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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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주일 2010 - 예배, 하나님께 감사하는 유일한 수단 렘 설교말씀

예레미야 32:36-4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1-21

말씀내용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는다고 하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그리고 친밀하게 인격적으로 알고 그분을 경험하셨습니까?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인식하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백해무익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여러분의 소중한 것을 결코 나누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번에는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어떤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사십니까? 여러분은 그분과 얼마나 시간을 보내십니까? 여러분은 그 분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얼마나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이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분이 좋으십니까?

저는 오늘 감사절에 “우리 다 함께 하나님께 감사한 제목들을 찾아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마치 어떤 사람이 나의 어린 자녀에게 뭔가를 주었을 때, 아이 머리를 억지로 누르면서 “고맙다고 말씀드려야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느껴져서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식의 감사를 억지로 우리에게 강요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껏 그 정도의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우리의 현실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 일체를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태도, 물질에 대해서, 시간에 대해서, 여러분의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여러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여러분이 취하고 사시는 여러분의 태도가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여기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저는 오늘 감사주일을 맞아, 제 신앙 여정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식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전환을 가져다 준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제가 이 말씀을 설명하는 것을 이미 들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그렇듯이 이 말씀은 언제나,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더 깊이 인도해주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저희에게 부어주사,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은혜 가운데 깊이 빠져들어가기를 구합니다.

본문은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멸망을 예언했기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고생을 했고 사람들과의 적대감만이 형성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멸망의 확실한 예언에 이어 오늘 본문처럼 회복의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멸망을 눈 앞에 두고 있고 그 멸망에 대한 소식만을 들은 많은 백성들에게 이런 먼 미래의 회복의 약속 따위는 하등의 위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눈 앞에 있는 것에 팔려서 살면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에 정신이 팔리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광 따위는 잡을 수 없는 구름 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약속은 당시 유다 백성들을 향한, 특별히 유다의 신실한 남은 자들을 위한 메시지였고 약속이었고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구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달해줍니다.

