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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주일 2012 - 성도의 감사는 오직 그리스도.

로마서 8: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2-11-18

말씀내용
1. 감사하지 않는 문제의 근원
저는 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하셨던 분으로 제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은 하늘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분은 ‘무엇이라도’ 주신다는 추상적인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어주신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저는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아버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하여 충분히 감사를 표현하여 드리지 못했습니다. 지나고 난 뒤의 아쉬움입니다. 동시에 지금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해서 충분한 감사를 표현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에 개재되어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감사하지 않는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감사한 것을 감사한 일로 깨닫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고 병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받은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것이 중요한 한 가지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돌아보면 제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제가 제 아들과 딸에게 제 아버지만큼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2.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나타난 방식(요 3:16; 요일 4:9)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그 생명을 주신 일입니다. 우리가 몇 주째 계속해서 요한복음에서 상고하고 있는 바,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신 그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요한일서 4:9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들과 함께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신데서 하나님의 위대하고 끊어질 수 없고 실패할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넘어질 수 밖에 없고, 우리 삶의 상황의 변덕스러움만큼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 변덕스러움을 경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주신 그리스도인에게도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의 상황은 옵니다(8:35). 이런 일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확실하게 말씀하는 것은 이렇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일을 그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확신시키려고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근거(신 29:29): 신뢰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신명기 29:29을 읽어봅시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이 구절에 의하면, 나타난 일은 성경에 계시된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합니다. 이런 일이 고통을 가져다 줄 때,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런 오묘한 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하나님이 특별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허락하신 일이므로) 이런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만일 모든 것이 다 나타난 일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까? 이 오묘한 영역,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뢰를 요구하시는 영역이라는 사실입니다.

4.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롬 5:8)
우리는 또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그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롬 5:8). 이 근거 외에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이것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5. 성도의 감사는 오직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
이것이 <성도의 감사는 오직 그리스도>라는 설교 제목으로 제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일상적인 감사의 제목들은 감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편일 수 없습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성도가 불평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오직 이 사실에만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인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아낄 것이 없으시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얻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나를 위한 이유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반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얻고 누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진정 자기의 구주와 주님으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결코 삶의 만족이라는 자기 기만 속에서 좀체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삶의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가 우리의 감사의 조건과 상황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감사는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감사의 조건들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어떤 것과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가 성도의 유일한 감사라고 말해야 할 만큼 최고의 탁월한 감사의 조건이고 제목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라는 은혜와 선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3).”

6.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시 57:2)이라는 고백이 나오기까지..
여기까지는 머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논리입니다. 문제는 이 논리를 알면 감사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질문의 형태로 주어진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런데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논리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에게 논리는 중요합니다. 로마서는 다른 모든 서신처럼 사실상 믿는 성도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5:5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믿는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 사랑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아십니까? 이것보다 중요한 질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 사랑을 아는 자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롬 5:3). 바로 그 사랑을 알기 때문이고, 또 하나, 로마서 8:32의 논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환난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시지 않았는가? 반드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환난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환난인 줄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속에서도 즐거워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 내용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합니다.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감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알지 못하는 대상을 즐거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더 알게 될 때, 내 감사가 오직 그리스도일 때,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내 감사가 오직 그리스도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려놓을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이것,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이 되실 때, 하나님이 그의 감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보상이 되셨을 때, 이런 순종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32의 구약 버전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낄 것이 없었습니다. 아들 독자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셨습니다. 이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어주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아끼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감사이고 성도의 삶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어떤 형편 가운데 있든지 하나님께 우리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입니다. 누구나 다 마음만 고쳐먹으면 할 수 있는 감사가 아니라,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진짜 감사인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57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시 57:2)이라고 우리로 하여금 고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입증된 하나님의 사랑, 자기 아들이라고 아까지 않으신 사랑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우리 모두가 주님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감사주일에 이런 은혜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