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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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회 2011 (1) - 잃어버린 영광을 회복하는 사람들 - 잘못된 우선순위가 초래한 비극

학개 1:1-15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1-03-27

말씀내용
<학개 강해1: 잘못된 우선순위가 초래한 비극> 학 1:1~15
1. 학개의 전후 역사적 상황
BC 586 예루살렘 함락
BC 539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시킴
BC 538 고레스 원년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재건 허락
BC 536 첫 귀환자의 무리는 귀환하여 성전 재건의 기초(전 지대)를 놓음(스3:8-10)
BC 520 다리오왕 2년 학개의 소명?16년간 진행되지 못한 성전 건축의 속개를 외침
BC 516 다리오와 6년 12(아달)월 3일 성전 필역(스6:15)-성전봉헌
4년이면 지을 것을 20년이 걸려서 지었다.
BC 515 다리오왕 7년 1월 14일 유월절을 지킴
70년 포로기의 설명:
606 first invasion / 586 final invasion and destruction of the temple
536 first return / 516 temple finished
BC 458 아닥사스다왕 7년 에스라와 2차 귀환이 이루어짐(스7:7)
BC 445 아닥사스다왕 20년 느헤미야의 등장(성벽 재건)(느1:1; 6:15)

포로후기 선지자들
학개, 스가랴?두 사람은 성전을 짓지 않고 냉담해진 백성들을 향한 성전 재건의 메시지를, 말라기?말라기 선지자는 성전을 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문란해지고 형식화된 예배(제사)를 회복하기 위한 메시지를 전하였다.
*말라기 선지자는 성전봉헌(BC 516)이후, 에스라나 느헤미야 등장과 비슷한 시기이거나 이전(BC 458)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

2.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자들에게 임하다(1:1).
선지자 학개의 자세한 배경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 출신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고, 그의 이름의 의미가 ‘명절’이기 때문에 아마 명절에 태어났으리라는 추측만이 가능합니다. 다리오 왕 2년 6월 1일에 학개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때로부터 16년 전 예루살렘으로 1차 귀환한 백성들은 성전의 기초를 놓았었습니다(에스라 3:8~13). 하지만 성전 기초만 놓은 채 인근의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에스라 4장). 그리고 14년이 지났습니다. 학개 선지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백성들에게가 아니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총독인 스룹바벨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처음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부터 이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이 지난 14년 간 중단된 것은 이 두 지도자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가 이어서 보게 되지만 백성들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중하시고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실로 막중한 직무입니다. 이것은 결코 벼슬이 아니고 타이틀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약 3:1). 이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이런 교회 지도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지도자 자신에게나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또한 영적 지도자를 분별하는 것은 교회의 몫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지도자가 지도자 답지 못하고 그저 백성 중 하나와 같이 되는 현상입니다. 권위주의를 반대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 마저도 내어버리는 현상이 적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백성은 세움받은 지도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와 장로의 권위가 무너지면, 결국 그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권위가 무너지게 됩니다. 문제는 너무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면 신학교 가고, 신학교 졸업해서 목사안수 받고 여기 저기에 이력서 넣어서 목회자가 되는 것이고, 그저 얼마간 교회에서 성실하게 행하면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행태야말로 오늘날의 교회를 무너지게 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지도자 다운 지도자가 없을 때 교회는 영광을 잃게 되고, 백성들은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검증과 소명 확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세워진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지금 이 일은 지도자인 너희들 책임이다’ 하는 것과, ‘나는 먼저 지도자인 너희들을 상대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학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먼저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님의 교회에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두 분의 장로님들과 저는 두려움 가운데 이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8주 동안 주일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모두가 다 우리 교회에 걸리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책망도 들었고 칭찬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가 어떻게 머리되신 주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대로 가도록 할 것인가를 고심하고 기도하고 애써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이것이 지도자들에게 주신 책임이기에 그렇습니다. 또 이렇게 교회가 세워져가기 위해서, 우리 개인의 삶의 문제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백성들의 문제 1(1:2~4): 때에 대한 변명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이 백성’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조금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고 하셔야 정상입니다. ‘이 백성’이라고 하실 때에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기 힘든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섬겼을 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2). 말하자면,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A. 이유있는 게으름(1:2)
