입니다(10). 13절은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끝, 종말,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14절의 묘사를 보십시오. 양들이 자기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목자를 신뢰하여 따르는 것처럼, 자기를 신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망 속에서 자신들의 목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사망이라는 목자는 푸른 초장이 아니라 스올로 그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여기서 스올은 불경건한 악인들이 처할 심판의 장소를 묘사합니다. 지금 본문이 묘사하는 것은 재물을 의지하고 자기를 신뢰하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의 종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길이 아주 넓고 편안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을 지나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을 것입니다. 12절에서 말했듯이, 한 밤이 지나고 나면 그들의 모든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다 사라져버리고, 그들이 대대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어놓은 화려한 거처도 사라지고 스올만이 그들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상황은 바뀌어서 이 어리석고 악한 자들로 인해 고통을 받던 정직한 자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14). 15절 말씀은 정직한 자들의 고백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어리석은 악인들이 평생에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그렇다면 본문은 재물을 의지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살아가면서도 이런 막연한 기대를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제 시편 기자는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권면합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16).” 여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눅들지 말라는 것이나 시편 37장 1절에 말씀한대로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내 마음이 영향을 받게 되고 내 안에 감사함을 죽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17~19절입니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결국 생전에 스스로도 인정하고 타인들도 인정하는 삶을 살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 않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종말의 비참함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2절과 차이가 무엇입니까? ‘장구하지 못하다’는 말이 여기서는 ‘깨닫지 못한다’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의지하던 재물이 아니라, 명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종말을 결정하는 것, 인생의 진정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재물도, 명예도, 건강도, 안락함도, 쾌락도, 아름다움도, 권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가지고 사느냐 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짐승과 진배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명철이 소망입니다.
4. 명철과 지혜라 불리는 감사의 우물을 파십시오.
3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지혜와 명철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인데, 이 하나님 경외함이 없으면 우리는 사람들이 부와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고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경외함입니다. 이것이 어리석고 교만한 부자가 결핍하고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서도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는 사람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재물을 의지하고 살아가며, 그것 때문에 자랑하고 불평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며 영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시편 73편을 썼던 아삽이 이런 일로 인해서 자신이 거의 실족할 뻔 하였다고 고백하였듯이, 신자들도 시험을 받습니다. 그리고 악인의 형통함을 인하여 불평을 합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 때문에 감사의 우물이 메마르고 맙니다. 감사와 불평의 목록을 한 번 작성해 보십시오. 우리가 떠오르는 대로 써 내려갈 때 어느 쪽의 목록이 더 길어질까요? 감사해야 한다고 하면 억지로 생각을 끄집어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가 아닙니다. 메마른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는 어리석은 수고가 되기 쉽습니다. 감사의 물은 명철과 지혜의 우물에서만 길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핵심입니다. 명철과 지혜가 감사의 우물입니다. 본문은 재물보다 귀한 것은 명철이라고, 명예와 권력 보다 중요한 것이 지혜라고, 안락함과 쾌락, 건강이나 외모 보다 중요한 것이 명철과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재물이 많아도, 명예와 권력, 안락함과 쾌락, 건강과 외모를 다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말합니다. 돈 많고 아름다운 짐승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명철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도전입니다.
왜 명철과 지혜가 감사의 우물입니까? 감사는 그 자체로 감사를 낳지 않습니다. 감사는 인간이 하나님을 의식할 때 가능해집니다. 자신을 믿고 사는 존재는 자신 외에 감사할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자기 능력과 자기 존재에게 감사를 돌릴 뿐, 그에게는 감사할 하나님이 없습니다. 명철과 지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명철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 곧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은혜의 크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서 우리의 전 존재와 운명이 바뀐 것을 그는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깨닫는 명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는 감사의 우물입니다. 이 우물을 깊이 파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싸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매 순간 우리는 이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자를 향하여 죄인을 향한 진노를 쏟아 부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묵상함으로 이런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붙드십시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무한하고 신령한 유익을 얻으십시오.
우리는 인정합니다. 우리 주변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환경 속에서 자족함이 없고, 부족의 심리와 불평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죄악이 우리의 발꿈치를 좇아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명철과 지혜의 우물을 파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은사가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가 땀 흘리고 애를 써야 하는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명철과 지혜의 우물을 깊이 파는 사람이 평생 메마르지 않는 감사의 우물물을 길어낼 수 있습니다. 지혜와 명철은 우리의 시선을 움직여 지금 나와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여정의 끝을 주목하게 합니다. 지혜와 명철은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들과 형통함을 누리는 악인들에게서 우리의 시선을 돌려 나를 영접하실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지혜와 명철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살고 싶은 소원을 줌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오늘 하나의 감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생의 감사로 인생을 부요하게 채워가기 위해서 지금 여러분이 하셔야 할 일은 지혜와 명철의 우물을 깊이 파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지혜와 명철이라는 감사의 우물이 깊을 때, 범사에 감사하는 일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평생에 누리게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