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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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 2007 - 설립 1주년 감사예배 - 영광스러운 교회에 대한 소망

예레미야 33:9-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10-12

말씀내용
<영광스러운 교회에 대한 소망> 예레미야 33:9~11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는 경험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부터 나온다.
성경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교회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감히 상상하기가 어렵고, 오직 믿음으로밖에는 볼 수 없는 정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기대이며 소망이며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실 계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교회에 대한 이런 성경적인 개념, 영광스러운 개념을 별로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대개 경험으로부터 얻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우리의 열심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구별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교회에 더 깊이 들어와 헌신하면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라고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성경을 연구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드러나있는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만, 우리는 교회가 무엇이며, 그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떻게 세워지게 되며,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과 맺는 관계에 의해서만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Everything you’ve heard is wrong!
오늘날 저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탁월함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이 세상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세상이 교회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신이 자신을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성경을 읽지 않았을 때, 교회가 성경을 설교하지 않았을 때,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을 때 교회는 교회의 영광을 잃어버렸고 세속화되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요?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말씀드리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는 그야말로 심각할 정도로 교회가 그 영광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세속화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루어져있어서 도무지 교회 생활을 경험을 가지고 말하는 것마다 다 틀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토니 캠폴로가 쓴 책 가운데 Everything you’ve heard is wrong 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할 정도입니다. ‘Everything you’ve heard about the church is wrong!’ 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참 기이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표현하시는데, 대개 그 기대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어서 현실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성경은 죄인이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선언하는데, 여전히 우리의 삶의 현실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입니다. 교회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성경은 설명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너무나도 망가져있는 모습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섭리하고 계신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부조리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편에서 살 것인지, 믿음의 눈으로 보이는 편에 서서 살 것인지를 요구받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니까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생각에는, 내 경험으로는, 내 판단으로는’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비록 나의 생각과 다르지만 주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얼마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메시지는 대개 백성들의 판단과 이해, 그리고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실 때 그런 것을 종종 느끼십니까? 강단에서 전해지거나 혹은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읽거나 공부하시면서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여러분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을 느끼신다면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너무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중심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짓된 메시지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시는 편이 더 낫다고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 조차도 자기들이 받은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납득하지 못한 채 전해야 했던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의 교회가 거두는 열매는 황폐함 뿐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해졌을 때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 왕 시드기야는 그를 시위대 뜰(궁중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운명이었고 예레미야는 그것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처음 전하도록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의 메시지였습니다. 33장의 4~5절에 있는 말씀과 같습니다.
렘 33: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 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아무도 그의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는데, 그들의 수는 물론 참 선지자들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백성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소리인지를 들을 수 있는 분별력을 상실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를 듣고 거기에 의존하다가 멸망을 당한 것은 분명히 그들 자신의 책임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날에도 동일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적지 않고, 그들의 인기는 높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 위해서 모여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비록 단기적으로 볼 때에는 멸망과 고통을 당한다는 비극적인 메시지였지만, 장기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미래의 소망은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이전의 상태와는 도무지 조화를 이룰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붙잡혀 가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은 온 세상 앞에서 땅에 곤두박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다시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힘을 믿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모든 힘을 다 좌절시키고 나서, 그들의 마음이 다시 겸비해질 때에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영광, 즉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들과 승리주의적 태도들과 충천한 의욕들이 가지는 위험을 조심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능력을 잃어버린 채, 이미 세상의 포로가 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거듭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망을 품는다.
오늘날의 현실이 그런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메시지는 오늘날 교회의 형편을 보면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 기도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당시가 그러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멸망의 메시지에 분노하고 나아가서 예레미야가 전하는 회복의 영광에 대한 메시지에 코웃음을 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남은 자들, 즉 구약의 거듭난 백성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소망이 되었습니다. 이 소망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렘 33: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의 주어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하나님 자신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맞아서 상하게 된 자기 백성을 치료하시고 고쳐서 낫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참 평화와 안전함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계획을 여기서 발표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 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성읍의 미래에 대해서 말씀을 계속 하십니다. ‘이 성읍’은 예루살렘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듯이, 이 성읍은 이제 새 예루살렘 곧 교회입니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남은 자들에게 소망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언제나 돌아가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믿음은 오히려 모든 상황을 거슬러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가능성과 희망이 다 사라져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보였던 반응이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상황이 나의 믿음의 내용 곧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끝까지 그 말씀을 신뢰하면서 소망을 품을 수 있는가 하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고작 1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갈 때 우리가 만나게 될 많은 어려움과 상황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을 끝까지 붙잡아주는 것은 요행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저는 그 터를 든든하게 세워나가고자 합니다. 계속해서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심을 것입니다(벧전 1:23).

