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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08 - 설립 2주년 감사예배 - 하나님과 춤을 추는 사람들

스바냐 3: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10-12

말씀내용
<하나님과 춤을 추는 사람들> 습 3:17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주신 지 2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마 우리는 앞으로도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어떤 말씀을 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일 것입니다. 사명은 우리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적당히 만들어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고민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제일 먼저 저는 이 사명이 우리 자신의 삶과 얼마나 유리될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만일 사명이 더 이상 그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아무런 각성도 줄 수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절대로 우리의 가슴 속에 감동 없이 그저 의무감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어떤 때는 기쁨이 없이, 감동이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장래, 가까운 장래 또는 먼 장래에 베풀어주실 은혜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면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 2:13).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목적을 추구하는 동일한 소원(desire)을 먼저 주신다는 것입니다.

A. 가장 강한 소원(desire)은 가장 궁극적인 목적에서 나온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계시는 이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하루 하루를 이렇게 살아오셨습니까? 무엇을 하자고 말입니까? 미국에 이민와서 많은 고생을 하고 사시는 분들의 마음 속에는 American Dream 이라는게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자녀들을 잘 길러보자고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어떤 소원이 있기 때문에 고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 기대도, 소원도, 소망도 없이 그저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처럼 무의미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인간은 마음 속의 소원(desire)에 의해서 움직이게 만드셨습니다. 소원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말할 때, 가장 강한 소원은 사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입니다. 가장 강한 소원은 가장 궁극적인 목적에서 나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소원은 조물주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B.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교회 설립 후에 처음 설교 시리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이유와 목적 그리고 사명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만 설명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대주제를 전한 것이었습니다. 즉, 저는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소원(열정)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소원에 일치하는 소원을 인생 가운데서 품기 시작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포기할 수 없고 그치지 않는 삶의 열정을 가지고 그 일을 추구하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서 주의 놀라운 일을 이 세상 가운데 행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이것입니다. 단기적인 목표가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현실에서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서, 우리의 감각적이고 근시안적인 생각 속에 쉽게 잡히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기쁨을 말하는거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과 함께 경험하기를 원했고 또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왔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기억하라.
이것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나고 우리 가슴을 벅차게 하고, 이 일에 우리 자신의 삶을 완전히 드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은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도록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A. 목적?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시고 영광을 받으시고자 함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결코 심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소위 공동체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기쁨은 성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가득하게 채우고 완전한 만족, 완전한 평화, 완전한 영광의 상태에 거하시게 하였습니다(잠 8:30).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성 삼위 안에서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서로 사랑은 완전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넘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의 기쁨을 하나님 외의 다른 존재를 향하여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에덴 동산(기쁨의 동산)을 만드사 인간이 거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환경을 만드시고 사람을 거기에 만들어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신 것은 기쁨이었고, 제일 먼저 주신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기뻐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을 17세기 영국의 신학자들이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인간의 제일 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인생이 성패를 결정하는 진술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되는 것이며,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발견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궁극적으로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B. 소명?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고 기뻐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이것은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우리의 직업과 상관없이 우리의 본질적 소명은 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고 기뻐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C.S.Lewis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쓴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마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일 것이다. 즉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적인 사물이나 인격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약동하는 행동이요, 생명이며 거의 하나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나를 불경하다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나의 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전체 드라마, 또는 이 춤, 곧 삼위 하나님의 삶의 양식이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연출되어져야만 한다. 즉 우리는 각기 그 양식에 들어가고 그 춤에 참여해야 한다. 그외에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루이스가 성 삼위 하나님을 하나의 드라마 혹은 하나의 춤으로 묘사한 것은 매우 놀라운 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드라마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춤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움직일 뿐 아니라 하나의 기쁨을 표현해주는 수단입니다(물론 춤이 슬픔을 표현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루이스의 의미는 기쁨을 드러내는 춤이다). 