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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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14 - (3) - 설립 8주년 감사예배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

시편 57: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10-05

말씀내용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 시 57:1~11


1. 절박한 상황 속에서 신자는 어떻게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 있을까?
사람은 낙심이 되고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자신에게 함몰되기 쉽습니다. 이 시편을 쓰고 있는 다윗의 상황은 사울을 피하여 굴에 숨어 있던 때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아둘람 굴인지, 혹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들어왔다가 다윗에 의해서 옷 베임을 당했던 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낙심되고 절박한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떤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어떤 찬송을 부르시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그 어느 때보다도 놀랍게 찬송하고 높이고 있습니다. 5절과 11절은 이 시편의 후렴구와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도대체 무엇이 다윗의 가슴에서 이런 찬송을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일까요? 또 그는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런 찬송과 고백을 하고 있는 다윗을 보면 그가 사울을 피하여 굴에 숨어 있는 사람이라는 상상을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왕으로서 세상을 평정하고 궁정에 앉아서 찬송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좋은 상황에 있을 때 비로소 이런 찬송을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는 마음이 일으켜 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편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면서도, 다윗이 자신에게 함몰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높이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시편 57편은 이런 점에서 신자의 믿음을 가장 놀랍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믿음은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고 말씀했습니다. 신자가 이 땅을 살면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시편보다 더 잘 보여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사가 경각 간에 있음에도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살만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 기도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죽고 사는 것, 자존심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 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실상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많이 경험되는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설립 8주년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며 살 수 있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가르치듯이,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느냐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행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자신 안에서 흘러 넘침을 경험함으로써 어디론가, 누구에게론가 그 기쁨을 흘려 보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산이고 참된 선교입니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이런 일들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끊임없이 우리를 자신에게 함몰되게 만들고 우리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로 몰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싸우는 싸움은 믿음의 싸움이고, 이 믿음의 싸움의 내용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즐거워하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본성을 믿음으로 죽이는 일을 행해야 하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성령님께서 심어놓으신 거룩한 본성을 살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저는 시편 중에서 시편 57편을 유난히 애송합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이미 설교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함몰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에 압도되듯이,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할 수 있는가 하는 우리의 질문에 빛을 던져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보여주시기를 바라고, 우리가 다윗과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이런 감사함이 넘치기를 바라고, 그 감사를 다시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열심으로 불붙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시편 57편을 오늘 예배를 위한 설교의 본문을 택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유를 기뻐하시고 복 주시기를 구합니다.
2. By faith not by sight (고후 5:7)
우리가 오늘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교회설립 8주년을 기념하고 경축하려면 다소 힘이 빠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복되신 말씀으로 양육하여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빚어주셨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믿는 자들에게 도전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양육하여 주신 8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는 평가고사를 치른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시험은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 세워집니다. 믿음은 불확실하고 오해투성이로 막연하게 그리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성경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지식 위에 근거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능히 우리 영혼을 구원하며, 우리의 영혼을 자라게 하는 믿음이고, 산을 옮기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3. 상황: 그리고 다윗의 믿음
늘 강조해온 것이지만, 기독교는 현실을 무시하는 비현실주의나, 현실을 외면하는 초현실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이 땅에서의 삶이라는 현실에 기초하여 우리의 믿음을 세워가는 종교입니다. 제가 종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일한 참된 종교라는 차원에서 사용한 말이지, 기독교가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시편의 표제에 서술되고 있는 다윗이 처한 현실의 상황이 하나의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현실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처한 현실은 언제 사울에게 붙잡혀 생명이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이미 불안과 염려로 불면증이나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것을 겪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는 그저 무조건 현실을 무시한 채, 5절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 상황 자체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이 상황을 끝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현실 상황을 외면하려고 애를 써도 결코 그는 자신의 현실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신앙적 노력은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 상황을 부인하려는 노력일 뿐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신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조금도 외면하거나 부인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그 현실을 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짜 현실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가슴벅차게 드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A. 현실 상황(4)과 다윗의 심정(6)
다윗의 현실 상황은 4절이 잘 보여줍니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말입니다. 그는 사자 혹은 사람을 삼켜버리는 불 같이 자기를 삼키려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를 죽이려고 쫓는 사울과 그 군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그런 일을 당할만한 잘못을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보인 것은 그 누구도 보일 수 없는 충성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사람이 느끼는 심정은 억울함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6절에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심정적으로는 억울했고, 생명이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것이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B.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1a)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세한탄을 하기 쉽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만 있다면 자기 억울한 사정을 말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것은 그 현실과 억울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거기서 쉬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말입니다. 2절은 그가 속삭이지 않고 부르짖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2). 그만큼 다윗의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자의 현실 속에서 기도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시편을 특별히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 역시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윗과 같이 쫓기고 숨어야 하는 삶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는 기도를 이렇게 재치 있게 표현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대신 염려하시게 하십시오.” 이 말은 믿음과 기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기도 자체가 우리를 곤란한 현실에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중요한데,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바로 눈 앞에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염려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내 염려를 맡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염려를 대신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염려를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장래에 속한 일은 주인이신 나의 하나님의 일이지 종인 내가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염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이 없는 열심으로 드리는 기도는 결코 현실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윗이 했던 일이고, 이것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C. 재앙들은 지나간다(1b).
