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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종교개혁기념주일 2017 - 이신칭의의 복음

갈라디아서 2:15-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0-29

말씀내용
이신칭의의 복음 (갈 2:15~21)


1. 이신칭의의 복음: 기독교의 심장
이신칭의의 복음은 기독교의 심장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이신칭의의 교리는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로서 한때 개신교 신앙을 철회했다가 다시 믿음을 지키고 순교했던 토마스 크랜머의 말입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뒤엎는다. 이를 부인하는 자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이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낸다.” 오늘 우리는 500년 전 마르틴 루터에 의해 발화되었던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이 본문이 가르치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A. 최고로 압축된 복음, 이신칭의
이신칭의 교리는 기독교 복음의 토대입니다. 칭의라는 말은 재판장이 법정에서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무죄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 반대말은 ‘정죄’(condemnation)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의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선함이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죄 선언을 얻기를 원해 선행과 공적을 쌓다가 완벽하신 재판장 앞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기의 선행과 공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듣게 된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이신칭의는 최고로 압축된 복음입니다. 이신칭의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B. 우리 시대 교회의 문제: 무지(ignorance)와 냉담(apathy)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무지와 냉담이 만연합니다.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교회가 가진 이 심각한 증상인 무지와 냉담이 혹시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2. 인간 최고의 난제: ‘의롭다 함’(justified)?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음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입니다. 사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난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에 ‘의롭다 함’을 받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이생에서 잘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을 지옥에서 보내라는 최종 선고를 받는다면 그것은 결코 잘 산 인생일 수 없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고통, 환난, 질고를 겪고 상처도 입었지만, 하나님께 의롭다는 선고를 받고 영원히 하나님과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산다면 그는 잘 산 인생인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우리가 다 살고 나서 받게 될 하나님의 최종 선고를,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앞당겨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괜찮게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jusified)는 단어가 5번 나옵니다. 16절에 세 번, 17절에 한 번, 21절에 한 번 나옵니다.

A. ‘하나님은 의롭고, 나는 의롭지 않다.’
이 단어와 관련하여 성경은 ‘하나님은 의롭고, 나는 의롭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하고(롬 3:23), 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롬 3:10). 우리가 다 의롭지 않은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죄 선고를 받는 것, 의롭다 함을 받는 것 외에 없습니다.

B.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3. 위대한 선언(15~16)
15~16절은 하나의 선언입니다.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어지는 17~20절은 이 선언에 대한 반론과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먼저 15~16절의 위대한 선언을 봅니다.

A. ‘혈통적 유대인과 이방 죄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시작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이방인들에 대하여 쓰던 표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 두 절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방 죄인들이 언약 밖의 외인들이고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자들인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 유대인이 선민의 모든 특권을 가졌다고 주장해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용납된다는 점에서는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

혈통적 유대인과 이방 죄인 사이에는 구원에 있어서 차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군자나 살인강도나 구원을 받는 방법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도덕군자가 살인강도보다 우위에 있거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 태생, 행위, 공로가 구원에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게 말이 되는가 말입니다.

B.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바울 사도가 생명을 걸고 주장하며 한치도 양보할 수 없었던 가르침이 이것입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인간의 우쭐대고 싶어하는 자존심을 부추겨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산산조각냄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16절에서 세번 거듭되는 진술로써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을 설명합니다.

i. 일반적(general) 진술 (16a)
먼저 일반적 진술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라는 진술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베드로 모두가 동의하고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일반적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고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 일반적 진술에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개인적(personal) 진술 (16b)
이 원리에 근거하여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개인적 진술을 전개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헬라어에서 ‘믿는다’는 동사는 목적어 앞에 영어의 ‘into’에 해당하는 전치사를 동반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들어가)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믿음은 단순히 지적 동의가 아니라 인격적 위탁(commitment)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관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 그분 안으로 내가 들어가서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그에게로 달려가 자비로우신 주님을 부르는 실제적 행위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위탁했습니다. 이것이 믿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한 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선함을 가지고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저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심으로 속죄를 이루어 주셨음을 믿습니다. 이제 능력과 자존심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피난처로 삼고 살다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저의 의로움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하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힘과 자존심으로 안간힘을 쓰고 사십니까?

