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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10 - 설립 4주년 감사예배 - 부르심을 기억하십시오

빌립보서 2:12-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0-10

말씀내용
<부르심을 기억하십시오> 빌 2:12~18



죠이선교교회가 설립된지 4년이 지나 우리는 네번째 돌을 맞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주님께서 왜 죠이선교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의 한 부분을 상고하면서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죠이선교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이 과거 빌립보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인들을 부르셨던 그 부르심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지난 2000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많은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로 자기 백성을 부르신 그 부르심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조금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도 주님의 교회라면 결코 이 점에서 특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오늘 우리는 바로 그 부르심, 지난 2000년 동안 한번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다시 한 번 듣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주도권: 목회자는 목회자다(12~13).
바울 사도는 지금 로마의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바울 사도는 투옥에서 풀려나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다는 것도 감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는 많이 늙었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회상해볼 때, 그의 마음 속에 빌립보 교회는 조금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는 교회였습니다. 가난하기는 했지만, 바울 사도의 사역을 계속해서 후원해주었고 특별한 애정을 표시했던 교회였습니다. 서신의 곳곳에 사도를 향한 빌립보 교회의 사랑과 그들을 향한 사도의 애정 어린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도는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이라도 가서 그들과 함께 있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허락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 그들은 사도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었고 사도가 가르친 말씀에 충성된 순종을 보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지금 자신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지만, 오히려 더욱 더 힘써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을 이룰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자기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도록 부르신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복음을 설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이 결코 자신의 있고 없음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존재가 그렇다면, 목회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때로는 너무나 영향력이 커져서 마치 그 목회자가 없으면 신앙과 교회가 다 무너질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여기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목회자는 목회자일 뿐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언젠가는 주의 부르심을 받거나 혹은 은퇴나 다른 특별한 이유로 목회자가 자신이 섬기는 양떼들을 떠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그것은 결코 교회나 성도들의 믿음을 좌우하는 요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일 뿐입니다. 교회를 붙드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는 13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우리 속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야겠다, 나의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하셔서 우리가 그 소원대로 힘써 살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삶을 주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목회자는 목회자일 뿐이라고 사도는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목회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섬기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여러분의 신앙에 절대적인 그리고 선한 영향을 미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목회자로 저를 부르셨고 여러분을 저에게 맡겨주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제가 이런 소원을 갖는 것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저를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자라나고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저에게 의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의 신앙을 주도하시는 분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 저와 관계하여 혹은 관계없이, 여러분의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최선의 경주를 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부르심1. 계속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십시오(12하).
믿음의 경주를 최선을 다해서 하라고 사도가 말할 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는 것은 복종,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지 마십시오. 한 번, 두 번 그 말씀을 흘려버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사도는 많은 말을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단 한 가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줄 단 한 가지의 중요한 권면을 이렇게 주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인간들에게 구원의 주도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부연한 말씀을 우리가 본 것처럼,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속에 소원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A. 구원은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받을 것이다.
구원을 칭의와 성화와 영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칭의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미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1:6).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향하여 홀로 행하신 일입니다. 그 칭의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제 성화라는 차원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복종하여 구원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성화도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게 되지만, 그 은혜의 힘이 우리를 움직임으로 우리 자신도 이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결국에는 주님의 재림 때 부활로써 우리가 영화로운 몸을 입는 것으로 완성될텐데, 그것을 영화라고 합니다.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마치실 것입니다(1:6).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차 받을 것이다(완성될 것이다).

B.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냥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라고 했습니다. 이 두렵고 떨림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삶의 가장 근본적인 태도를 설명하기 적합한 단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알았기에 일어나는 경외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면 그가 가지게 되는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느낌은 두렵고 떨림일 것입니다. 저는 이 태도야말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조차도 두렵고 떨림이 없고 그냥 농담처럼 혹은 천박하게 말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고 만나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하는 모든 말 뿐 아니라 생각하고 마음먹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일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두렵고 떨림이라는 태도에 대해서 낯설기만 하고 생소하다고 느끼신다면 저는 여러분이 아직도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C. 그렇게 구원을 이루어야 할 이유
사도가 이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사도가 죽음에 임박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말이 왜 이 말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빌립보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들을 교회에 부르셨을 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사도에게 있어서 이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자들로 서지 못한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수고는 두번째 문제이고, 그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고 누리고 살았다고 한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할 수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사도는 구원을 이루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들을 교회로 부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자는 교회에 다니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은 절대로 구원이 취소되는 법이 없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진력하지 않는다면 놀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징계를 받게 되더라도 놀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만을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진력하시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죠이선교교회를 세우시고 여러분은 이 자리에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의 목회자로 세움을 입은 이유도 오직 이것 뿐입니다.