성전 건축을 아예 포기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앞으로 때가 되면 이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성전 재건의 막중한 사명이 맡겨져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변명이고 자기 정당화의 근거였고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지 벌써 16년이 지났고 성전건축이 중단된지도 14년이나 지났습니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이 사이에 그들이 지닌 옛 이상은 희미해졌고, 그들은 살이 쪘고 안락함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들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가 흐려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월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오랜 기간 연기하며 보내온 세월은 그들에게 무력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상이 사라지자, 그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들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 삶의 안락함이었고 이것들은 빠른 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면서 백성들의 삶은 분주해졌습니다. 해야할 일에 분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사느라고 분주해졌습니다. 수입을 더 얻기 위해서 그들은 더 많이 일을 해야했습니다. 소득이 적으니까, 경기가 나쁘니까 더 열심히 일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바쁜 중에도 언제나 ‘나중에 경기가 좀 풀리면, 여유가 좀 생기면..’이라고 말하면서 언젠가는 미루었던 성전 재건을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속이는 삶 속에 묻혀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학개 선지자가 부름을 받을 때의 백성들의 문제였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지도자들에게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시대를 읽어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지도자들이 되어가지고 그 백성들이 이런 식의 변명 속에서 자신들을 정당화하면서 사명을 잃어버린 채 자기 중심적 삶의 방식 속에 살아가도록 방치했는가 하는 것은 결국 지도자들의 책임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B. 잘못된 우선순위(1:4,9b)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시 학개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3). 이 말씀은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하는 것입니다(4). 하나님의 말씀도 때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백성들은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말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이 너희가 그러고 있을 때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지금 홈리스(homeless)로 계시는데 너희는 편안한 집에서 사는게 합당하냐는 뜻입니다. 그들은 상황이 어려워서 성전을 짓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전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잘못된 우선순위의 문제를 분명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우선순위의 문제는 바로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C.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1:5,7).
백성들에게는 어쩌면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없이 분주하게 살아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이 어찌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전은 전의 터만 닦아놓은지 벌써 14년째 방치되어 수풀이 우거졌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의 삶은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합당한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때론 우리가 이런 말씀 속에서 오해를 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사는 것이 싫으신가 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의 위험성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의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그들은 결코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면 그들의 부와 모든 누리는 환경은 그들 자신의 영혼에 저주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4. 잘못된 우선순위의 결과/증상(1:6,9~11)
A. 첫번째 증상: 불만족(6)
잘못된 우선순위로 살아간 백성들이 겪게 된 결과와 증상의 첫번째는 불만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열심히 했지만 수입이 적었습니다. 열심히 다니면서 먹지만 배부름 곧 만족이 없었습니다. 또 마시는데 목이 말랐습니다. 입어도 따뜻하지가 않았습니다. 일군이 월급을 받는데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는 것과 같이 어느 순간에 다 새어없어졌습니다. 돈을 벌기는 하는데 늘 모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문제는 바로 그들 자신의 깊은 불만족의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와 비슷한 것을 혹시 경험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으십니까? 불만족,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이 여러분의 가슴 깊은 곳에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이 문제를 돌아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불만족은 잘못된 우선순위와 관계가 있습니다.
B. 두번째 증상: 징계(9~11)
두번째 증상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백성들이 많은 수확을 기대하면 수확이 적었습니다. 또 적은 것이라도 집에 가지고 가면 하나님께서는 특이한 방식으로 그 적은 것마저 불어버리셨습니다. 하늘이 이슬을 그치고, 땅이 산물을 그치고, 한재(가뭄)가 임함으로써 그들은 풍성한 소출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재해가 모든 영역에 임했습니다. 땅, 산, 곡물, 새 포도주, 기름, 땅의 모든 소산, 사람, 육축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재해가 미쳤습니다.
5. 백성들의 문제 2(1:9b): 이기적 태도
하나님께서 도리어 이들에게 물으십니다. “이것이 무슨 연고뇨?” 너희 삶이 이렇게 무기력하고 능력없고 생기없고 참 만족이 없고, 살아야 할 이유와 재미를 가지지 못하고 의미가 없어보이고 마치 징계 받는 것 처럼 이래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황무하였지만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다!” 이것이 이유입니다. 여기 ‘각각’이란 말은 백성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빨랐다’는 말은 백성의 이기주의적 성향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는 그토록 빠르거나 열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에는 너무나 빨랐고 열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황무한 채 버려져 있지만, 자기들의 육신의 소욕을 채우는데에는 너무나 열심이었습니다.
