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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눈을 밝히사

에베소서 1:18-19, 누가복음 14:12-14, 고린도전서 15: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4-04

말씀내용
로마의 압제 아래 살아가던 많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구원하고 다윗의 시대와 같은 황금시대를 열어줄 것에 대한 기대로 연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적을 행하였고 죽은 자도 살리셨던 메시아는 로마 총독에게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음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어둡습니다. 온 세상이 죄로 얼룩져 있고, 만족할 줄 모르는 죄인의 탐욕은, 경제적 부정과 착취, 힘에 의한 혐오 폭력, 또는 인종과 계급과 성별 간의 다툼, 각종 영유아 학대와 살해, 그리고 권력 탈취를 위한 무자비한 학살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는 뉴스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과연 이런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습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장이이거나 정치인, 그것도 아니라면 현실을 읽을 줄 모르는 무능한 바보일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많은 젊은이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자녀를 낳지 않으며 주식에 대박의 희망을 걸거나 아니면 미래 없는 현재에 자신들의 삶을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한순간에 경제적 어려움, 혹은 치명적인 질병, 가족들의 무서운 사고가 우리와 우리 가정에 미칠 수 있는 인생은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어둠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실제로 죽으신 주님께서 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부활하신 사건은 기자가 기사화할 수 있는 사실이었고, 역사가가 기록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의 삶과 소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과연 주님의 부활 사건은 어두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위대한 반전(The Great Reversal) (고전 15:17; 롬 4:25; 마 8:20)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의미를 되짚어봅시다. 주님의 부활은 위대한 반전(The Great Reversal)이었습니다. 반전이란 말은 사람들의 예상을 깬다는 의미이고, 위대한 반전이라고 하면, 아무도 그것을 예상하거나 기대할 수 없었다는 강조가 더해진 표현입니다. 주님의 표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도 없이 보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수 차례 들었던 제자들 조차 주님의 부활을 거의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역사상 많은 소설, 희곡, 드라마, 영화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삽입되는 어떤 반전의 요소도 인류 역사에 주님의 부활 사건에 견줄만한 반전은 아닙니다.
온 몸에 피가 흐르는 주님께서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흥 종교는 끝장났다고 모두들 생각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은 망연자실하여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안식일 다음날 새벽, 무덤이 열렸고 주님은 죽음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때 주님의 부활 사건이 온 세상에 가져올 파장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과 교회 역사를 통해 그 파장을 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사도행전과 교회사의 그 어떤 일도 이렇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어진 주님의 부활 사건은 대반전입니다. 주님은 당대 유대인들의 기대처럼 이땅에 오셔서 거사를 위해 세력을 모으시고 반로마 독립전쟁을 일으켜 유대를 독립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으시는 방식으로,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사 율법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하게 해결하심으로써,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그 죽음의 의미를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죽으심의 목적이 효력 있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린도전서 15:17).”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살아나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심 이라고도 말씀했습니다(롬 4:25).
십자가와 부활은 대반전의 두 중심축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으로, 여자에게서 나심으로써 오셨습니다. 이것은 무한한 낮아지심입니다. 몰락한 유대 왕손으로 오신 주님의 첫번째 침대는 화려한 왕실의 황금 침대가 아닌 말구유였습니다. 그리고 30세까지 무명의 노동자로 사셨습니다. 그후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메시아로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셨던 주님의 공생애 기간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만한 삶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마 8:20). 그리고 어느 유월절, 그분은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로 로마 총독의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예루살렘 영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으셨습니다. 이미 무한히 낮아지신 주님은 죽기까지 계속 낮아지셨습니다. 생명의 주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행 3:15).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때,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살아나신 것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현재 속으로 뚫고 들어온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자연 질서를 깨뜨린 기적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의 본래 의도된 상태로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싸인입니다. 죄와 악, 무질서, 부조리와 불의, 질병, 고난, 불의의 사고와 죽음 등이 아담의 범죄 후에 세상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주님은 사형선고를 받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써 주님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현재 속에 가지고 오셨습니다. 부활 사건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2. 신자의 소망의 의미와 능력 (고전 15:20)
고린도전서 15:20에 쓴 대로,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보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장차’ 말고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우울하고 희망 없어 보이고 불안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입니다.
A. 큰 그림을 보게 한다.
먼저 주님의 부활은 부활을 믿는 신자로 하여금 큰 그림을 보고 살게 합니다. 지금 사는 삶이 다가 아니라는 인식을 넘어, 인생의 모든 사건을 장차 누릴 부활의 영광과 승리의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기독교가 처음 몇 세기 동안 박해 속에서도 놀랍게 성장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엄청난 전염병이 로마의 도시들을 휩쓸던 암흑 속에서 기독교는 언제나 희망의 원천을 제공했습니다. 신자들이 그 무서운 전염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도 죽어가면서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전염병의 상황을 더 큰 이야기, 우주적이고 영원한 이야기의 일부로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입으로만 읊조리는 고백이 아니라, 이런 큰 이야기를 보게 해주었고 그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 것을 보장해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보장된 미래가 현재로 들어와 있기에, 신자들은 동일한 고통 속에서도 두려움에 매여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은 채,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신자들에게 이런 큰 그림을 가지고 변화된 삶을 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B. 지적 동의만으로는 안된다. (요 20:28)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히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정도의 지적 동의를 가지고 이런 급진적인 삶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의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지적 동의를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실재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저녁에 줄행랑을 쳤던 그 겁쟁이들이 그 만남 후 사자 같이 담대한 자들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을만한 증언들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던 도마가 주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수십년 동안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해 지적 동의만 하며 살아온 분들은 안 계십니까? 한 번도 자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힘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골 1:29)? 바른 진리를 잘 배우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참 신앙은 바른 진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에서 더 나아갑니다. 그 진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 진리가 마음의 정서적 습성에, 성품에, 삶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자신이 그 진리에 의해 빚어져야 합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C. 신자의 삶에서 반복되는 반전 (눅 14:26-27)
