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A. 종교개혁사경회 2010 (2) - 오직 하나님께 영광!

주제설교 - 특별설교/절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A. 종교개혁사경회 2010 (2) - 오직 하나님께 영광!

로마서 11:33-36, 요한계시록 5:13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11-08

말씀내용
설교 I - 김영채목사
<나의 택한 종을 보라> 마 12:18

설교 I - 김형익목사
<오직 하나님께 영광!: 우리는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계 5:13; 롬 11:33~36

저는 어제 함께 상고했던 말씀에 이어서, 그리고 이번 사경회 전체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우리는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라는 주제를 함께 다루려고 합니다. 이것은 다섯 가지 sola 중에서 맨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1. 다른 4 Solas를 결정하는 원리/경험: Soli Deo Gloria Soli Deo Gloria! 이 주제는 그저 하나의 마지막 주제가 아니라, 다른 네 가지 주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모두 아우를 뿐 아니라 결정짓는 원리입니다. 이 네 가지 솔라는 모두 궁극적으로 이 다섯번째 솔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을 단지 원리라고만 부르는 것은 합당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원리이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은 주관적인 어떤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때 주시는 신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이것이 하나의 구호가 아니라 자연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성화의 과정에서 가지게 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험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 이것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성경에서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체험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A. 사도 요한의 체험 제일 먼저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체험은 매우 특이한 것으로서 하늘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체험입니다. 그가 밧모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마지막 일과 특히 하늘의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계 1:17). 요한만큼 주님을 가까이서 친밀하게 경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을 때 와락 하고 껴안은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엎드려졌고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는 이 구절을 저는 많이 생각해보곤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마지막 날 하늘에서 있게 될 장면을 봅니다.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소리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말입니다(계 5:13). 이 광경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것을 세상에서 본 일이 없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그리스도를 그렇게 찬송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는 바뀌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B. 이사야의 체험, 아브라함, 모세, 예레미야.. 사실 사도 요한의 체험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지를 압니다. 이사야 6장에서 그가 성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자신은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A. W. Tozer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사야의 고통에 찬 외침은 하나님의 순백한 거룩성을 영적으로 대면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가면을 쓴 모습을 발견한 모든 사람의 느낌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정서적으로 격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입고나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부르심은 성공적인 사역을 약속받은 사역이 아니라, 실패를 보장받은 사역이었습니다. 그가 전하기는 전할텐데, 사람들은 그에게 반응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의 사역은 실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실하게 이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고 그와 같이 메시야에 대한 많은 예언을 남긴 선지자는 없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결국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그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전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자였는데, 자기 부모, 고향, 친척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는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모세의 80세까지의 삶과 남은 40년의 삶을 나누는 분수령이 된 사건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미디안 광야의 목자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만들었습니까?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뵌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말을 실제로 잘 하지 못하는 자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무엇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숫한 고생을 감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타협하지 않고 전하게 한 것일까요? 그가 하나님을 뵌 것입니다.

C. 바울의 체험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고후 4:4~6) 한 사람만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입니다. 무엇이 사울이라는 핍박자를 바울이라는 대사도로 변화시킨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 때문입니다. 그의 평생의 복음 사역의 비밀도 바로 이 사건, 주님을 만난 사건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 이것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 다른 길로 소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는 슬픈 사실이 문제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그 엄위로우심 앞에 떤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은 일입니다. 이것은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교육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교회, 예배 공동체 여러분, 교회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존재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 존재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하면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중심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저렇게 하면 소비자들이 좋아한다는 식의 프로그램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 몸에 배일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갈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서는 이 땅의 것들로부터 관심을 돌려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시선을 집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느 누구도 예배를 통해서 변화되지 않고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하거나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 저는 이런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되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사모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제가 목회를 해야만 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 참된 예배를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다시 Soli Deo Gloria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일어나는 결과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첫째는 성화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미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자라남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중생의 착하신 역사를 시작하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마치실 것입니다(빌 1:6). 성화가 일어난다고 할 때, 이것은 중생한 각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과 열망을 통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빌 2:13). 그러나 이 성화가 이렇게 시작이 될 때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심으로써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가십니다. 고린도후서 3:18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까?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라고 말하지 않고 기도 많이 해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삶이 예배가 될 때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보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굳어지고 교만해지며 결국 바리새인과 같이 될 뿐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많이 보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런 방식으로 주님께 나아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교회 안에서 드러나는 열매는 형제 사랑입니다. 여기서는 ‘서로 사랑하자’는 구호를 많이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실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고, 서로가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 근거에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의미했던 형제 사랑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세번째 열매는 전도와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나 오해로 가득한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말하는 것이라고 할 때, 누가 가장 이 일을 위해서 잘 준비된 사람이겠습니까?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까? 교회의 직분자들입니까? 교회에서 전도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가장 잘 준비된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하면 단지 성경과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즉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자가 가장 하나님에 대해서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열매요, 결과물인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 일어나는 결과들을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오늘날의 교회가 그만큼 잘못된 위치에 서 있을 뿐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교회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으며, 교회의 잃어버린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교회는 세상을 흔들어놓았던 그 복음의 진리 그리고 그 능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프로그램을 더 도입하면 익숙한 종교 소비자들을 더 많이 끌어모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참된 신자들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 위대한 구원의 교리를 설명한 후에, 벅차서 더 이상 말할 수 없어하면서 하나님을 송축했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로버트 홀데인(Robert Haldane, 1764~1842)은 스코틀랜드의 귀족이었습니다. 1790년 경 회심을 체험한 후, 그는 재산을 다 팔아 유럽 선교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제네바를 방문해서 몇 청년들과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로마서를 연구했고 이 모임을 통해서 청년들은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중에, 탁월한 종교개혁 역사의 저작인 <16세기 종교개혁사>를 쓴 교회사가 쟝 메를 도비뉴(Jean-Henri Merle d'Aubign?)가 있습니다. 이 청년들이 사로잡혀있던 당시의 치명적인 자유주의 사상에서 어떻게 건짐을 받고 회심을 하고 변화하게 되었을까요? 바로 로마서 11:36절이 그 열쇠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바른 이해 그리고 그 경험이 그들의 삶을 온통 뒤바꿔놓은 것입니다. 이 청년들의 회심과 그에 이어지는 복음의 역사는 홀데인의 부흥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5.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 만큼은 인위적으로, 아무리 능력이 많은 목사나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더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엎드리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것, 우리는 무능하다는 것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교회와 성도의 삶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의 고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래 전 윌리암 스프레이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인용으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겸손해지며 자신의 무능함을 깊이 느끼는 곳마다, 또한 단순한 도구들로 사용될 마음을 가지게 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고 부요한 복락이 부어졌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적 감화의 필요성을 조금 밖에는 느끼지 못하고 자신감을 갖고 일하는 곳에서는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부지런히 수고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노력한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그들이 수고한 자취에 아무 것도 없는 비참함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가장 연약하다고 느끼는 순간과 여러분의 하는 일이 너무 큰 것 같아 보일때, 여러분의 가는 곳에 가장 무서운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소망의 다른 모든 원천에게서 떨어져나간 것 같을 때,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교리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수고하는 수고를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기뻐하십시오.” <참된 영적 부흥>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