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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14 - (4) - 설립 8주년 감사예배 - 충성으로의 부르심

마태복음 25:14-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10-12

말씀내용
<충성으로의 부르심> 마 25:14~30


1. 문맥: 감람산 강화(24~25장)
달란트 비유로 알려진 이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던 마지막 주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문맥은 24장부터입니다. 24장은 감람산 강화로 알려진 주님의 긴 설교이고 25장까지 연결됩니다. 이 긴 설교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24:3).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 질문이 24장과 25장의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달란트 비유도 이 관점에서 살펴야 합니다. 세상 끝, 즉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있게 될 마지막 심판에 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의 앞과 뒤에 있는 말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는 열 처녀의 비유라고 알려진 말씀이 나오고(25:1~13) 뒤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하시는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25:31~46). 모두 마지막 때, 재림과 심판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언젠가 재림하실 것이고, 그 때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2. 비유의 내용과 의미
이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멀리 타국으로 사업을 벌이려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에야 비행기로 지구 반대편을 오가면서 사업을 하고 얼마든지 원거리에서 사업을 관리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타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수년 혹은 그 이상 자리를 비워야 했고 그 동안 본국의 사업은 믿을만한 종들에게 맡겨야 했습니다. 종들은 그저 막노동을 하는 노예라기 보다는 노예 신분이기는 하나 그 집안에서 일하는 가족과 같은 존재이고 그 중에는 큰 사업을 믿고 맡길만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정도의 재량과 자유도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사업을 나눠서 종들에게 맡기는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비유에는 세 명의 종이 등장하는데, 각각 다섯, 둘, 한 달란트씩 나눠주고 사업을 하게 했습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노동자의 평균 연봉 20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40,000불 연봉을 가정할 때 한 달란트는 80만불(약 8 억원)에 해당되고 다섯 달란트면 400만불(약 40억원) 정도가 됩니다.

A. ‘각각 그 재능대로’ 맡겼다(15).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세 종에게 각각 다섯, 둘, 그리고 한 달란트를 준 것입니다. 차별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5절에 ‘각각 그 재능대로’라고 한 말을 보십시오. 주인은 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죽 보아왔고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능력이 부족한 종에게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맡겨서 넘어지고 실패하게 만드는 주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각각 ‘재능대로’ 자기 소유를 맡겨서 사업을 하게 했습니다. 능력에 따라서 맡기는 일이 다른 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아시고 거기에 맡게 우리 인생을 다루십니다.

B. 종들은 다 주인의 소유를 ‘맡았고’(14), 그들에게는 기간이 주어졌다(16~18).
세 종은 각각 주인의 소유를 맡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소유를 가지고 사업을 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소유를 맡은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했지만,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두었다는 데서 그들에게는 자율성이 주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에 돈을 감추는 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하던 방식이었습니다. 다른 두 종은 ‘바로 가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두 종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들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인이 금방 오지 않을 것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기에, ‘바로 가서’라는 말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시사해줍니다. 주님은 기간을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다고 하셨으니 그 기간이 짧은 시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19). 우리는 다 주인의 소유를 맡은 자들입니다. 자기 것을 가지고 사는 자는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혹은 많이, 혹은 적게 맡았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 주인의 소유를 가지고 사업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종들입니다. 종들은 완전히 자율적이었으나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신자들을 한 시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그 속에 열정을 만들어주시고 빚어가시면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C. 결산의 때는 오는데(19), 남긴 이윤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 주인은 오래 전에 맡겼던 것들에 대해서 각각 종들에게 결산을 요구합니다(19). 이 비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주인이 결산을 하면서 종들이 남긴 이윤의 크기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과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은 각각 그 만큼씩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 두 종에 대한 주인의 칭찬은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23).” 세상적 이치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에 맡긴 달란트의 액수가 달랐던 것이 차별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맡았던 한 달란트를 열 달란트로 열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준 것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주인이 주는 상급이 넘치도록 은혜로운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인은 똑같이 두 종을 칭찬했습니다.