다윗이 알았던 것이 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이 재앙은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1b).” 재앙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게 되면 지나갑니다. 재앙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 속의 순교자들은 재앙이 그들의 죽음의 순간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에 의해서 삼킴을 당하지 않은 것은 다윗처럼 그들도 이 재앙이 비록 죽음의 시간까지 있을지라도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는 이 믿음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슬픔과 고난과 재앙과 죽음은 다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신자의 영원한 운명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다윗은 마치 비가 지나갈 때까지 처마 밑에 쉬고 간다고 하는 것처럼,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숨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극심한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알아야 할 것은, 재앙은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D.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믿음의 견고한 기초다(2).
참된 믿음을 형성하는 지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 세워집니다. 다윗은 이 짧은 시편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드러냅니다. 이 지식이 그의 믿음의 견고한 기초이고, 이 시편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존하신 분임을 알고 고백합니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2).” ‘지존하신’이란 말은 ‘가장 높으신’ 혹은 ‘최고의 주권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가 하시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즉, 다윗은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쫓는 사울은 왕이요, 이스라엘의 주권자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 속에서 다윗은 사울 보다 높으신 분, 사울의 모든 권위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다윗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담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내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그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유 없는 고난을 주시지 않으시며, 모든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발로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진 자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거듭난 분들은,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십니까? 이런 지식이 아니면 믿음은 견고하게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따라,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실 것을 다윗은 알고 또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 세워지는 믿음은 견고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자기를 이 재앙과 환난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압니다. 그래서 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4. 반전: 믿음이 반전의 열쇠다(5,7).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토록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이 이제 여러분에게 조금 분명해졌습니까? 다윗의 믿음이 그것을 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 위에 서있는 믿음이고, 특별히 그것은 지식적인 앎을 넘어서 관계적인 앎이라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교회 다니는 사람 대다수는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머릿속 지식인지, 자신과 아버지이신 하나님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지고 보증된 언약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지식인지를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믿음은 관계적인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사울 왕보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이렇게 상황을 정리합니다.
5. 과정: 믿음의 싸움(6~8)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은 열 한절로 이루어진 짧은 시 형식의 기도지만, 실제로 다윗의 싸움도 그랬을 것이고 우리의 믿음의 싸움도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이 6절에서 다시 자기의 상황을 보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기도하다가도 순간 순간 마음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게 될 때 흔들리고 억울하고 답답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믿음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7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여기서 다윗은 ‘확정되었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비록 원수들이 나를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파지만 결국 그들이 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윗의 마음은 안전함을 얻고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8절에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광아’라고 부르는 것은 다윗이 자기 존재를 가리켜 표현한 것인데, 그가 이렇게 자신을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영광은 창조주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서 반응할 때 드러납니다. 사람의 영광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여기서 ‘내 영광아’라고 부를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그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너 다윗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이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인 자신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새벽을 깨워 나는 하나님을 찬송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저절로 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천성적 게으름과 싸워야 하는 일이고, 우리의 몸을 복종시켜야 하는 매일 매일의 싸움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다윗은 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이 그냥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매일 새벽을 깨우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6. 열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9~11)
이제 우리는 이 시편의 절정인 9~11절에 도착했습니다. 한 목소리로 읽어보지요.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진정한 찬양은 사실 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C.S.루이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기가 높이 평가하는 대상을 찬양(칭찬)할 때 자연스럽게 타인에게도 그 찬양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만민 중에서’ 그리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후일 왕위에 올랐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레위인들로 성가대를 조직한 것은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 심정에 가두어둘 수 없는 것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는 하나님의 속성인 인자와 진리가 얼마나 큰지 하늘에 미치고 궁창에 이른다고 찬송합니다(10).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그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11,5).
7. 교훈과 적용
사랑하는 죠이선교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저와 함께 이 교회의 설립 8주년을 기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당신의 인자와 진리를 알게 하셨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영광을 높이고 싶은 열정을 그 심령에 불과 같이 부어주셨던 것과 같이, 오늘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저는 구합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들었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지존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이 그의 믿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믿음의 싸움으로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습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내 영광아 깨어라”라고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에 반응하도록 우리 자신을 깨워야 합니다. 반면 이 믿음의 싸움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죽이는 싸움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며,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 기쁨을 확산하는 선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이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이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1750년 23년간 몸 담아 섬겼던 교회에서 해임결의를 받은 후 스코틀란드의 길레스피 목사에게 보낸 서신에 쓴 내용입니다: “이 어려움이 제가 더 거룩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지배하셔서 당신의 영광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장차 저를 다시 유용하게 사용하시고 저와 제 가족의 필요를 채우시고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넓은 세상에 던져지는 우리들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이 거룩해지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바랬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윗이 보여준 바로 그 믿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주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범사에 그렇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의 영광을 보게 할 때, 우리 심령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타오를 연료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불태울 연료를 신자의 마음에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죠이선교교회를 통해서,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높이고 찬양하는 복된 은혜를 여러분의 생애에 충만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