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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12 - 설립 6주년 감사예배 - 교회의 영광

에베소서 3:1-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2-10-03

말씀내용
<교회의 영광> 엡 3:1~21



6년 전 10월 첫 주일, 죠이선교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늘 처음 뭔가를 시작할 때 그렇듯이,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으셨던 계획입니다. 저는 지난 6년 동안 성경을 통하여 그것을 애써 살피면서 또 그것을 여러분과 가능한 많이 나누려고 해왔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교회 설립 6년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1. 섭리와 사명에 대한 확신(1~2,8,13)
사도는 지금 이 서신을 로마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맡겨주신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직분을 감당하다가 로마까지 오게 되었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1). 하지만 사도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이 될 때에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보다 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확신하는 일이 필요한 때는 없습니다. 사도가 지금 감옥 안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섭리에 대한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이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서 낙심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13). 도리어 이 환난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을 신실하게 행하고 있는 증거이니 너희가 영광으로 여겨야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저와 함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도는 감옥에 갇힌 일뿐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직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은혜의 경륜’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직분에 대한 확신을 표명합니다(2). 하나님의 은혜의 경영 속에서 그에게 맡겨주신 직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작게 여겼습니다. 8절에서 그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은 직분의 영광에 대해서는 바르게 알았고 확신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직분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경영의 결과일 뿐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8).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은 측량할 수 없기에, 인간 이성에 의해서 완전하게 파악될 수 없고, 그러므로 말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영광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자기 나팔을 불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곧 영광스러운 비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자신이 맡은 직분의 영광을 알지 못한다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6년 동안 제게 이 직분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천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알게 해주셨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사도가 아니지만, 사도가 하던 바로 그 일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계속해서 전해야 하는 이 일에 부름을 받은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영광의 직분을 지난 6년 동안 감당할 수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저는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저의 끈기나 고집이나 제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명에 대한 확신은 처음보다 더 확고해졌고 이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2. 복음에 대한 확신(3~11)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로 비밀을 알게 하셨다고 말합니다(3). 여기서 이 비밀은 무슨 수수께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기만 하면 명백한 것인데 가려져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보여지지 않고 알 수 없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베일이 벗겨지자 보이는 것이지요. 사도는 이 비밀이 과거 구약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제 사도들과 신약의 선지자들에게 알려졌다고 말합니다(5). 이것은 갑작스럽게 하나님께 고안해 내신 계획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입니다(9).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은혜의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 비밀은 6절에 쓴대로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뭐가 대단한 비밀이냐고 여러분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2장에서 사실 이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고, 이 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무 차별 없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러 교회로 불러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계시를 풍성하게 드러내셨는데, 그 결과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방인, 주인/종, 남자/여자의 구분이 사라져버리고 똑같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고,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10절에서 놀라운 표현을 봅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하늘에 있는 통치자, 권세자들)은 천사와 마귀 등 모든 영적 존재들을 가리켜 쓴 표현입니다. 이런 존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되는가? 교회를 통해서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복음의 비밀이 그대로 드러나는 교회의 존재 자체를 통해서 영적 존재들이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11).

