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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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09 - 설립 3주년 감사예배 - 죠이선교교회, 브로드웨이에 서다 설교말씀

에베소서 3:10~11, 21, 마태복음 5:14-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0-11

말씀내용
<죠이선교교회, 브로드웨이에 서다> 엡 3:10~11, 21; 마 5:14~16



1.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
작년 교회 설립 2주년 감사예배 때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십니까? 스바냐 3:17을 본문으로 한 <하나님과 춤을 추는 사람들>이란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시고 춤을 추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사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맥락인지 모르실 분들을 위해서 그때 인용했던 C.S.Lewis의 글귀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아마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일 것이다. 즉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적인 사물이나 인격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약동하는 행동이요, 생명이며 거의 하나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나를 불경하다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나의 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전체 드라마, 또는 이 춤, 곧 삼위 하나님의 삶의 양식이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연출되어져야만 한다. 즉 우리는 각기 그 양식에 들어가고 그 춤에 참여해야 한다. 그외에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저는 종종 이것을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삼위 하나님의 춤에 동참하여 춤을 잘 추고 있는 것일까? 삼위 하나님의 드라마, 삼위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드라마에서 우리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저 자신에게는 목회자로서 이런 자기 인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과 더불어 춤을 추고 하나님의 드라마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연출, 아니 조연출 쯤 하는 것이 목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와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2.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앞에 설치하신 무대이다.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이 오늘날과 같이 약화된 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상식적 수준의 잣대로 이해하고 판단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데, 그 이유는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 마디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하늘의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영광을 목격한 바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의 영광과 비밀을 다 알게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교회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라고 할 때 그 세상은 단지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천사들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또 사도는 에베소서 3:21에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고 하면서 송영을 마칩니다. 여러분, 특이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사도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여기에 ‘교회와’라고 하면서 교회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이기에 사도는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실존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이신 교회를 통해서 지상에 여전히 당신의 영광을 선포하고 계시고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예정이 실현되어가는 영역입니다. 교회를 보면서 하늘의 천사들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늘과 지상에서 하나님의 다양하신 지혜를 선포할 특권을 받은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는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무궁하기를 원한다고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한 부분인 마태복음 5:14~16을 보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빛 앞에서 숨김을 받을 수 있는 동네는 없습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둘 사람은 없습니다. 잘 비추일 수 있도록 등잔대 위에 놓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그들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사람들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서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존재, 그리고 교회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교회라는 이 세상 속에 설치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원튼 원치 않튼 이 영광의 무대에 올라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페라 가수에게 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올라와서 공연을 하는 것이 영광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상 미국의 브로드웨이가 아니라 지구상의 브로드웨이에 올라온 것입니다.

교회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무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향해서 드러내고 싶어하시는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비출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교회에 대한 영광스러운 가르침을 성경에서 얻지 못한다면 교회는 이 세상의 한 조직에 불과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회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밝혀주실 때에만이 우리는 교회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고 교회의 영광을 이 세상 앞에 비추어주시기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천사들은 물론이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가장 잘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설치하신 최고의 무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비극은 많은 교회의 관점이 그저 다른 교회와 자기를 비교하고, 다른 교회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 머무르는 한, 교회는 결코 깨어일어날 수 없고 거기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무대 위에 선 춤꾼들이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무대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지역교회로서하나님께서는 3년 전에 죠이선교교회를 설립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하나님의 무대 위에 서서 온 세상 앞에 어떤 춤과 어떤 드라마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목회서신에 썼습니다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과실수를 심고 처음 3년 동안에 나오는 열매는 다 불결한 것으로 여기고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레 19:23~25). 4년째 나오는 열매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열매입니다. 이제 비로소 열매 다운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비추어볼 때 어쩌면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해온 일들은 열매를 보려고 했던 일들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준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로 받으시기 위해서 준비시켜 오셨고, 다듬어 오셨으며, 우리의 모든 거칠고 더러운 것들을 벗겨내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지난 3년의 의미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은 참 아픈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아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정결한 열매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3년이 지나 우리는 4년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받으실 열매로 온전하게 드려져야 합니다.

A. 하나님의 박자와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열매로 드려진다는 것은 온 세상이 지켜보는 무대 위에 선 교회로서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그 하나님의 박자와 리듬에 맞추어서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리듬과 자기의 박자와 자기의 고집을 가지고 춤을 추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여전히 할례 받지 못한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가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리드하셔야 합니다. 저는 지난 3년 동안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 모두에게 가르치려고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헤어지면서 말한 것 처럼,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할만큼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행 20:31). 그러나 바울 사도의 에베소 교회 3년 목회를 결산하는 이 말씀은 저 자신의 목회의 좌우명과 같이 여겨졌고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 지난 3년간 제 삶 전부를 좌우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일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쳤고 선포했던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면 그 살아있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어떻게 역사했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시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과연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박자와 리듬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서 춤을 출 수 있는 자리로 데리고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멘할 수 있는 분들은 실로 복된 분들일 것입니다. 더 이상 여러분이 자신의 리듬과 박자를 고집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을 따라서 살아가시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좀 모자라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는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것인지를 구별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열매가 아니라 여전히 부정하고 할례받지 못한 열매일 뿐인 것입니다.

