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A .종교개혁기념주일 2014 - 여호와, 우리의 공의

주제설교 - 특별설교/절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A .종교개혁기념주일 2014 - 여호와, 우리의 공의

예레미야 2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10-26

말씀내용
<여호와, 우리의 공의> 렘 23:6


1. 절망의 상황 속에 선포된 예레미야의 복음
예레미야 23장은 매우 암울한 시대 상황을 보여줍니다. 1~8절은 악한 왕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9~32절은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같은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그리고 33절 이하는 백성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의무로 여기는 모든 사람을 향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유다 사회는 한 마디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은 시편 12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시 12:1).” 결국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쳐들어오는 바벨론 군대 앞에 무너져 불태워지고 사람들은 살육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2. 절망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상황이 이처럼 절망적일 때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과 바깥 세상을 향해서 비난의 칼을 세우기 쉽습니다. 탐욕스러운 정치 지도자나 타락한 교회 목사 등 비난의 대상을 찾고 싶어집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3장이 보여주듯이, 그런 자들을 향한 심판을 엄중히 선고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절망이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하지 않습니다.
A. 인간 본성에 대한 성경의 평가(렘 17:9; 13:23; 사 64:6)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질을 연구했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성경보다 더 정직하게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이사야를 통해 주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인간의 본성이 절망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더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B. 의를 필요로 하는 죄인의 비참한 실존(창 3:7)
저는 성경에서 가장 비참한 한 장면 중 하나를 창세기 3장에서 봅니다.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6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말에 바로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사전에 수치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먹자 마자, 즉 죄가 인간 속에 들어오자 마자 즉각적으로 그들은 수치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향해서 가지는 감정이라기 보다 죄인이 스스로 느끼는 피할 수 없는 실존의 감정이었습니다. 본능적으로 두 사람은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지만 잎사귀는 수치를 가려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자명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써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한 의로움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죄로 더러운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가 유발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3. 가장 어리석은 인간: 자기 의를 의지하는 사람
이때부터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의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평생 껍데기(외모)로 자기 내면의 수치를 가리려는 노력을 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려고 했던 조상들의 헛된 노력이라는 사실을 좀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외모가 되었든, 학력이 되었던, 혹은 교양이든, 성공이나 성취 혹은 명예나 칭찬이든 온갖 가능해 보이는 모든 것들로 자신의 존재적 수치를 가리려고 하는 비참함이 죄인인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 이래 모든 죄인은 이와 같이 절대 부족감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주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은 이런 인간의 비참을 보여주는 표본입니다(막 10:17~22). 주님께서 심판날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시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고 하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바로 자기 의를 의지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야말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수치를 가리려고 하는 사람, 즉 자기 의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불리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4.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
죄인이 자기 의라는 무화과 나뭇잎을 벗어버리고 자기의 수치와 비참의 실상을 보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그 잘난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찢어 그 수치를 드러내 보게 하십니다(참고, 겔 23:29). 반드시 그렇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치를 가리고 없는 것처럼 만드실 수 있는 능력,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적도 없는 의로운 존재와 같이 서도록 만드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치가 드러나고 우리가 그것을 직면하기까지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데 까지 피하는 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불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무화과 잎으로 덮고 있는 사람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일 여러분의 자기 의를 벗겨내시고 여러분의 수치를 드러내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짐승의 가죽옷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하여 순종하여 사심으로써 율법의 의를 온전하게 얻으셨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다 받으셨으니, 이 순종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소리질러 “다 이루었다”고 하신 후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요 19:30).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바, ‘여호와, 우리의 공의’를 남김 없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기 위해서 친히 창조하신 생명을 피 흘려 죽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습니다.
5.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사람(마 5:6; 빌 3:7~9)
주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 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 5:6). 누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 의로 배 불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의의 무가치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의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가 찢어지고 자기의 수치를 직면해 본 사람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벌거벗은 존재요, 자기의 수치를 가릴 길이 없음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알고 간절히 그리스도를 자기의 의로 붙드는 사람입니다.
A. 사도 바울(빌 3:7~9)
사도 바울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자기 의의 옷으로 온 몸을 감쪽같이 가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주님을 만나던 순간, 그 모든 자기 의의 옷은 찢어져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벌거벗은 수치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한 번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완전한 하나님의 의가 되신 것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의로 다시 옷 입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의 존재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안전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의의 모든 시도는 다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B. 마틴 루터의 고뇌: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은 16세기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를 견딜 수 없도록 괴롭힌 것은 당대의 타락한 교회가 아니라 죄인인 자신이 어떻게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서 절망과 비참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 수치와 비참을 가리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허사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한 번에 6시간의 고해성사를 해도 자신의 죄를 해결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직을 맡아 로마서를 가르치기 위해서 로마서 1장 17절과 씨름하던 루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몹시 애쓰는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였다. 그것은 이 의라는 말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요 따라서 불의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처벌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나의 상황으로 말하면 수도사로서는 털끝만치도 흠잡을 데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에 도무지 나의 공로를 가지고는 그분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공정하고 성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증오하고 그분에게 투덜대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바울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있을까 계속 생각했다.” 잠깐 로마서 1장 17절을 보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계속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시는 그 의라는 걸 터득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지녔으며, 전에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내 속은 증오로 차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대한) 더 큰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바울 서신의 이 대목이 나에게는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이었다.”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을 깨달은 것은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발화점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깨달은 것은 죄인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모든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6. 그의 이름은 ‘여호와 치드케누!’
선지자 예레미야가 살던 유다 사회는 온통 부패한 냄새가 진동하던 절망적 사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소망의 약속은 개혁지침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불리는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선행과 교양과 학식과 노력과 성취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공의로움을 만들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하나님의 의가 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이 복음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드는 모든 수고를 하지 않을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복음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두려워하는 인생을 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수치를 가릴 길이 없어 불안한 아담의 자손들에게 얼마나 복된 약속입니까?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실패할 때마다, 그리고 좌절할 때마다 기억해야 할 이름이 여기 있습니다. “여호와 치드케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광스럽고 복된 이름은 우리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게 해주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우리가 받은 그 큰 구원의 은혜와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게 해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되신 이름입니다. 만일 무화과 나뭇잎이라는 자기 의로 아직도 자기 수치를 가리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고집하는 여러분, 돌이키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벌거벗은 채로 나오십시오. 아니면 “오, 주님, 제게서 이 더러운 걸레에 불과한 자기 의의 치마를 찢어 제 수치를 드러내 ‘여호와 치드케누’가 되시는 주 예수님 안에 숨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하는 심정으로 나아가십시오. 주저하지 마십시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는데 주저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 주님, 제가 믿나이다. 제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구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7. 복음의 부흥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497년 전, 이 복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여호와 치드케누’의 복음을 깨달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 복음을 자신들의 생명과 바꿀 수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복음, 듣고 기뻐하고 감격하는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화형장의 불길 속에서, 혹은 단두대의 칼날 위에서 생을 마쳐야 함에도, 수많은 세월을 망명객의 신세로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생을 살아가면서도 이 복음의 교리를 생명과 바꾸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여호와 치드케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497년 전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이 복음을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또한 이 시대에 이 복음을 깨달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시대에 부흥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