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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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14 - (1) - 설립 8주년 감사예배 - 우리를 통해 기쁨을 확산하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24:44-48, 고린도후서 12:9-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9-21

말씀내용
<우리를 통해 기쁨을 확산하시는 하나님> 눅 24:44~48; 고후 12:9~10


1.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이다.
8년 전 교회를 개척할 즈음, 교회의 사명선언문을 놓고 고민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문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죠이선교교회의 사명선언문,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이라는 문장입니다. 기쁨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중요합니다. 참된 믿음의 열매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을 소유한 자들만이 그것을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리지도 못하는 기쁨을 누구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선언문이 말하는 기쁨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영원한 복인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 함께 누리고 사는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이 누리는 기쁨을 온 세상에 흘려 보내는 것, 즉 확산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뿌리 없는 열매라는 기형적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낍니다.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윤리는 복음의 진리에서 흘러나오는 성화가 아니라, 다분히 율법주의적이고 매우 피상적인 기독교 하부문화의 당위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고, 전도는 복음의 진리를 선명하게 붙잡고 확신하는 기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교회로 데려오는 하나의 방법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선교도 복음의 기쁨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이고 과업 지향적인 개교회적인 사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뿌리 없는 열매라는 기이한 현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요구가 아니라 뿌리의 문제로 돌아가야 하고 이 일에 우리 교회가 서야 할 자리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이라는 사명선언문에 담긴 원칙입니다. 10월 첫 주일, 교회 설립 8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약 다섯 번에 걸쳐 우리 교회와 관련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2. 전제: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존은 진짜 기쁨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여기에는 한 가지 성경이 가르치는 전제가 있습니다. 온 세상이 아담의 범죄 이래로 진짜 기쁨을 상실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죄는 이 모든 기쁨을 깨뜨려버렸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자기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쁨을 얻고 싶어서 추구하는 모든 대상은 결코 완전한 만족을 인간에게 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옮겨가면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만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존이고 그 추구하는 대상들이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잃어버린 기쁨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죄인에게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그 복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에게 잃어버린 기쁨을 영원토록 회복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진짜 기쁨,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오직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회복하여 그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이 구원의 은혜와 즐거움을 만끽하는 무리들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라는 말에는 교회의 정의와 본질적 사명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이 기쁨을 확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인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경험하고 누려야 하고, 그리고 그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게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전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우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3.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눅 2:10~11; 24:52~53)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소식은 천사에 의해서 베들레헴 지역의 목자들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전해졌습니다. 홀연히 천사가 그들 곁에 서고 그 한 밤중에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이 무서워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천사가 말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죄인들을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처음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와 비슷한 결말을 보게 됩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나신 구주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고 이제 승천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셨을 때 제자들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2~53).” 제자들은 주님과 육신으로는 헤어짐을 경험했지만,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것은 천사에 의해서 목자들에게 전해졌던 대로, 제자들에게 복음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복음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받았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렸고, 그 복음이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며, 주님의 분부대로,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마 28:18~20). 그 이야기가 바로 누가복음의 2부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이야기입니다.