한 가지 오해는 짚고 가야겠습니다. 신자들이 주님의 부활에 근거하여 품는 희망은 소위 인생 역전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 역전을 바라고 현재의 고생을 견디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희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졌더니, 하나님께서 인생 역전의 복을 주셨다는 게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 유사한 반전을 경험합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6–27).” 내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내 십자가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낮아짐과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반전이 너희 삶에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나야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팀 켈러의 말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도 그분의 대반전을 통해 구원받고 변화되려면 각자의 반전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이 권력의 발휘가 아닌 자발적 상실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듯이, 우리도 이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혼신을 다해 완전한 덕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 아니라 극도의 연약함과 무력함과 결핍을 인정해야 한다. 그분의 약함과 수욕이 진정한 힘과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듯이, 우리도 회개하고 죄책과 죄를 인정하는 것만이 최고의 확신과 영예 즉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의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받아 주신다는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어떤 선물은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 (『부활을 입다』p.146-147).
복음은 반전이고 역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그분이 내가 생각하던 대로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여러분의 믿음을 의심할 것입니다. 반전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은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주님!”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다니요. 이해할 수 없어요.” 또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실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은 하나님이 내가 생각했던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포함합니다. 복음은 역설이고 부활은 반전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그 회심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것 같은 철저하고 온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과한 신자만이 주님처럼 자신의 삶에서 죽음과 부활을 꾸준히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D. 성화의 은혜 (고전 15:31; 눅 14:12-14)
죽음과 부활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은 신자를 삶의 구석 구석에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삶이 머리와 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이 죽음과 부활의 반복되는 삶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하는 선택입니다. 바울 사도가 어디서 이 말을 했습니까? 바로 부활장이라고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말을 했습니다. 그가 날마다 죽는다고 말할 수 있음은, 주님처럼 자신도 부활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은혜는 주님의 대반전을 따라 살아갈 때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주님은 잔치를 베풀 때 부자 이웃 보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12-13).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고대세계에서 잔치는 사회생활에서 인맥을 쌓고 호혜적 관계를 맺는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나보다 괜찮은 지위의 사람을 청하여 그에게 베풂으로써 좋은 관계를 맺고 후에 베풂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4:14).” 바로 부활의 때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답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답 없이 이웃을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죽음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한 결정을 그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어떻게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희망과 능력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땅에서가 아니면 영원 속에서 하나님은 기가 막힌 대반전을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E. 깊은 확신 (엡 1:18)
“말이 쉽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라는 질문이 올라오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큰 그림에서 우리 인생을 볼 수 있고, 답 없이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부활이 주는 희망은 근거 없는 주관적 바람과는 다릅니다. 만일 우리 희망의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것은 주관적 바람에 지나지 않겠지만, 하나님이 우리 희망의 대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희망이라기 보다 깊은 확신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실제로 헬라어로 ‘희망하다, 소망하다’라는 말은 ‘깊은 확신’을 의미합니다. 이 희망은 주님의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부활을 통해 보증된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입니다. 사도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로써 이미 현재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보아야만 우리는 죽음과 부활의 반전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 희망이 선명하게 경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 처럼 현재에 모든 것을 걸고 살 것입니다. 신자가 다르게 살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갚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을 것을 보고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그것을 볼 수 있기에, 바울 사도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 눈이 밝아져 부르심의 소망을 보게 될 때,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가장 바보 같고, 어리석은 결정도 하게 됩니다. 부활의 희망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절망과 불안, 두려움이 가득한 어둠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언제 어떤 일이 나와 내 가정에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고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밝히 보면,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그 나라의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되고, 절망의 순간에도 참되고 영구한 희망이 마음에 용솟음칠 것입니다.


3. 교회, 희망 공동체 (히 11:1; 갈 5:6)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를 둔 희망 공동체입니다. 교회에서 희망을 제거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본질은 소망이며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눈 앞의 증거처럼 보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 그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눈에 비친 교회는 바보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 그리고 결핍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자신에게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팀 켈러의 말입니다. “당신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는 만큼만 믿음이 당신의 삶에 사랑으로 분출된다.” (『부활을 입다』p.160).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지만, 은혜의 절대적 필요를 자각한 사람들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경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는 만큼, 눈먼 사랑, 답 없이 인애를 베푸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상을 펼치시고 교회를 먹이십니다. 당신의 몸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게 하십니다. 떡과 포도주를 통해 말도 안 되는 그 사랑, 그 은혜를 맛보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상에서 성찬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그렇게 교회는 절망하는 세상에 참된 희망의 빛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