저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설명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읽은 스바냐 3:17만큼 이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구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에게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참된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여기서 스바냐가 묘사하는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그들 가운데 가만히 거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데서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그들로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잠잠히 쉬게 하실 것이며 자기 백성을 위해서 기쁨의 노래를 불러주실 것입니다. 이 그림을 공동번역은 더욱 실감있게 번역했는데, 그 후반부는 이렇습니다: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저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여 노래하며 춤을 추는 분으로 묘사된 어느 종교의 신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묘사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인하여 기뻐서 노래부르시며 춤추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잠잠할 수만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춤을 추게 되겠지요.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선언은 바로 이 그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서 하나님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C. 사명?삼위 하나님과 춤을 추며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한 가지 더 중요한 함축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기뻐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를 창조하신 동기가 되었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가누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기뻐하시는 성 삼위 하나님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출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도 그 안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춤을 추시면서 우리 죄인들의 삶 깊은 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삶 속으로 찾아들어오는 것은 고통스러울지라도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이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이기는 기쁨입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견딜 수 없는 기쁨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시는 하나님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출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한 사람, 그것을 누리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3. 진정한 기쁨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사명이 기쁨이라고 해서 그 기쁨은 더 이상 우리 인생에서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가슴 아픈 일이 피해갈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상실의 아픔이 있을 것이고, 실패와 침체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기쁨은 오히려 이런 상실을 견뎌내는 자족의 기쁨이며, 아픔 중에서도 깊어지는 기쁨이고, 종종 일어나는 실패와 침체를 이겨내는 겸손한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더욱 힘이 있고 아픔도 슬픔도 실패도 좌절도 결코 꺽지 못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A. 모든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말하는 기쁨은 힘이나 영향력, 돈이나 지위, 연줄이나 성취, 성공, 또는 소유나 음식이나 섹스 같은 것들로부터 만들어지는 기쁨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들은 다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들처럼 보이지만 실상 다 우리의 깊은 만족을 채워주기에는 미흡한 것들입니다. 모든 기쁨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복음서를 깊이 읽어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기쁨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에게 있어서 모든 기쁨의 원천은 위에 열거한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있고 배가 불러서 기뻐하신 것도 아닙니다. 친구들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자체를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기쁨은 바로 성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 가운데서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셨고 완전하게 누리셨던 유일하신 분이셨습니다. 상실과 배신의 아픔, 그리고 가난과 고통을 당하시는 속에서도 주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변함없는 그리고 꺼지지 않는 기쁨을 아셨던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여기서 여러분의 인생의 진정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대신, 힘, 영향력, 돈, 지위, 성취, 성공, 소유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허전함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달려가던 우리의 인생을 잠깐 멈추어 서서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왜 이렇게 사십니까?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무엇을 얻고자 함입니까? 무슨 소원이 있어서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길을 달려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냥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만족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B. 하나님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라.
루이스가 말한대로 성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의 드라마와 같다면 그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성 삼위 하나님이 하나의 춤이라면 그분의 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추어지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드라마와 춤이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연출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드라마 속에 들어가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자기의 드라마를 만들고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서 자기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치기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여러분의 드라마라면 그것은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C.S.Lew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몸을 녹이기를 원한다면 난로 가까이 가야한다. 물에 젖기를 원한다면 물 속에 들어가야 한다. 기쁨, 능력, 평안, 영생을 원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에 가까이 가야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나누어주시는 상급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재의 중심에서 솟아나오는 아름다움과 힘의 샘이다. 당신이 그곳에 가까이 가야 그 물줄기가 당신을 적실 것이요, 그곳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당신은 메마른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여러분,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기를 기뻐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모든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며, 그들로 인한 기쁨을 견디지를 못하셔서 그 사랑으로 그들을 쉬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시며 그들로 인해서 더덩실 춤을 추시는 그 하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함께 노래부르고 그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십시오. 그분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다음에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성 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면서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영혼들과 더불어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