iii. 보편적(universal) 진술 (16c)
세번째로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는 보편적 진술이 주어집니다.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이 법칙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유대교에도 칭의의 개념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행칭의’(以行稱義)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행칭의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C.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칭의
종교개혁 시대 성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로 만들어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60문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설명하는 진술은 매우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비록 나의 양심이 고소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심각하게 범하였고, 그 중 아무 것도 지키지 않았으며 모든 악을 향하여 기울어져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아무런 공로도 없이, 단지 은혜로 나에게 완전한 만족과 의와 그리스도의 거룩을 허락해주시고 전가해 주십니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아무 죄도 지은 적이 없는 것 처럼, 마치 내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다 완전하게 이룬 것 처럼 해주시는 것인데, 이것도 내가 믿는 마음으로 그런 은총을 받아들일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4. 반론: 칭의 교리는 죄를 조장하는 교리다(17~18).
이신칭의의 복음은 바울 사도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늘 반론에 부딪혀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칭의 교리는 죄를 조장하는 교리’라는 반론입니다. “마지막 심판날에 있을 선고는 아무도 모르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선하게 살아서 그날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또는 칭의의 교리가 마지막 심판날의 선고를 앞당겨 무죄로 선언해줌으로써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방종의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은혜로 말미암아 참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결코 방종으로 이끌리지 않습니다. 구원얻은 사람이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17~18절에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이신칭의의 복음이 사람의 도덕적 책임감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반론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단호한 부정으로 대응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가였던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참 설교는 늘 그것에 대해 제기되는 이런 비난(도덕률폐기론)의 가능성을 가져온다. 만일 구원의 복음에 대한 내 설교와 표현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18절에서 자신이 헐었던 유대교의 이행칭의의 교리를 다시 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혹을 받아 넘어진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이미 들었지만, 지금 와서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5. 바울의 4가지 주장(19~20)
바울 사도는 19~20절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에서 나오는 네 가지 선언을 합니다.

A.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19)
바울 사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주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은 파괴되었고 나는 그런 율법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구원의 방법,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칭의를 위해서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께만 자신의 신뢰를 드렸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은 구원얻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을 부정하는 선언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B.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20a).
20절은 신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두번째 선언은 첫번째 선언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밖에 머무시는 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따로 거하시는 한,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무용하고, 무가치한 일이 됩니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원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강도들에 관계됩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 경험이 우리 경험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무명의 흑인 노예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C.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20b).
바울 사도는 여기서 기독교를 완전주의나 신비주의로 묘사하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지상에서 완전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또한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경지를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자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설명입니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신칭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연합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나를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D.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20c).
비록 칭의의 선물을 받았어도 우리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아갑니다. 사도는 그 삶도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는 믿음으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은 한 순간의 결정이나 과거의 경험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이신칭의의 복음을 오해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결점이었습니다. 구원얻는 믿음은 신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고 역동적인 실체입니다. 이 믿음은 구체적 대상을 가집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대상입니다. 무엇이 구주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습니까? ‘나를 사랑하사!’ 이것이 바로 아들을 죽게 한 동인(動因)입니다. 그 어떤 물리적 힘이나 강제력 또는 어떤 다른 목적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버리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래 전에 애창되던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 사랑하나>의 가사를 기억하십니까?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그 손과 발 날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후렴)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구주를 죽게 한 것입니다.

6. 십자가를 욕되게 하지 말라(21)
끝으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을 지킴으로써,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부터 주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헛되게, 그리고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너무나 신뢰해서, 자기 의를 쌓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모욕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는 최종적 무죄선고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즉, 만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7. 오직 하나님께 영광!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는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를 쌓으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살아갈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삶의 끝에서 하나님의 심판대를 마주하게 되는 날,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에 대한 판결을 받을 때, 의로운 자로 판결을 받을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보고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하실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날에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모든 날 동안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500년 전, 오늘 마르틴 루터라는 시골 사제를 통하여 이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주심으로써 교회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