D. 주인은 ‘작은 일’이라고 말했다(21,23).
또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주인이 두 종을 칭찬할 때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두 종이 맡았던 액수는 요즘 시세로 각각 400만 불(40억원)과 160만 불(16억원)이었습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모두 ‘적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워낙 부자라서 자기 전 재산에 비하여 그 돈이 작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인이 상급으로 주려는 것에 비하면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우리의 시각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이 커 보이고, 자기 인생에서 가진 자기 능력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적은 일에 불과합니다. 인생 중에 그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큰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마어마한 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거나 자신에게 스스로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이 줄 상급에 비하여 적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상급을 소망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E. 초점은 종들의 충성됨/신실(信實)함이다.
자, 그러면 주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았던 종들을 칭찬할 때와 한 달란트 맡은 종을 꾸짖을 때 그것이 드러납니다. ‘착하고 충성됨’과 ‘악하고 게으름’이 대조됩니다. 이것은 사실 두 가지의 가치를 각각 비교한 것이라기 보다, 충성된 것이 착한 것이고 게으른 것이 악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인이 인정해주는 중요한 것은 충성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두 종을 칭찬할 때 각각 두 번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충성된 종아’라고 부르고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칭찬합니다(21,23). 이 단어는 다른 말로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한자로 ‘믿을’ 신(信)자와 ‘열매’ 실(實)자로 이루어져있는데, ‘열매’ 실(實)자는 다른 듯으로 옹골차다는 뜻이 있습니다. 꽉 찼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꽉 찬 것이 신실하다, 충성스럽다는 말의 뜻입니다. 영어로도 같습니다. 믿음이 faith이고 신실함이 faithful(ness)인 것과 같은데, 이것이 본래 헬라어 표현에서 그렇습니다. 믿음은 pistis 이고 충성됨은 pistos 로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충성되다는 칭찬은 믿음직스럽다는 말인데, 사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서 믿음직하다고 하시는 것은 그가 믿음에서 말미암은 행위를 한다, 믿음에 부합하게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함께 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 가운데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계 2:10). 이것도 ‘끝까지 신실하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믿음을 지키라, 믿음에 부합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에게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했습니다. 충성됨의 반대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그냥 천성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게으름을 신앙 생활의 주요 대적이라고 잠언은 말씀합니다(잠 6:6~11). 게으름은 영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의 게으름의 원인은 그가 주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오해였습니다. 그의 자기 변명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4~25).” 그는 주인이 굳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아주 ‘박하다’ 혹은 ‘냉혹하다’ 등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재능에 따라서 맡긴 달란트를 볼 때, 그리고 그들의 충성됨에 대한 상급으로 베푸는 많은 것을 맡김과 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축복은 결코 그 주인이 굳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종의 변명이 진심이었느냐, 그저 꾸며댄 변명이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는 주인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불충성스러운 게으름으로 일관하며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관계 맺음이 없는 주인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주인을 위해서 충성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쫓겨남이었고 저주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행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종들의 충성됨과 불충함은 전적으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3. 개인적 적용
이제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종말, 주님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과 관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결산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를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종들이고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 모든 것, 달란트에 대해서 하나님께 설명 드려야 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인생이라는 일정 기간입니다. 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언제 이 시간이 끝날지 모릅니다. 자,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생각할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조건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내게 맡겨주신 것이고 그것을 결산해야 할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가? 때로 우리는 그것이 크고 영광스럽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적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생각에 이르지 못할 때 우리는 언제라도 교만해질 수 있고 그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의 질문으로 집약됩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스러운가?” 우리는 이 질문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결산하게 될 때 얼마나 중요한 질문이며, 우리 인생에서 이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오늘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성숙이 그토록 중요하게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숙은 감당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미숙함의 특징은 자기 자신 외에 아무 것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함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믿음은 있어 보이는데 그것도 아주 좋아 보이는데 미숙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믿음이 없거나 매우 약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감당하기 시작할 때 사실은 그 사람의 믿음이 더 자라게 되고 성숙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이가 자라면서 성숙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조건을 한 달란트 밖에 안 된다고 하는 불평과 원망으로 썩혀두지 마십시오. 혹 자기를 위해서 그것들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살아가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불충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두 귀를 울리는 말씀인가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4. 교회적 적용
