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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예배 - 날마다 은혜 받는 심령으로

마태복음 5:3-10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21-01-01

말씀내용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오늘은 새해의 희망과 포부로 가득해야 하는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의 상황을 떠나서 거의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새해의 포부와 바람을 나누었을 것이고, 새해에는 어떤 일들이 세상에 펼쳐지게 될지 예측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가령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 세계의 변화와 같은 것들에 흥미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언제 이 상황이 끝날지 예측할 수 없다”고 말들을 합니다. 백신이 구세주일 것 같았지만,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좀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인정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며, 하나님이 이 상황을 허락하셨고 하나님만이 이 상황을 끝내실 수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인간이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못하실 일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조금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하나님께서 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통해서 인간을 낮추셨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세계 경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과 경제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과 영세 상인들 뿐 아니라, 많은 기업들도, 교회들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2021년을 시작하면서 묻습니다. “우리는 낮아질 만큼 충분히 낮아졌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차치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더 낮아졌습니까? 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게 되었습니까? 더 겸손해지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코로나만 지나가면…하겠다”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까?


비록 우리가 새해의 예산을 세우고 어느 정도의 계획을 세우는 일은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무엇을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에게는 새 예배당에 대한 기대와 계획과 꿈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각오도 다져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것도 피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한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2021년을 바라보고 시작해야할까요? 오늘 신년예배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가장 기본이 되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의 말씀 중 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특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라, 애통하는 자가 되어라, 온유한 자가 되어라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천국과 위로와 땅의 기업을 보상으로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신자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주님께서 천명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다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은 이런 특성을 드러낸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본질적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신자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은혜로 죄씻음을 받은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그 은혜를 입고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가 맞습니까? 여러분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까? 그 큰 은혜를 받은 여러분은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이 삶에서, 행위에서 완벽한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신자라면,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 새해에는 여러분의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저는 새해에 여러분 모두가 가난한 심령의 복을 충만히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복 빎을 받아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도리어, “돈 세다 잠들게 하소서”가 더 좋아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으로 2021년과 평생을 살아가세요”라고 하는 말이지요. 이보다 큰 축복을 빌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런 복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자신만만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자신만만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끔 쓰는 표현이지만, 신자는 주신만만(主信滿滿)한 사람입니다. 신자는 주님을 떠나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요 15:5).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이 자신만만하게 살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조치는 종종 우리에겐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낮추시는 것이지요. 우리 심령을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십니다. 가난한 심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도, 그 말씀도 다 스쳐 지나가는 것 이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령을 하나님은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우리의 왕이 되어 우리를 다스리시기 위하여 우리를 언제나 낮추시고 언제나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자신의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을 볼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은혜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인 것을 감격스럽게 경험합니다. 때로는 시편 73편을 쓴 아삽 처럼,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질투함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시험에 들 때가 없지 않지만, 그는 다시 가난한 심령의 은혜를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심령의 복을 아는 신자는 이룬 성공과 획득한 물질, 그리고 이룬 업적으로 심령이 부유해진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의 복,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복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새해에는 여러분에게 애통하는 복이 그득 하기를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희희낙락하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애통함을 패자의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신자는 애통하는 복을 누리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우리가 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좀 못 해도 괜찮습니다. 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잘 하는 척, 모자라지 않은 척, 잘 나가는 척 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일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도자기인 양 행세하고 싶어합니다. 약한 모습 보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울음과 눈물을 할 수만 있으면 감추고 살고 싶어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울 줄 아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치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그래도 참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듯이, “사내 자식이 왜 울어?”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애통해라. 울어라. 그게 내 자식이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로하마” 말씀하십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어디 가서 울 수 있습니까? 어머니는 과연 울 수 있습니까? 사실, 자식들도 조금만 자라면 잘 울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는 잘 우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의 교회, 애통함의 은혜를 아는 교회, 그래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줄 아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세상에는 겉으로는 웃고 있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우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는 위로 받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달콤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어떤 위로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으로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애통하는 은혜, 애통함의 복이 그득 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온유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온유함은 약함이나 비굴함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사실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이고 태도입니다. 온유함은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성품이고 태도입니다. 뭔가 자신이 스스로 불편한 사람에게는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강합니다. 강하기 때문에 온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배려합니다.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에는 온유하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잃어버릴 수 없고 빼앗기지 않을 기업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조카 롯은 누가 보아도 좋았을 땅을 선택하여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보는 땅, 동서남북으로 다 네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을 누립니다.


온유함은 또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그 태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얻는 자가 됩니다. 온유함의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넷째로 새해에 여러분 모두 의에 주리고 목 마르는 복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도 주리고 목마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배부르고 만족스럽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 욕구는 결코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돈에 주리고, 성공에 목말라 합니다. 하지만 그 채워지지 않는 인간 심연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리고 목말라야 할 대상은 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며 성공도 아닙니다.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의가 의미하는 핵심 개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음은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간절히 붙잡는 사람입니다. 그가 없이는 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의에 배불러 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 것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는 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죄악을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을 만끽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에 여러분이 돈과 성공과 명예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그러면 돈과 성공과 명예로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들이 누릴 복은 그들이 원하는 의를 얻는 것이라고 약속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팔복 전부를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회가 될 때 상세하게 팔복 혹은 산상수훈 전체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적용을 제시하겠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가난한 심령, 애통하는 마음,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회개입니다. 2020년을 시작하면서 기도저널을 쓰자고 했습니다.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훈련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저널을 통해서 얻은 유익을 나눠 주셨습니다. 새해에는 특별히 회개를 훈련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돕기 위해서 회개와 관련한 문서를 어제 온라인으로 나눠드렸습니다. 매일 매일,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는 우리를 가난한 심령, 애통하는 마음, 온유함,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를 거룩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팔복으로 교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 복을 다 누리십시오. 세상에 다른 어떤 복과도 비교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 복이 진짜 복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은혜 받는 심령으로 살아가는 복입니다.


시편 73편 기자인 아삽의 고백을 여러분과 함께 읽으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편 73편23-28절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편 73:23–28).”


2021년 새해에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은혜 받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날마다!’ 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