3. 권면: ‘원망과 시비 없이’(14)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중요한 부르심을 언급하고 나서, 한 가지 권면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여기에 원망과 시비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A. 원망과 시비는 불신의 열매다. 광야교회를 기억하라.
여러분, 절대로 잘못 이해하지 마십시오. 원망과 시비는 구원과 무관한, 지엽적이거나 주변적인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사도는 지금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원망과 시비는 구원과 관련된 문제요,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화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 피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망과 시비는 불신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불평하는 태도와 행동이고, 시비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태도와 행동입니다. 이것들이 왜 불신의 열매인지 아십니까? 광야교회를 기억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보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은 언제나 원망하는 말과 모세에게 따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는 지금 그들을 생각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급하심을 믿지 않을 때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나서 따지고 들며 논쟁을 해서 자신의 불평과 원망이 합당하며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많은 사람은 이것이 신앙과 무관한 하나의 견해와 입장의 차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순수하게 중립적이고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불신의 열매라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원망과 시비처럼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광야교회의 교훈을 빌어,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원망과 시비를 조심하십시오. 결코 그런 류의 태도와 말이 여러분의 삶에서 흘러나오지 않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며, 나아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허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모든 일’이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는 여러분의 구원을 흔들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의 신앙을 흔들고 결국은 교회를 흔들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성화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승진하고 돈을 많이 벌고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성화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 그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이라는 근본적인 관점을 놓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C.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원망과 시비를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12).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기 위해서 사도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으심의 자리입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앞, 1~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에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시면서 한 마디의 불평과 원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시비도 없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권면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되,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 있는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4. 부르심2. 흠없이 순전하게 행하여 생명의 말씀을 밝히십시오(15~16).
우리 구원을 이루어 살아가야 한다는 첫번째 부르심에 이어 사도는 흠없이 순전하게 이 거스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빛과 같이 빛나는 존재로 생명의 말씀을 밝히며 살라는 두번째 부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윤리는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도구다.
그리스도인은 흠없게 그리고 순전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흠없다는 말은 비난받지 않는다는 말이고, 순전하다는 말은 남을 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이, 감추어진 마음이 없이 행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이 필연적으로 이런 삶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처럼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말씀을 필요로 하는 때가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흠없게 순전하게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다 적당히 거짓말하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흠없게 순전하게 삽니까라고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지금 이것이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해서 제가 묻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셨다면 이제는 흠없고 순전하게 살아가셔야 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도 적당히 살아가겠다는 태도는 “나의 구원을 이룰 생각이 나는 없습니다” 또는 “내게는 돈이 구원보다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깨끗한 삶이 왜 중요하다고 말합니까? 우리는 말로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16절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흠없고 순전한 삶에 직결되는 것이기에 사도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B.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할 때 사도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 각자가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책임을 가진 존재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혹은 목사가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모든 신자의 책임입니다. 세상이 교회로 오지 않는다면,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세기 빌립보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또한 21세기에 죠이선교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존재와 삶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말로써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해서는 복음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민하고 갈등하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전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가운데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이 어찌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진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가능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먼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고, 이어서 흠없고 순전하게 살아 생명의 말씀을 밝힐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사도는 자신의 수고가 허사가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 앞에 설 때 자랑할 것이 있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저의 생각이 어떻게 사도가 가졌던 생각과 다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 서는 날, 저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자랑할 것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자랑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관제로 부어진다 해도 나는 기뻐합니다”(17)
이제 사도는 이 말을 정리하고 있는데, 구약의 제사제도를 비유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들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17~18).

A. 그리스도인의 삶과 봉사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희생제물이다.
사도는 지금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리는 모든 삶의 행위와 봉사를 구약의 희생제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희생제물은 흠이 없는 것으로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지금 성도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 믿음으로 하는 봉사가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강조법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에서 우러나와 살아가는 삶과 봉사가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여 받으시는 희생제물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행위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희생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어서 드리는 전제라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사도가 관제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구약의 전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희생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전제에서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은 피였습니다. 말하자면, 제사를 드리는 자가 포도주를 희생제물 위에 부음으로써 자신의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을 표한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전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삶과 봉사라는 희생제물 위에 자기 피를 다 쏟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럴수만 있다면 자신은 기뻐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사도 자신만의 기쁨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기쁨은 사도의 기쁨이자,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6. 교회에 흘러넘치는 기쁨(17~18)
이런 헌신의 기쁨은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사도의 당부는 하나님께서 죠이선교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여기에 부르신 부르심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흠이 없고 순전하게 살아 어둔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는 것은 첫번째에서 이어지는 부르심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과 봉사를 사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희생제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그 희생제물 위에 자기 피를 다 쏟아 죽는다고 해도, 그 죽음 역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쳐드리는 죽음일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기쁨이요,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신의 기쁨입니다. 마땅히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도 합당하신 영광의 왕, 온 우주의 왕,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헌신하여 드리는 기쁨은 우리의 작은 가슴이 터질 정도로 벅찬 감격이고 기쁨일 것입니다. 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삶에 이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르심을 기억하십시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십시오. 그리고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추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이 터질만한 감격과 기쁨은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하나님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