4. 복음의 증인(눅 24:44~48)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본문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일과 말씀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시 가르치셨습니다(44). 주님은 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45). 이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안에서 성취되었고 복음 전파와 회심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일어나게 됨으로써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6~47). 그리고 나서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48).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사 언제나 함께 있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정당한 그리스도의 증인의 자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복음 사건의 증인들이고, 곧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며,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 사명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먼저 있고 온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신약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를 낳은 것입니다. 복음이 낳은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그릇이고 증인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에 속한 지체들 개개인이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공동체적 차원, 즉 그리스도의 몸이 이 세상에 존재할 때 그 존재는 복음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매주일 선포되는 복음을 통해서 교회는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지난 2000년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이 사명을 면면히 보여주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또는 세상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그 강단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부르심을 감당해 온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선포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사 회개하고 믿게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먼저 주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은 이런 방식으로 널리 확산되어 왔습니다. 지난 이천 년의 교회 역사가 그렇다면 지난 8년의 죠이선교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8년 동안 한 번도 예외도 없이 교회의 강단에서는 매주일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알게 하셨고 누리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물론 복음의 말씀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단지 그 자리에 모여있던 우리들에게만 들려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이나 팟캐스트와 같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의 말씀이 온 세상에 들려지게 하셨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이 강단에서 선포된 복음의 진리가 세계 여러 지역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짐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회복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된 것을 인해서 저는 하나님 앞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이것은 여전히 한국 말을 아는 한국 사람들에게 한정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된 복음의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게 해주셨고 그 기쁨을 확산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통해서 그 기쁨은 계속 흘러나가고 확산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이것이 언제나 교회로서의 우리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복음의 삶(고후 12:9~10)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이 기쁨의 실재에 대한 오해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실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삶은 정말 기쁘기만 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우리를 따라옵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확산하는 것은 좋은데, 정말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현실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제 맥체인 캘린더를 따라 읽은 에스겔 24장에는 선지자 에스겔의 개인적 슬픈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아가시겠다고 하시면서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15). 그 저녁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젊은 아내를 갑자기 데려가셨습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선지자의 삶에는 이런 고통이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바울 사도는 어떻습니까? 그의 삶에 환난이 그치지 않았고(1:6~9; 4:8~11; 7:5; 11:30; 12:5), 육체적 시련도 많았습니다(4:7,16; 5:1; 11:24~27; 6:4~5, 8~10). 몸은 맞아서 약해졌고 명성은 갈가리 찢기었으며 메시지는 거부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정확히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육체의 가시 때문에 괴로움을 안고 살아야 했기에 그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손수건을 병든 사람에게 놓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쫓겨나는 역사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행 19:12). 그런데 정작 자신의 괴로움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누리고 물질적 부요함을 가진다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 옳고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실감하는 것일까요? 심각한 질병으로 말미암아 건강을 잃었고, 남들이 말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도 실패했으며, 물질과 소유의 면에서도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이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삶이 아닐까요? 정작 고린도후서 12장이 가르치는 것은 복음은 너무나 위대하고 위대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살아가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모든 가치를 뒤집어놓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 세상의 잣대로 성공하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행복할 것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축복하셨다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로 교회가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세상의 안목 앞에는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 하나님의 나라는 숨겨진 씨앗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겨자씨 한 알처럼 매우 작은 형태로 주어집니다. 한 주부가 밀가루 반죽 속에 넣은 누룩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은 형태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얻습니다. 복음의 가치는 이런 것입니다. 번영 신학이나 몇 박자 복음이니 하는 것은 이 복음의 무한한 가치를 세상 것에 견주려는 너무나 천박한 시도들인 것입니다. 사도는 비록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가 주는 괴로움이 여전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족하고 족하고 또 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약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자리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세상적 이치로 우리가 성공하고 잘 되고 편안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것,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물리적, 심리적 환경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빌 4:4). 그는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여행 때에도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행 16:25). 그들은 찬송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그 순간에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말로만 복음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도록 부름 받은 삶입니다. 그 삶은 세상적 잣대로 누리는 것과는 전혀 다를 뿐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의 모든 상황이 올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함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저는 교회 설립 8년을 앞두고 지난 8년 우리 교회와 저 자신의 삶을 때때로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교회, 성공한 교회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교회가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결별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축복하셔서 성장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저는 많이 경험해왔습니다. 이런 상황은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힘든 것이고 슬프고 아픈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제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싸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함으로, 우리의 현실에 부인할 수 없는 괴로움과 불편함, 슬픔과 외로움과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그것을 확산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6.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말씀을 맺기 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지침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복음을 붙들고 지금까지 8년 동안 걸어 온 여정의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신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말씀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의 의미라고 이해합니다. 저는 믿음이 약해서 넘어진 적이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서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끈질긴 지구력이나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지난 8년을 그것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주께서 이 사랑하는 교회의 강단을 허락하사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8년의 시간 동안 이 복음의 진리를 들을 수 있게 하사, 그 빛을 우리 어두운 인생에 비추어주셨고, 그 말씀으로 우리를 빚어주셨으며 우리의 여정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한 기쁨을 누리는 삶으로 우리를 매 주일마다 불러주셨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이 모든 싸움 속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넘치도록 족한 은혜는 이 강단을 통해서 선포된 복음의 진리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소성케 하셨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확산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하나님께서는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 모든 일로 인하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함과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히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