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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세례

로마서 6:3-5, 고린도전서 15:3-4, 로마서 4: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4-09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음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의 성격과 의미를 바꾸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의 의미를 바꾸어 내셨는지, 그리고 죽음의 의미가 바뀐 것을 알게 된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사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부활하셨다. (고전 15:3-4,14,16,19,51-53; 롬 4:25)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육체적 부활 사건을 통해서 입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의 핵심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 15:3–4).”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 대속의 죽음과 함께, 육체적 부활의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의 관념이나 철학적 진리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나 우리의 믿음이 허황된 가짜가 될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고전 15:14,16), 신자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5:19).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고 기독교 신앙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 대속의 죽음의 효력과 의미를 믿을 근거를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롬 4:25).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육체로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형벌 대속의 죽음이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졌음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표현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형벌의 죽음을 받으셨음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샘 올베리(Sam Allberry)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승인해주신 사건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우리 죄값이 다 치루어졌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의 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 문서에 서명하심으로써 모든 계약이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확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입니다.
네 복음서가 예수님의 육체 부활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활 사건을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육체 부활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영으로만 부활을 하셨다면, 그것은 결코 참된 부활의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육체의 감옥 속에서 살다가 죽음을 통해서 그 영혼이 감옥에서 풀려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비록 죄의 결과로 성도가 죽음을 통해 그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지만, 역사의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의 영혼은 부활을 통해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되고 이로써 그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고전 15:51-53).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장차 우리의 부활과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는 그림이며, 근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모든 신자에게 소망이 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장차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여기고 환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대 교회 신앙의 핵심이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구약 안식일의 성취라고 여기게 됨으로서 안식일은 주일로 대체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고 객관적 사건이었습니다.


2.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
이런 기독교 신앙의 기초 위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울 사도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가 죽음 이후에 주님 재림하실 때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을 보증하므로 그날을 바라보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의 삶에서도 어떤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우리의 죽음 이후에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A. 세례를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롬 6:3,11)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세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세례의 첫번째 의미는 세례로써 신자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는 것입니다. 3절 상반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세례는 참된 신앙과 그 고백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의식 자체가 신비적 힘을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은 이 부분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식을 함으로써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서 한 몸을 이루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교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된(하나가 된) 신자를 보실 때, 마치 그리스도를 보시듯이 보시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신자 자신이 이제 자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고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11).”

B.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선언이다. (롬 6:3,4,5,6-7)
이제 5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로마서 6:5).”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같은 모양으로’라는 말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신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유사한 방식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같은 모양으로’라는 말은 ‘유사한 방식으로’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정확하게 우리에게 적용되려면, 우리가 죽은 이후 마지막 날에 부활할 때에야 비로소 부활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미 신자의 죽음 이전에,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유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조금 더 확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3절을 다시 보지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로마서 6:3).” 세례의 방식이 침수냐, 물을 뿌리는 것이냐 보다 중요한 것은 세례의 의미라는 점에서, 세례 방식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지만, 조금 설명드리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일반적인 세례의 방식은 물 속으로 침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는 물론 물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또한 죽음의 의미를 지니는 것도 분명합니다. 세례는 옛 사람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롬 6:6).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물 속에 잠길 때,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가 됩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물에 침수함으로써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로마서 6:6–7).”
바울 사도는 죽어서 땅에 매장되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4a).” 매장은 죽음을 인치는 의식입니다. 그렇게 세례를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옛사람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C. 세례로써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을 살기 시작한다. (롬 6:4)
바울 사도는 세례를 신자의 삶에 조금 더 적용하는데로 나아갑니다. 4절 전체를 읽어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6:4).” 세례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부활도 세례 이후 신자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신자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다시 살아서 그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생명은 부활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비록 우리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이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만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고, 예수님의 죽음과 유사한 방식의 죽음을 경험한 신자는 예수님의 부활과 유사한 방식으로 부활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의미입니다.


3. 교훈과 적용
자, 그럼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매년 기념하는 부활절을 우리는 어떻게 기념해야 합니까? 매년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유익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A.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 (롬 5:20; 6:1,2,6,11)
평생에 반복해서 받을 수 있는 성찬과는 달리, 신자는 평생에 단 한 번 세례를 받습니다. 하지만, 한 번 받은 그 세례의 물 무덤이 죄에 대하여 갖는 의미는 평생에 걸쳐 날마다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가 많으면 은혜를 크게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합니다(롬 5:20). 이렇게 말하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되겠습니까?”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롬 6:1).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을 하면서, 바울 사도는 세례의 의미를 설명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의 정체성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롬 6:2).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니, 이 정체성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세례 받은 신자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롬 6:11). 신자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롬 6:6). 이것을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한 번 받은 세례가 우리의 평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은 신자는 평생토록 날마다 통회하는 회개를 통해 그 세례의 씻음의 자리로 나아감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신자의 전 생애는 회개”라고 한 말은 이런 배경을 가지는 말입니다. 회개는 죄를 죽이는 일입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것은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신자는 날마다 회개함으로써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자가 된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경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 이 땅에서 신자가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길은 날마다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를 함으로써 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결정적으로 죽은 우리의 옛사람이 날마다 죽고, 새 사람이 날마다 사는 것을 경험합니다.

B. 날마다 경험하는 용서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죄는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뿐 아니라, 죄는 인간 안에 모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들을 가져왔습니다. 죄책감과 수치심, 두려움과 낙심, 상처와 열등감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 없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믿음의 경주를 마칠 때, 그 부정적 감정들과의 싸움도 끝이 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사 이루신 모든 죄 용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죄의 용서가 세례 안에 자리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용서를 경험할 때, 우리 안에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물러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C. 세례를 기억하라. (롬 6:3-4; 엡 2:4-6)
신자는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꺼낸 주제는 세례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세례가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의식이므로, 신자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신자들은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하나가 되었으며, 이는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부활의 유익을 누리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세례를 기억함으로써,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날마다 용서를 새롭게 경험하는 부활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노라면, 우리 안에서는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세례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삶을 보여주는 성례입니다. 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을 묘사하는 새 언약의 규례입니다(롬 6:3-4; 엡 2:4-6). 세례를 날마다 기억하십시오. 세례를 기억하는 행위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여러분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이 세례를 날마다 기억하고,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사는 동안 날마다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