6. 하나님의 처방(1:8)
성전을 지어야 하는 동기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어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이 걸려있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 넘어지는 것은 아주 고상하고 대단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아주 기본적인 삶의 이유와 동기의 문제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여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 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나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학개 선지자는 이 근본적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돌이키게 하고자 합니다.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이것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레바논에 있는 나무를 수입해다가 지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금은보화로 꾸미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앞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서 지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장 하라고 하십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하리라고 생각하던 백성들의 생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토록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되면,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그리고 썩어질 육체를 위해서 살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언젠가 오리라 하던 그 날을 보지 못한채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언제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7. 백성의 반응(1:12~14)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에서 우리는 네 가지 매우 중요한 요소를 보게 됩니다.
A. 하나님의 말씀
첫째는 하나님 말씀입니다(12). 백성들은 선지자 학개의 메시지의 기원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학개의 말을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보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스룹바벨, 여호수아, 그리고 모든 백성이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순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오직 순종입니다. 이런 영적 통찰을 가진 자는 복된 자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주님은 ‘귀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들만이 주님의 말씀의 진의을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인가, 아닌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의 출발점입니다. 결국 백성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기에 산으로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하나님께 바르게 반응하는 과정의 기초라는 사실입니다. 베레아 사람들의 반응은 실로 칭찬할 만한 것입니다(행 17:11).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많은 말을 이미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 김형익 목사를 통해서 주어진 말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는 여러분 각자가 판단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이제 숙제를 여러분에게 넘깁니다. 여러분이 판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판단하신다면 여러분은 순종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면 여러분이 거기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한 목사의 의견이라고 생각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을 향한 예배(12~13)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한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었습니다. 12절 하반절에, “백성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매”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입니다. 경외함이 없는 순종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종교인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경외감은 신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높여드리고 싶은 마음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 경외감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정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웁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주권,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이런 경외감은 우리의 기도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저 한낱 소원목록이 되지 않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예배와 찬양이 되게 합니다. 경외함은 언제나 예배를 가져옵니다.
C. 하나님의 약속(13)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13).” 우리의 지속적 헌신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지속적인 언약의 말씀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인도하고 끌고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함께 하시겠노라고 다시 약속해주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지치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일보다도 우리를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쳐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마”라고 약속을 주시면 우리는 다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그것을 경험한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도 하나님의 약속을 힘입어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말씀이 없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섬길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D. 하나님의 성령(14)
본문은 또한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14). 마음을 감동시키고 자극하시고 그들의 열정에 불을 붙이셨다는 말입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인간의 마음에 그렇게 하시는 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구별된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데 놓여있는 비밀은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전 건축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요인은 성령님께서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셨고, 감동시키신 사건입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이 없이 하나님의 일은 진행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열정, 인간의 의지에만 내어맡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선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믿음이 요구되고, 순종하는 의지가 있다고 하여도 그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과 예배의 심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며,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감화 감동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8. 결론
이제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의 상황,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삶의 잘못된 우선순위는 삶의 불만족과 하나님의 징계를 돌아보고 인정함으로써 다루어져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돌아볼 것을 명하십니다.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한 일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경험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쳇바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이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우선순위를 고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맡겨진 사명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어야 하는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우리가 지어가야 하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 신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과제요, 사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구별되고 거룩해져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 역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식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붙잡혀 살아가는 잘못된 삶의 방식,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열심으로 살아가느라고, 우리의 영혼은 정작 황폐해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을만큼 더럽혀져 있지만, 여러분의 육신, 몸을 위해서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으시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각각 자기 일에는 너무나 빠른데,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의 신앙 공동체가 세워져 가는 일에서는 유독 느리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수고를 얼마나 열심으로 감당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얼마나 가꾸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비만이 되고 움직일 수 없을만큼 게을러져 있음에도 여러분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느라 분주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잘못된 우선순위의 최우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우상입니다. 그 우상을 제거하십시오. 그 우상을 제거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자기 소위를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왜 열심히 일해도 만족이 없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황무하였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이제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아니면 김형익 목사의 의견을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신 분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여러분에게는 두려움과 떨림,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일어납니까? 그 경외감을 더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 경외감으로 순종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신실하게 약속의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이제 구할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우리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가 이 어두운 세상에 찬연한 빛을 비추게 해주시기를,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우리 자신을 써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합당한 반응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셨듯이, 오늘 우리의 마음에 그런 은혜를 베푸사 잃어버려진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역사를 이루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Sermon_Audio/RevivalConference2011/RevivalDay1AK110325_KimHI.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