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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주일 2013 - 믿음이 낳는 감사

에베소서 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1-24

말씀내용
<감사를 낳는 믿음> 엡 1:3

1. 거꾸로 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감사할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감사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자연스러운데, 감사하는 것만은 어렵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고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하는 것이야 뭐가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이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감사는 그런 수준의 감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범사는 좋은 일만이 아니라 나쁜 일, 때로는 견딜 수 없도록 고통스러운 일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사는 곳은 에덴 동산도, 천국도 아닌, 세상이고 이 세상은 에덴에서 쫓겨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모든 것은 다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기막힌 조화를 이루면서 돌아갔습니다. 완전한 하모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모든 피조세계) 사이에 조화가 깨져버렸습니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닌 세상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뿐 아니라 전쟁, 가정 내의 분쟁, 천재지변 할 것 없이 문제투성이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암선고를 받은 젊은 부모들이 있고 소아암에 걸린 아이들,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 부모들, 별별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여기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지난 한 해 동안 감사할 일들을 찾아보려고 애써보셨다면 억지로 꿰어 맞춘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범사에 감사해야 하니까 말이지요. 감사할 일 보다는 불평할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고요. 세상이 도무지 거꾸로만 가는 것 같이 느껴질 때 어떻게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에덴에서 쫓겨난 인생,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면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감사할 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은 본질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정직하고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2.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심각한 오해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에덴에서 쫓겨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범죄함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축복을 발로 찬 것입니다. 내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아담이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 자신이 아담 안에 있었고, 설령 그것이 우리 자신이었다고 할지라도 아담의 선택과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지금 우리 자신이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아담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 28장에서 선포한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마땅히 축복의 상황에 우리가 서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처한 상황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쳤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야 할 몫은 저주입니다. 저주, 혼란과 책망이고 속히 멸망하는 것이 우리 몫입니다. 미치고 눈멀고 정신병이 드는 것입니다. 약혼자를 엉뚱한 사람에게 빼앗기고, 자기가 건축한 집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심어도 과실은 남이 먹을 것이고, 자식들도 다 빼앗길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불만족 때문에 아침에는 저녁이 되면 좋겠다고 하고 저녁이면 아침이 되면 좋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이것이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당하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상관없이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죄인이며 우리의 마땅히 받을 몫은 바로 위에 열거한 저주의 목록들이라고 선언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내 것이라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내 인생, 내 자식, 내 집, 내 사업, 내 것들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당연하고 마땅함만을 가져다 줍니다. 여기에 은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물론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와야 할 것이 오지 않을 때 불평합니다.

3.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근거: ‘그리스도 안에서’
자, 여기서 우리가 바랄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무슨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오늘 읽은 본문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사도는 3절부터 14절까지 끊어지지 않는 하나의 길고 수려한 문장으로 서신을 써내려 갑니다. 마치 숨이 넘어가듯이 말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는지 아는가? 왜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든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찬송해야 하는지 아는가?” 사도는 마치 이런 질문들을 던지듯이 이 서신의 첫 부분을 쓰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이것은 3~14절의 긴 한 문장의 서론이자 결론이고, 에베소서 전체를 통해서 사도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하다가 죄수가 되어 옥중에 있을 때 쓴 서신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찬송할 이유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외치듯이 써내려 갑니다. “찬송하리로다.” 사도의 가슴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듣는 것 같습니다. 찬송할 이유, 감사할 이유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A.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vs. ‘지상에 속한 모든 육적인 복’
사도는 여기서 ‘지상에 속한 모든 육적인 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또 사도는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다분히 하나님의 축복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 즉 재물, 자식들, 장수 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을 다루시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는 그렇게 당신의 축복을 표현하는 방식을 일반적으로 택하셨습니다. 제가 일반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법칙처럼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많은 고난을 주셨습니다. 아벨, 아브라함, 요셉이 그랬고, 다윗, 욥 등 우리는 적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은 고난을 겪은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온전하게 나타난 후에는 우리가 어린 아이의 미숙한 수준을 벗어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더욱 분명하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부어주시고 그 소망 안에서 이 땅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말하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4~5). 언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창세 전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들이 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감격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영원히 누리게 될 은혜와 복은 갑자기 주어진 것도, 내가 어떤 일을 한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찾아오신 결과인데, 그 일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심으로써 내게 일어난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5b).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목적이었습니다. 그저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양자됨(adoption)이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날에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적되어 자녀의 모든 권리와 신분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세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7).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풍성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를 요구하지 않으셨고 대속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네번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얻게 하셨습니다(11).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역에서는 이것을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번역했지만 문법적으로는 가능한 번역이지만, 문맥을 살필 때 이것은 기업을 얻었다고 번역을 하는 것이 더 옳다고 보입니다.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이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기업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상속의 권리를 얻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말씀입니까?

