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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종교개혁사경회 2010 (1) -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

열왕기하 17:33-4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11-08

말씀내용
설교 I - 김형익목사

1. 진리를 잃어버렸다는 말의 의미 제가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라고 했을 때,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 것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을 잃어버린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할 때, 그것은 교회가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물론 아닙니다. 교회는 거의 설교를 해왔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언제나 교회가 경험했던 위기인데, 복음의 진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있고, 설교도 있지만, 정작 교회는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이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사도가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면서,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을 때, 언급한 ‘다른 복음’은 있지만 진짜 복음은 잃어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2. 왜 ‘오직’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먼저 이번 사경회의 주제인 다섯 가지 솔라의 의미를 잠깐 다루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 솔라는 종교개혁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신학적 입장을 라틴어로 단순하게 표현한 말들입니다. 솔라(sola)는 오직(alone, only)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오직’이라고 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믿음, 은혜, 성경,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다 좋은데, 왜 거기에 각각 ‘오직’을 의미하는 솔라를 붙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A. 절반의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J.I.Packer). 구약 이스라엘의 예(왕하 17). 저는 먼저 제임스 패커의 말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전체를 가장한 절반의 진리는 완전한 비진리이다”라고 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적어도 복음의 진리에 있어서 절반의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오류입니다. ‘오직’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100%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본문입니다. 왕하 17:33에서,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라고 말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이주민들이 와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만” 경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왕하 17:36). 그리고 39절에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비단 외국에서 사마리아에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망하기 전,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고질적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B. 아무 것도 이 5 개념과 병렬로 세울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점에서 모든 형태의 혼합주의를 배격합니다. 여기 종교개혁 시대의 모토인 다섯 가지 개념들은 너무나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개념들과도 병행으로 놓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또한 이 다섯 가지는 서로가 너무나 깊이 연결되어있기도 합니다. 이 다섯 개념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중세교회가 이것들을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믿음, 은혜, 성경,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 않았던 때는 없습니다. 교회는 늘 이것들을 말해 왔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중세교회는 이것들을 말해왔지만, ‘오직’이라는 말을 거기에 더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타락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것들을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오직’이라는 말도 더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말로는 부인하고 있지 않지만 행위로는, 실제로는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날의 교회가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는 능력도 잃어버린다. 교회가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면 능력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북왕국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열왕기하 17장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함께 섬겼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에 망한 것입니다.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앗수르에 맞설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히브리 노예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애굽의 바로를 무릎꿇리는 역사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모든 거룩한 능력은 진리와 더불어, 진리를 통하여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주님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요 17:17). 왜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이적과 기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프로그램으로 저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오직 진리, 진리만이 사람, 거듭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능력이듯이(벧전 1:22), 믿음의 성장과 성숙도 진리를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벧전 1:21).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성경을 떠난 진리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주님은 설명해주셨습니다(요 16:13~14; 14:25~26). 진리만이 거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와 더불어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진리와 성령을 분리시켜버렸습니다. 진리는 무능력과 통하고, 성령은 이적과 기사와 능력에 관한 것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이 팽배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서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이적과 기사와 능력 행함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진리 없는 교회가 진리와 무관하게 행하는 모든 능력은 유사 능력이며, 거짓 능력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사단이 행하는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에게 속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 그러나 교회라고 불리우는 모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4.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의 포로가 되고 만다.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는 그러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고후 10:5). 교회는 세상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 대신, 세상의 모든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의 자명한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그 백성들은 다 앗수르의 다른 지역으로 사로잡혀갔다고 말합니다(왕하 17:23). 우리는 그 동일한 결과를 교회 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중 몇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종교개혁자들의 ‘오직’으로 표현된 다섯 가지 솔라에 맞추어 간단하게 표현해보겠습니다.