1. 영원히 최고로 중요한 질문: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을 살피기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도전을 드리길 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십니까? 확실합니까? 확신이 있으십니까?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거듭남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열매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그리고 생활 속에서 보고 계십니까? 제가 이런 질문은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일평생 사는 동안, 받게 되고, 생각해보게 되는 그 어떤 질문 보다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질문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대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약속의 의미(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시길,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38).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회복과 영광의 약속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약속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던진 질문은 우리가 본문을 상고하기 전에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아무리 좋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워도 만일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그 약속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 약속은 내게 저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그리고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약속처럼 감미롭고 아름답고 값진 약속은 없을 것입니다. 이 약속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 혹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가 우리가 어디서 영원을 보내게 될지를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그 질문에 대한 여부가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내용 조차 결정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언약(39~41): 동등하지 않은 일방적 언약
도대체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것을 ‘영영한 언약’이라고 하심으로써 그 약속의 확실성을 보장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쌍방의 의무를 가지는 동등한 조건의 언약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것을 해라, 혹 저것을 해라 하는 의무 조항에 대한 말씀이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겠다, 저렇게 하시겠다 하는 하나님 편에서의 의무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동등하지 않은 일방적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평등하고 일방적 언약이기에 이것은 언약의 한편 대상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이고 복음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약속/언약의 성격을 보았다면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A. 선을 베푸는 일을 절대로 그치지 않겠다(40).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39절에 “자기들과 자기 후손들의 복을 위하여”라고 하셨고, 40절에는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라고 했으며, 41절에는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복을 준다’는 표현은 바꾸어 표현하면 ‘선을 베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선을 베풀어주시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계시며(39, 40), 또 실제로 기쁨으로 그렇게 하십니다(41). 선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이시기 때문에, 그 존재로부터 흘러나오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을 위하여 선을 베푸는 일을 절대로 그치지 않겠다.” 그런데 이 약속의 대상인 ‘너희와 너희 후손’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38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약속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약속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마음은 알겠는데 도는 무슨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하면, 하나의 길입니다. 두 길이 아니라, 한 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늘 두 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었고 또 하나는 이방 신들을 섬기는 길입니다. 언제나 두 길 이상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마음도 언제나 두 마음 이상으로 나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한 마음, 한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과 자기 자손들의 유익(선)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 다른 마음이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단어도 39절과 40절에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경외함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가장 합당한 태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신을 벗는 것,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탄성을 지른 것, 사도 요한이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 발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렸던 것 등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이 경외함은 인간을 엎드리게 하는데 그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그 후손의 유익을 위하여 한 마음과 한 도로 행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39절의 의미입니다. 40절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의도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임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베풀어주시는 일을 결단코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자기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영영한 언약으로 약속하십니다. 이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심어놓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라고 한 부분은 “나를 예배하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게 하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배하라는 의무감을 심어주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예배하고 싶은 열망이 가슴에서부터 절절이 일어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는 하나님의 곁을 자기 발로 떠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의 역사는 늘 하나님을 떠나는 역사였는데, 이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선하신지, 얼마나 선을 베풀어주시는지를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알았다는 말보다, 확실하게 경험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B. 너희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나의 기쁨이다(41).
이제 하나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조금의 불일치도 없는 일을 하시기에 자기 자녀들,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선하심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하나님의 베푸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유다 백성의 돌아온 자들을 그 땅에 다시 심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이 기쁨이시라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조금의 피곤함도 없으며, 오히여 하나님의 취미와도 같은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사명 선언문은 “나의 사명은 ________를 섬기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심으시면 아무도 뽑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약속, 영영한 언약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하실 일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바로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4. 해석과 교훈
먼저 우리는 이 언약/약속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A. 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졌다.
먼저 여기 본문에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신 일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으시게 한 일, 모든 구원의 일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하여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믿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위하여 행하시고 완전하게 성취하신 일을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이 약속의 수혜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인은 이 약속을 경험한 자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약속의 열매, 은혜를 경험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달리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고 경험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C.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반드시 덧붙여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약속과 언약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감동시키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주도적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단지 그 ‘일어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경외함으로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5. 형식주의자와 위선자를 해방시키는 힘있는 복음
그래서 복음은 힘이 있습니다. 어떤 힘인가 하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롬 1:16), 모든 죄악의 세력을 복종시키며, 죄인을 묶고 있는 모든 형식주의와 위선의 결박을 끊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하여금 참 자유함을 경험하고 누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경험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형식주의자나 위선자로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이 그 결박을 끊어버린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유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불완전한 형식 속에 보호하려고 하거나 위선이라는 틀로 자신을 위장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자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선을 베푸시기를 그치지 않으시는 분이신 줄 알기에 그는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용납하게 되고,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합당하고 바른 기대를 하며 기뻐할 줄 압니다. 현재와 장래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자신감 혹은 당당함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만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건방진 담대함 같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겸손한 당당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뒤에 계시고, 자신의 옆에 계시며, 자신의 전 존재를 사로잡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언제나 영원히 선을 베풀어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때문에 가지는 당당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 같은 것에 자신을 얽매일 이유가 없고, 위선과 같은 것으로 자신을 치장해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가짜는 꾸며야 하고 위장을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는 그래야 할 이유도 필요성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무조건 감사를 많이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그 이상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 같이 배은망덕한 존재들에게 말할 수 없이 선을 베푸시고 또 베푸시고 또 베푸셔서, 우리의 돌같고 철 같은 마음이 감동이 되고 하나님 앞에 물처럼 녹아지기까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정말 억누를래야 억누를 수 없는 감격으로 인하여 감사함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 이것이 성경이 설명하고자 하는 참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신앙은 그저 신앙에 대해서,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아름다우심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내 가슴 속에서 터져나오는 감격으로 그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6. 하나님을 아는 자의 유일한 반응
그러므로 이 진리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보게 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반응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것은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이 유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자는 이렇게 밖에는 반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잘 드리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열망이 일어날 만큼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억지로 예배를 잘 드리라고, 좀 더 예의를 갖추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예배는 견딜 수 없는 열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모든 선하심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하게 될 때,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여 드리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일마다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그 모든 감격과 감사의 표현이 한데 모아져서 폭발적으로 그 선하신 영광의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열망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그 모든 복과 선하신 은혜 안에서 만족함으로 여러분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모든 형식과 장식과 위선의 옷을 벗어버리십시오.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왕의 위신을 생각지 않고 춤추며 기뻐했어야 했던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구하십시오. 그 자유함을 말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섬겨드려야 하는 하나님이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섬기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서 언제나 영원히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그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주어진 방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7.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이신가?
이제 저는 다시 한 가지 질문을 여러분께 드림으로써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 그 선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이십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그 선하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은 바로 그 하나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당신은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만일 이 모든 질문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말한다면, 바로 지금 그 선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직 공의로우심으로 당신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영원한 진노와 지옥의 형벌만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물리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오늘, 그 선하신 영광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그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온 여러분의 모든 삶이 얼마나 죄악된 것이었는지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삶을 걷어치우십시오.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라는 확신 가운데 계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분들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여러분의 예배와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견딜 수 없는, 억누를 수 없는 그 선하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가슴이 터질 지경이 되도록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