B.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춤을 추고 있는가?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열매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무대 위에서 추는 춤이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춤은 이 세상의 슬프고 소망없는 인생들로 하여금 같이 춤추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인가? 여러분, 그냥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려고 하기가 쉽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렇게 가지 말고 정직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 겪는 슬픔과 고통과 좌절과 실패가 없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대로 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빼앗기지 않을 기쁨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강조해왔습니다. 이 기쁨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인생의 춤이 과연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와 더불어 무대에 올라와서 춤을 추고 싶도록 만들고 있는가를 정직하게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런 점에서 매우 특별한 매력을 가진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정말 재미없고 답답하고 보기만 해도 옆에 있기만 해도 질려버릴만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특별한 매력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도대체 너희는 무슨 소망을 가지고 있길래 그렇게 사느냐?”는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했습니다(벧전 2:15). “왜 당신은 그렇게 살면서도 춤을 출 수 있는거야?”라고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드라마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질문을 항상 유발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점점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와서 우리들과 함께 춤을 추고 싶을만큼 느껴지게 춤을 추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온 세상 앞에 설치하신 무대 위에 우리를 세우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와서 우리들과 함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춤을 추게 될 때에 그들은 어느 새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자신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C. “우리만 좋으면 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열매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또 하나는 수많은 교회가 역사 속에서 범했던 자기 중심적 사고의 죄였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도 유대인 중심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이민교회들도 자칫 “우리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한국어회중과 영어회중 사이에 아픔이 되어왔고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고를 가졌기 때문은 아닐지라도 저 자신에게는 3주년을 맞는 오늘 그 아픔이 크게 밀려옵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조금 큰 youth group 이상의 자녀들이라면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주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뿐 아니라, 자칫 이웃 교회를 향해서도 우리가 가지는 문제입니다. 춤 추는 사람이 적어도 무대에서 출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정도는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만 좋으면 된다든지, 우리만 좋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겠습니까? 사람이 성숙해간다는 것의 한 가지 지표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무대에 선 사람들의 마땅히 생각할 바인 것입니다. 이제 어린아이의 일을 벗고 성숙한 교회로 가야하는 죠이선교교회에게 이 관점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세상의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서 여러분의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삶을 그치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춤추는 무대를 찾아올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말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전부를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여기십시오.

D. “나 하나쯤이야...”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열매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피해야만 하는 또 한 가지는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무대 전체를 망가뜨리는 요소입니다. 무대 위에 서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와 구세주로 믿으셨다면, 거듭나셨다면,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을 접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특설무대 위에서 함께 공연을 하는 춤꾼들입니다. 한 구석에서 내가 춤을 춘다고 해도 이 세상의 누군가는 나를 주목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대 위에 머무르는 한, 한 사람도 이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어긋남이 전체를 망가뜨리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죠이선교교회라는 하나님의 무대 위에 올라오셨고, 하나님과 더불어 춤을 추기 시작하셨다면, 비유 말고 직설적으로 말씀드려서, 여러분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여러분 한 사람의 삶으로 말미암아 전체를 망가뜨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죠이선교교회의 이름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예를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정신의 포로가 되어 세상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저의 바램은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의 특설무대 위에서 함께 손과 발을 맞추어 하나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춤을 추는 것입니다.

4. 연기가 아닌 진짜 삶이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들을 도전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이 보도록 내가 만든 무대 위에서 나의 박자와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춤꾼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저는 비유적으로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무대 위라고 해서 이것이 연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삶(real life)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진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연기에 얼마나 지쳤던지, 이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소위 리얼리티 쇼라는 것이 나와서 연기가 아니라 진짜 삶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연기와 위선에 질려 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하면 위선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교회를 더 이상 피상적으로 보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이고 그들의 눈은 더 예리해져서 우리의 위선과 허위와 연기를 꿰뚫어볼 수준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은 그만큼 진정한 삶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저에게 이런 포스트모던적 성향은 오히려 복음의 기회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위선과 허위, 그리고 삶의 내용이 없는 말의 전도가 먹히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정직해지고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경험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즉 우리의 진정한 영적 삶과 경건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진짜 삶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삶을 살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위선과 자기방어의 벽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아무도 나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하도록 교회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것과 얼마나 모순되는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제가 지난 3년 동안 코이노니아 그리고 아담과 이브 모임을 강조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여전히 위선과 허위의식과 자기 방어로 무장한채 교회 생활을, 아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오늘 이제 4년차로 접어드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그것들을 여러분이 거두어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기쁨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 믿으세요. 기쁘답니다”라고 말하기를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전도는 연기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 설립 후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 가운데서 전도에 대한 이런 막연한 부담과 오해가 사라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또 하나의 의무적인 행위(activity) 가 아닙니다. 전도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짜 삶이요, 우리가 무대 위에서 추는 춤과 괴리된 어떤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보도록 주님은 우리를 무대 위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분의 박자와 리듬에 맞추어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춤입니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라 우리의 진짜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그저 대사를 외워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서 읊조리는 것, 말로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삶으로 말하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감동을 받을 것이고, 자녀들이 감동을 받을 것이며, 그리고 우리의 이 춤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점차 우리가 추는 춤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우리를 보려고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어느 새 무대에 올라와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춤을 추게 되는 것을 저는 바라봅니다.

5. 죠이선교교회, 브로드웨이에 서다.
“죠이선교교회, 브로드웨이에 서다.” 저는 단순히 큰 무대라는 점에서 브로드웨이라는 대유법을 써서 표현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가 다 함께 설 수 있는 거대한 무대를 만들어놓으셨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것이 브로드웨이라면 우리는 모든 지구상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과 함께 더불어 이제 그 큰 무대 위에 올라가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박자와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독특한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이다.” 거룩과 기쁨과 사랑과 열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온전한 열매로 드려지는 우리의 4년 차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