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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14 - (2) - 설립 8주년 감사예배 - 말씀은 남는다

이사야 40:6-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9-28

말씀내용
<말씀은 남는다> 사 40:6~8


1.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는 말이 있습니다. 후대에 남을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일면 지혜로운 말이지만, 자기 이름에 집착하는 인간 본성을 잘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적으로 이 말은 옳지도 바람직한 말도 아닙니다. 존 칼빈은 죽을 때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자기가 죽으면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교회사에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 하나였던 조지 휫필드도 자신의 이름은 잊혀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드러나게 하라고 유언했습니다. 이는 모두 세례 요한이 말한 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태도를 잘 드러낸 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후대에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에 집착하는 인간 본성은 신앙적으로 위장한 다양한 모양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는 것은 사람의 이름도, 업적도, 영향력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일관되게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인간이 아무리 화려한 인생을 살아도 그것은 채 100년도 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운이 불면 시들어버리는 들꽃처럼 사라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역사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잊혀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여 반드시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당장에 유용하지 않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어리석음(사 6:9~10)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을 전한 시대 상황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다가올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주전 8세기 말엽에서 7세기로 접어드는 시기인데, 그가 전한 심판의 메시지는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야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할 때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것이 경고가 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주전 722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 성취되려면 적어도 10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읽은 본문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백성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말씀들이 선지자 당시의 백성들의 가슴에 어떻게 전달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물론 그 말씀은 백성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삶과 사역의 결과를 보기 전에, 그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서 그것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 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는 실패가 보장된 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그들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경고하신 것이지만, 그 메시지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후대의 자식들의 세대에나 이루어질지 모를 일들로 들린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유다 백성들의 실패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심판 때나 자기들이 죽을 때에나 필요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그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당장의 유용함을 찾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당장의 유용함, 당면한 문제의 해결, 당장의 위로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부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당장의 유용함을 구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조심할 일입니다. 당장의 유용함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들, 세상에서 멋진 삶을 추구하고 살아가던 8세기 말 유다 사람들에게 선지자는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6b~7).” 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당장의 유용함을 주는 아름다운 것들은 다 시들어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말입니다.

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영원의 관점
사람에게는 당대에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시간의 폭은 자기 인생의 시간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이라는 관점을 끊임없이 제시합니다. 범죄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부터 시작해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살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자기 인생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아무리 좋아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금 훌륭한 사람들은 사후에 이름을 남길 생각에 좋은 것을 포기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영원히 서게 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고, 그 말씀으로 힘을 얻고, 그 말씀의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날에 주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을 것을 바라보고 살기에 당대의 인기를 추구하거나 영합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이것이 가장 가까운 미래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영원히 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은 적어도 200년이 지나야 후손들에게 의미가 있을 말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경건한 백성에게는 위로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그 말씀이 당장 우리 삶과 무관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에게 그 말씀은 언제나 현재의 삶을 위한 말씀이고, 현재를 위한 위로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말씀처럼 말입니다(신 8:3). 어떤 방식으로 그럴 수 있을까요? 이사야 자신을 비롯해서 당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궁극적 구원의 역사를 소망하며 현재적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그림을 주심으로써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을 더욱 담대한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비록 감옥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지만,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관점을 가지고 에베소서를 쓰는 것입니다. 그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셨을 뿐 아니라(엡 1:4)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실 그 영광의 날을 바라봅니다(엡 1:22). 이 관점은 바울 사도로 하여금 자기의 명예나 업적이나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하고 사는 일에 자신을 던지게 했습니다. 영원의 관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가치에 매이지 않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4. 죠이선교교회가 남길 유산
우리는 먼저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길을 다 마치고 주께로 가야 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남기실 생각이십니까? 많은 물질을 남기시겠습니까?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업적입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을 기억할 때,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그 말씀을 지켜 살기 위해 씨름했으며 그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을 남긴 것이 아닐까요? 그 유산은 그 어떤 유산보다 힘있게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런 개인적 차원의 적용을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교회, 특별히 죠이선교교회라는 우리 교회에 적용해보려고 합니다. 교회개척을 준비하던 8년 전, 저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되는 교회를 주시기를 소망하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너무 많은 주님의 교회가 성장의 압력 아래서 소위 ‘되고 먹히는’ 프로그램들로 피폐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 않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목사와 교회의 지도자들의 불신앙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강단은 당장의 유용함을 구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영합하기 위해서 적당히 물을 섞은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하나의 대세가 되어가는 둣 보였습니다. 교회는 세상 경영방식과 조직이론, 마켓팅 기법과 세상 리더십으로 이끌리는 세상 어떤 조직과도 구별되지 않는 조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도행전에 보는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하고도 신비한 공동체였습니다. 그것은 어떤 탁월한 리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공동체였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리더는 전직 갈릴리의 어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고, 온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말씀 안에서 교제하고 기도했습니다(행 2:42). 진리의 성령님께서는 그 말씀 가운데서 역사하사 은혜를 베푸시는 방식으로 신비롭게 교회를 세워가셨습니다. 목회를 시작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교회를 개척할 즈음에 이런 교회가 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죠이선교교회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목사의 능력이나 다른 인간적 요소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8년 동안 저의 기도였습니다.