다섯째는 우리가 얻게 될 기업의 보증이 되신 성령님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13~14). 신자들이 어떻게 영원한 기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줄 압니까? 그것은 그 기업의 보증 즉 보증금이 되신 성령님으로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인침은 간단하게 말하면 참됨의 보증, 소유권 주장 혹은 안전 보장을 뜻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기업을 얻을 때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약속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심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6, 12, 14). 지금 말한 것들이 바로 바울 사도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 안에서’ vs. ‘너의 순종 안에서’
이 모든 복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복들입니다. 이 본문이 놀라울 정도로 신명기 28장의 어조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십니까?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저주의 조건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으로 표현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의 축복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3절, 4절, 6절, 7절, 9절, 10절, 11절, 12절, 13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거듭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는 조건입니다. ‘너의 순종 안에서’ 혹은 ‘네가 순종하면’이 아닙니다. ‘네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일입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를 대신하는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롬 3:25).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어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롬 8:32).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대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게 되는 모든 복락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락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는 자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신령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자신의 처지가 노년에 감옥에 갇힌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신자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림으로써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을 세상의 어떤 것도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이고, 이 복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작해서 영원토록 누리게 될 복이기 때문입니다.

4. 범사에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죄인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삶의 방식은 믿음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행하지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신자가 범사에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 감사는 참된 감사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낳지 않은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하셨습니다. 신자의 삶에서 이 말씀처럼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한 모든 것을 그대로 얻지 못했다고 느끼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여기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무조건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다 주실 것이다’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이 요구하신 믿음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기도할 때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빌립보서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빌 4:6~7). 또 베드로 사도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벧전 5:7). 이것은 믿음, 내가 기도했으니 다 될 것이다 하는 믿음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에 대한 이 교훈을 주신 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우리의 믿음의 부족한 것을 탓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염려와 불안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최상의 결과를 만드실 것을 알고 평안을 누리고 감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은 기도라는 마술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누리게 되는 축복입니다. 신자가 받은 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이 세상에서 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드러날 것이고,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그 믿음은 에덴에서 쫓겨난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일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을 확인하는 믿음입니다.

5. 살아서나 죽어서나 신자의 유일한 위로는?
여러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일문답을 기억하십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2문은 이렇습니다.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대답입니다.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할 때 우르시누스(28세)와 올레비아누스(26세)는 프랑스 위그노들이 당한 핍박과 죽음에 관한 소식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르시누스는 “그들이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이 위로가 되시겠지요?”라고 말했고, 올레비아누스는 자기가 유학길에 오를 때 한 노신부가 한 말을 기억해냅니다. “여보게, 일생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다는 믿음이 주는 위로 말고 다른 위로는 없다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이 말이 우리 요리문답의 시작으로 딱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신앙고백입니까?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고백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가졌던 신앙고백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런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증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을 십자가에서 입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주와 복음을 인하여 많은 고난을 겪은 인물입니다. 그는 빌립보서 1:21을 이렇게 스스로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 내게 유익이기 때문이다.”(한글개역/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은혜와 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오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망해도 흥해도 복을 받은 자요, 그에게는 망함과 흥함 모두가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것을 알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비로소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일로 말미암아 범사에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받아 누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부터 받아 누리는 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범사에 감격하고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이런 복된 감사의 은총으로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