교회 안에 기쁨의 소리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이 맞습니까, 여러분? 과연 교회 안에는 기쁨의 소리가 가득한가요? 그런 날이 오기는 오는 것일까요? 이제 9절을 보십시오.
렘 33: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平康)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습니까? 교회의 본질을 기쁨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보여주는 교회에 대한 첫번째 소망의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교회는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쁨 이름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듣기만 해도 즐거운 이름입니다. 그리고 찬송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께 기쁨과 찬송과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10~11절이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해줍니다.
렘 33:10~1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전에는 황폐하였던 곳이 이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로 가득하게 될텐데, 그 소리는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이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의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구원하여 주신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한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의 소리들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들려나오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얼마나 경험되고 있습니까?

그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나 자연적인 기쁨이 아니다.
이 기쁨은 결코 세상의 기쁨과 섞일 수가 없는 기쁨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잠시 잠깐씩 제공해주는 기쁨과 섞이게 된다면, 교회는 이런 기뻐하는 소리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가치 속에서 묻혀 살아간다면, 그리고 여러분에게 이 세상이 중요한 것 만큼 교회에서는 그런 기쁨의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감사의 소리가 아니라 불평의 소리와 분쟁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기쁨은 자연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그냥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들로 말미암는 그런 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기쁨이 아니라는 말은 보통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써 가질 수 있거나 맛볼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 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유의 기쁨을 조금씩 조금씩 맛보게 하심으로써 이것들이 서로 나누어질 때 또한 우리가 더불어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변화인데, 그 변화는 너무나 완전한 변화입니다. 즉,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을 맛보아 알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맛볼 수 있는 능력이 그 마음 속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는 알지 못하던 기쁨이고 알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참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들로 채워지게 되면 될수록 교회는 그런 기쁨을 나누고 즐거워하는 소리로 점점 채워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들이 아니라 사실은 거듭나지 않았지만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된다면 그런 기쁨의 소리 대신에, 이 세상의 번영과 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에 대한 소리들로 점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소리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는 소리들이 교회를 가득하게 채워주시는 날을 교회 안에 주시기를 소망하고 기다립니다. 우리의 코이노니아 그룹들이 그런 소리들로 채워져서 그 기쁨이 충만해지는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송하며 더 찬송하고 싶어지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교회의 기쁨은 주변과 세계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만들 것이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교회가 누리게 되는 이런 놀라운 기쁨이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두려워 떨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곧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복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떨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는 방식을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히 선하심을 따라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 평강, 은혜로 말미암아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해주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방법입니다. ‘두려워 떤다’는 표현은 성경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방식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과도할만큼 넘쳐서 오히려 죄인을 감동하게 하고 압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를 두려움에 몰아넣어서 질리게 하시는 방식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은총이 과도할만큼 넘쳐서 오히려 우리를 압도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회개는 하나님이 나를 지옥으로 보내실 것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너무나 무한해서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도 당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방식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것이 없어 낙망할 때 주님께서 오셔서 아무 상관없는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심으로 그에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셔서 그를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인생을 추적하실 때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가 아니라,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추적하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인가하면 그 무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압도당하여 두려워 떨 때까지 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그 일을 이루어주시는 것이다.
저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죠이선교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에 이 일을 이루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세계 선교를 감당해야겠다고 하는 여러분의 의지도 좋고, 의욕도 좋고, 계획도 좋고, 생각도 다 좋습니다마는, 제가 가지는 소원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주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복과 은혜와 평강과 안전함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들이 먼저 감동을 하고 압도를 당하고, 나아가서 우리를 보는 주변과 더는 세계 열방 앞이 두려워 떨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죠이선교교회에 베푸신 은혜와 복과 평강과 안전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에 압도당한 자들이 두려워 떨며 주님 앞에 나와서 그 은혜와 복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저의 꿈은 하나님께서 죠이선교교회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 기쁨과 평강을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주변의 워싱턴 지역에 있는 한국교회들과 수많은 교회들을 두려워 떨게 함으로 교회들이 영광스러운 교회들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을 누리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복과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주변 교회들의 황폐한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큰 슬픔이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복과 은혜로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을 거의 듣지 못하는 슬픔이 우리 모두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땅에 우리 모두를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갈망하는 자들을 위해서 한 곳을 예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곳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겨진 땅은 황폐한 땅임을 잊지 마십시오.

인디언들의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임종 하기 12일 전에 구두로 기술했던 것이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1747년 9월 27일
“저의 생각은 오랫동안 친숙해진 주제, 곧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번영해야 한다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눈물로 기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십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해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는 제가 참으로 간절히 갈망해온 기도제목이었습니다….저는 전부터 성령 부어주시기를 갈망해왔습니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때가 오기를 소망해왔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소명과 그 소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열방 앞에서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되게 하시고 찬송과 영광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베풀어주셨고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독특하거나 새로운 소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본래적인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기쁨을 인하여 주변과 세상이 두려워 떨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역사를 주실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죠이선교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그런 영광스러운 날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우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