바울 사도는 지금 좁디 좁은 감옥 안에 앉아서 이 편지를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야와 안목이 어떠합니까? 그의 안목은 그야말로 영원에서 영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비전 때문입니다. 그는 이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관점에서 지금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복음 전파를 통해서 교회가 많은 지역에 세워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내에서 교회의 존재는 얼마나 미미했겠습니까? 또 사도는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형편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의 관점에서, 교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눈을 뜰 것을 요구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교회의 시작과 교회의 영광스러운 미래, 궁극적인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말이지요.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고통을 겪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영원의 안목에서 우리의 인생과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이성으로 교회를 본다면 교회처럼 우스꽝스러운 곳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지난 20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받아 왔습니다. 이런 조롱과 비웃음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목이 이 은혜의 경륜 속에서 그리고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안목에서 그리고 영적인 이해를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고통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교회는 세상의 원리로 운영되기 시작할 것이고 이것이 곧 교회의 타락인 것입니다. 사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아니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경을 통해서 교회에 대한 영원하고 영적이며 영광스러운 안목을 가질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3. 교회를 위한 사도의 기도(14~21)
사도는 교회에 대한 이런 복되고 영광스러운 진리를 말하다가 은혜에 압도되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교회에 대한 영적인 이해를 얻게 된다면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는 유대인인 자신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나아가고 싶었습니다(12).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또 교회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배우게 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영적 교만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는 “만약 여러분이 교리에 대한 지식을 통해 훌륭한 기도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다시 검토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의 교리들을 배우게 되면 그 결과는 기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서신을 쓰다 말고 주체할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4~21절입니다. 그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이야말로 오로지 이 세상에서 교회라 이름한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일 먼저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위해서 간구합니다(16). 하나님의 능력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구하는데,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수식이 붙어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성령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 시대의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겉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 속사람과 겉사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도는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겉사람은 우리가 입고 살아가는 육신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육체도 있고 정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이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을 지배하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비극은 이 속사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속사람이 없다면 그는 그저 서서히 죽어가는 삶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삶은 전적으로 주변 환경이나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 그 인생을 붙잡아줄 수 있는 속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안에 있는 속사람은 세월을 거듭하고 겉사람이 쇠하여가는 동안에도, 점점 새로와져 가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진다면, 그는 모든 환경과 여건이 불리하고 자신의 믿음을 거스리며 벌어지는 모든 일이 비록 고통스러울지언정 그 속에서도 평안과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죽음의 날이 가까워올수록 그 속사람은 점점 더 강건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점점 노쇠해가지만, 그의 자태는 얼마나 빛나고 영화로움을 드러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이런 속사람이 에베소 교인들 안에서 강건하게 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의 주요한 관심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행하시고자 하시는 일입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렇게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채우게 된다면 또한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두번째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마음에 계시기를 구합니다. 그 조건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기도하는 것은 에베소 교인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계시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예수 믿는 자들 가운데 주님은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이 간구에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고 누리기를 원하는 사도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면 누구든지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린다는 것이 이렇게 놀랍고 복된 것인데 내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오래도록 기독교의 초보만을 답습하고 살아왔던고?” 여러분은 이런 것을 경험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게 하실 때까지 기도를 쉬지 마십시오. 그렇게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고 당신 자신을 놀랍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세번째로 사도가 기도하는 것은 교회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이것은 성도들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그는 에베소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그 풍성하고 무한한 사랑의 모든 면면을 알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지식의 능력이나 지식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한 번 알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경험적으로 알게 될 때, 내가 그리스도의 그 무한하고 풍성하신 사랑을 받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사랑 가운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그 사랑에 터가 굳어지게 되고 교회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 둘씩 더해지면서 점점 더 사랑 안에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결심하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랑할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 자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기껏해야 자기 배우자, 자기 자식, 자기 부모님을 사랑하는 정도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런 진짜 사랑, 참 사랑이 교회 안에서 풍성하게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알기를 힘씁시다. 거기에 이 공동체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수록, 이런 사람들이 점점 교회 안에 많아질수록, 점점 더 교회는 사랑 안에서 교회답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4. 교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
궁극적으로 사도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19). 이 말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무한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 완전하심, 조금의 부족함도 없으신 하나님의 그 충만이 우리에게 경험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과연 우리는 상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엡 4:12).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교회의 비밀과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이 실현되어가는 영역입니다. 하늘과 지상에서 하나님의 다양하신 지혜를 선포할 특권을 받은 것이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실존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21절에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쓴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구분될 수 없는 유기체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아십니까? 놀랍고 영광스러운 신비가 아닙니까?

사도는 20절에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지금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지만, 지금 이 기도하는 것이나 자기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에 넘치도록 무한한 지혜로 행하실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는 압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영원토록 돌려지기를 기원합니다.

5. 영광스러운 교회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경험으로 보는 교회는 그다지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특별히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의 결실이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나타나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천사들 같은 존재들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이 교회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고 알게 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게 될 때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교회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기준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이런 교회에 대한 영광스러운 가르침을 성경에서 얻지 못하고 우리의 경험이나 이성적 판단을 의존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교회는 이 세상의 한 조직에 불과하고 여러분이 몸 담고 있는 많은 조직 가운데 하나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의 기도와 같이, 우리 모두가 주께서 6년 전에 세워주신 죠이선교교회를 통하여 교회의 영광을 보게 해주시고, 그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며 교회의 영광을 이 어두운 세상 앞에 비추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