A. 오직 ‘지금 여기’, 오직 ‘이 세상’(세속주의) 첫째는 오직 ‘지금 여기’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위엣 것, 오는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악하고 저 세상은 선하다 하는 식의 이원론이 아닙니다마는, 그리스도인은 위엣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골 3:1).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빌 3:20) 이 세상에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벧전 1:1).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와 교인들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여기’ 밖에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세상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이들이 없습니다(벧전 3:15). 오직 ‘이 세상’ 뿐인 것 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세속주의입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철학이고 정신입니다. 신앙은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의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는 이렇게 세상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B. 오직 ‘나 자신’(인본주의, 주관주의) 두번째는 오직 ‘나 자신’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주어가 아닙니다. 모든 것의 중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의 경험,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예배도,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도, 교회도 다 이 기준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이 보여주는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통용되기 시작하였고,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목사들 자신까지도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를 대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본주의 종교는 결국 주관주의로 흘러가게 됩니다. 다 자기가 느끼는대로 행동하고 거기에는 아무런 기준이 없습니다.

C. 오직 모든 것은 ‘상대적’(상대주의, 다원주의) 그 결과가 상대주의 혹은 다원주의입니다. 이것이 세번째, 오직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설 자리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아니, ‘절대’라는 단어 자체를 사람들은 발작적으로 싫어합니다. 좋은게 좋은거다 하는 식이고, 모든 것에 대해서 관용이라는 잣대가 세워집니다. 이런 정신이 세상의 정신이고, 미국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저는 유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교회의 정신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관용이 복음적 사랑을 대치하는 현상입니다. 지옥에 가더라도 싫은 소리, 아니 참된 소리는 절대 금물입니다.

D. 오직 ‘돈’, 오직 ‘계산’(물질주의, 상업주의) 네번째는 오직 ‘돈, 오직 ‘계산’ 으로 표방되는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입니다. 주님께서 불가능하다고 한 것을 오늘날의 교회는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가진 재정 규모가 교회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가고, 교회 안에서도 계산이 믿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돈의 능력에 의해서 대치되었습니다.

E. 오직 ‘성공’(실용주의) 마지막으로 오직 ‘성공’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실용주의입니다. 세상은 다 성공을 지향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성공의 잣대는 세상의 잣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성실 혹은 신실함(faithfulness)을 성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순종하기 보다는 인간의 방법을 사용해서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정신이 교회에 가득합니다. 실용주의는 한 마디로 ‘꿩 잡는게 매다’하는 철학입니다. 잡기만 하면 되지, 진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용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추구하노라면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한 순종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공이 신실한 순종을 대신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5. 어디서 잘못 되었는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사를 잃어버렸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부터 이렇게 잘못된 길을 걷게 된 것입니까? 그 열쇠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식을 교회가 잃어버렸다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삶의 정신은 ‘오직 소비자를 위하여’라는 모토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나 감각이 없기 때문이고 그것이 그저 하나의 관념으로밖에는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교적 관념은 결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바,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선순위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관심사로 교회를 채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죄인이 어떻게 관계를 회복하는가 하는 것은 뒤로 밀려나버리고 행복한 결혼관계 세미나가 교회를 채웁니다. 결국 예배는 오락이 되고, 복음전도는 마켓팅이 되며, 믿음은 기술로 전락하고 성화는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고 신실함은 성공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종국은 하나님의 심판일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6. Sola로 돌아가라! 어떻게 돌아갈 수 있습니까? 복음 진리의 능력 앞에 죄인들이 무릎꿇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며 다시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의 증인이 되는 그런 과거 교회의 영광스러웠던 일들이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그 열쇠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felt need를 다루는 일과 종교적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주는 목회를 걷어치워야 합니다. 교회의 강단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지혜를 더 많이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식이 회복되면 경외감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 경외감은 일평생에 걸친 신자의 회개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말했던 일평생이 회개인 신자의 삶이고 교회입니다. 지난 2000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유서깊은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를 섬겼던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를 인용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이 다섯 가지의 신앙 고백 없이 참된 교회, 특히 오래도록 살아남을 교회란 분명히 없다. 오직 성경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성경적 복음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어찌 참되고 충성스러운 교회일 수 있겠는가? 이런 확신이 없는 교회는 그것이 무엇이건 결코 진정한 교회는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