지금까지 저는 개인적으로 이 비유를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교회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래 제가 이 본문을 택한 것은 교회적으로 이 말씀을 적용하도록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역사 속에 존재했던(그들 대부분은 지역교회로서는 일정한 시간을 지내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모든 지역교회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물질적으로 부유했고 많은 능력을 맡은 교회였다면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역사 속의 모든 지역교회들도 ‘그 재능대로’ 주인의 달란트를 맡은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그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처럼 행동하기도 했고 어떤 교회는 재산을 잃고 불에 타고 죽어가면서도 그 충성됨을 보이며 사명을 감당한 교회들도 있습니다.
저는 가끔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하시는 것을 그려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름도 부르시겠지요? 그 때 저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게는 또 하나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주님께서 개인의 이름을 호명하실 뿐 아니라 교회의 이름을 호명하시는 것입니다. 죠이선교교회를 부르실 때, 역사 속에 존재했던 죠이선교교회에 속했던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겠지요. 그때 우리 교회는 그 충성됨에 대하여 칭찬을 받게 될까요, 아니면 게으름에 대하여 책망을 듣게 될까요? 물론 이것은 저의 상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리스도인을 개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속으로 불러내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허황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의 충성됨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우리는 받게 되겠지만, 이것은 결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속해있던 지역 교회에 대한 평가와 완전히 무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시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가족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나뉠 수 없듯이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죠이선교교회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생각해야 하고, 믿음으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은 부유한 물질을 맡기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섯도, 둘도 아닌 한 달란트를 맡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달란트를 맡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가지고 ‘바로 가서’ 일을 하는 충성됨을 드러내고 있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달란트가 무엇입니까? 저는 2세 교육이나 청소년 육성과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몇 년 전 장로님과 함께 동의하고 깨닫게 해주신 것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작은 교회임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분들이 이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듣고 큰 유익을 얻는 것을 종종 보여주셨습니다. 겸손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사역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 자신이 설교를 잘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했듯이, 복음 그 자체가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인정하듯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타락했습니다. 그것은 도덕적 타락이기 전에 말씀의 타락이고 강단의 쇠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신음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적지 않습니다. 때때로 저는 인터넷이나 팟캐스트로 말씀을 우리 교회 밖에 계신 분들이 들을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를 전파하는 것이거나 죠이선교교회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진리가 널리 들려져서 주의 백성들을 소성하게 하는 일이 되기를 구하면서 이 일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로 알고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왕에 하는 것을 더 널리, 더 효과적으로, 더 손쉽게 들을 수 있는 말씀이 되도록 충성스럽게 이 일을 감당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저만의 일이 아니라 교회에 맡기신 일이고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선언문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입니다. 확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그 말씀 아래 앉아야 하고, 열심히 충성스럽게 말씀을 배우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배불러야 하고 그 말씀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기쁨을 확산하는 일에도 충성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저는 죠이선교교회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존속할는지 알지 못합니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교회들이라고 하더라도 200년 이상 된 교회(건물이 아니라 백성)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 존재했던 모든 주님의 교회에게, 거기 속했던 백성들에게 결산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일주일 아니면 일년의 시간만을 더 하락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충성되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일을 하시겠습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장래라는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처럼, 우리도 ‘바로 가서’ 지금 주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저는 그 날 주님께서 죠이선교교회를 부르실 때 주님 앞에 서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영광스럽고 복된 칭찬을 듣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성공이 아니라 충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지막 날에 우리를 성공이 아니라 충성됨으로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지금 바로 가서 충성되게 주님을 섬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