A.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신앙적 착각의 위험: ‘교회가 남는다’
여기서 저는 잠깐 죄송하지만 제 경험을 나눠야겠다고 느낍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빠졌던 한 가지 착각은 탐욕과 맞물려 있는 죄성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순전한 복음의 진리를 전하려고 애를 썼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크게 세워가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이민교회를 포함해서 한국교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되는 이런 교회가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말씀 드렸고 사람들에게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방진 태도였고 불신앙이었으며 신앙으로 포장된 탐욕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착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목사가 죽을 때 교회를 남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적인 교회 말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험뿐 아니라, 역사와 우리 당대의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제 생각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훌륭한 목회자들이 남긴 것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로 칭송을 받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30여년 목회하고 은퇴한 후 교회는 그전과 같이 융성함을 경험하는 교회로 남지 못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 사랑의교회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널리 존경 받는 옥한흠 목사님께서 개척하여 평생 목회하신 교회는 목사님의 은퇴 후, 그분이 원한 교회로 남지 못했습니다. 역사도 이것을 말해줍니다. 어거스틴이 주교로 있었던 히포의 교회는 그의 죽음 직후에 일어난 반달족의 공격으로 다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 교회들은 사도들의 손길이 닿았던 교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사후에 오랜 세월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교회를 남긴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탐심의 발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에 편승하려는 탐심이고,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가 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흥함에 편승하려는 마음이며,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는 인간 본성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으로 포장된 탐심입니다. 오늘날 이런 탐심은 다양한 모습으로 목사들만이 아니라 많은 교인들의 열심을 신앙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성공이 가져오는 타락’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이 은혜입니다.

B. 성경적 진실: ‘말씀이 남는다’
만일 사도나 목사들이 남겨야 할 유산이 교회였다면, 그들 중 아무도 주님 앞에서 칭찬이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죠이선교교회가 남길 수 있는 유산이라고 성경적으로 합당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듯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교회의 유산입니다. 죠이선교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죠이선교교회인 우리 자신뿐 아니라 이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우연히 로이드존스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참된 회심을 경험했거나 복음의 진리를 놀랍게 경험한 분들을 개인적으로 압니다. 저도 물론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영국에서 소천하신 바로 그 즈음, 저는 대학 1학년이었고 그분의 설교집을 처음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생전에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지도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그가 전한 설교를 책으로 혹은 녹음된 설교로 접하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거나 회심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세기의 탁월한 성경강해자 아더 핑크입니다. 그는 30대까지만 해도 많은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목회를 했지만, 40세 이후로 점점 그가 말씀을 전할 강단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혹시 말씀을 전할 강단이 주어질까 하는 심정으로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가 십여 차례 영국 안에서도 이주를 시도했지만 끝내 그에게 강단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인 루이스 섬으로 들어가 1952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전부터 해오던 대로 <성경연구>라는 잡지에 성경강해를 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그 외딴 섬에서 외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후에 그가 남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목회자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선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 많은 예가 있지만 이것으로 말씀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적 진실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유산으로 남긴다는 것입니다.

5. 교회의 성공과 실패의 잣대(사 6:9~10; 마 13:14~15; 요 12:39~40; 행 28:25~27; 사 55:11; 살후 3:1~2; 고후 2:16~17)
그렇다면 교회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성경적 잣대가 여러분에게 선명해졌습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이 단지 제 사역에 대한 변호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저와 함께 죠이선교교회를 지금까지 이루고 계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격려라고 믿습니다. 작은 교회, 크게 성장하지 못한 교회, 알려지지 않은 교회라는 사실이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8년 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신실하게 전하도록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말들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왜 위로를 주지 않는가? 왜 긍정이 아닌 부정만 하는가? 왜 나를 지적하는 표적설교를 하는가? 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지 않고 가르는가?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나간 많은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런 전형적인 반응들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위로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충만하게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설교는 다 성령님의 표적설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만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주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선지자의 말씀이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 완악하게 만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다시 인용되었습니다(마 13:14~15; 요 12:39~40).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반응하려면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주님의 말씀에 그 많은 유대인들이 반응하지 않았습니까? 기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성령님의 중생케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주권적 역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갈라지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이 말씀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행 28:25~27).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그 메시지로 인해 심령이 더욱 냉담하고 완악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적이 없다면 합당한 반응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기질적 요소 가령, 주지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혹은 비판적인 어떤 기질적 요소들로 인해서 복음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이런 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반응 자체로만 보자면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시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성경이 바로 이사야서라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가 전한 말씀은 그의 사후 800년 후에도 생생하게 들려졌고 그 말씀 그대로 성취되어 메시아가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55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여기 우리가 다음 주일 교회설립 8주년을 맞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1~2).” 이 말씀이 선명하게 가르쳐주듯이,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된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복음에 반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8년 전에 죠이선교교회를 세워주셨고, 이 교회를 통해서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은 영광스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오늘 교회 홈페이지 방명록에 올라온 글들을 몇 개만이라도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신 매우 적은 증거들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믿음을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면, 그는 복음에 물을 탔을 것이고 사람의 지혜에 의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았기에 바울 사도는 복음에 물을 타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고후 2:16~17). 그러므로 교회의 성패를 가늠하는 성경적 잣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고 신실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남아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교회들을 세계 도처에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6. 적용과 교훈(롬 1:16; 약 1:18; 벧전 1:23; 행 20:32):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많은 강단에서 순전한 복음이 전해지지 않음으로 신음하는 많은 참된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복음의 진리로 충만해지고 그 복음의 기쁨이 흘러 넘쳐 세계 복음화를 성취하는 꿈을 꿉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선언문,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세워져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고(롬 1:16), 성령님께서 그 말씀으로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고(약 1:18; 벧전 1:23) 성도를 자라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헤어지면서 그 교회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 말씀이 그들을 능히 든든히 세우시고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 중에 기업을 얻게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행 20:32). 저는 지난 8년 동안 주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다른 길,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척교회의 90%는 실패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현실을 반영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고 있는 교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남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