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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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종교개혁기념주일 2018 -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백성

에베소서 2:1-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0-28

말씀내용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백성 (엡 2:1~10)
1.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은혜(롬 3:10~11)
기독교를 여타 종교와 차별되게 해주는 점은 무엇일까요? 복음은 다른 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과 어떤 점에서 차별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이해하십니까? 우리는 이것을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고 여타 종교는 본질적으로 행위의 종교라는 점에서 기독교는 여타 종교와 구별됩니다. 여기서 기독교 복음의 독특성이 드러납니다. 501년 전에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통하여 재발견한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루터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라고 말할 만큼, 여기서 기독교의 기독교됨을 찾았습니다.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전가시켜주신다는 것이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약간 다른 방식으로도 기독교의 차별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종교이고, 여타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라는 차별성입니다. 성경은 죄인인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종교의 시도는 인간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신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모든 특징은 한 마디로,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모든 종교와 구별되게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행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놀랍게 드러내는,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하여 주신 구원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은혜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은혜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에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모든 방식에서 적용됩니다. 만일 은혜라는 단어, 그 개념을 성경에서 제거한다면, 성경은 한낱 인간의 책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는 개념이자 실체입니다. 은혜를 제거하면 더 이상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제거하면 복음도 없습니다. 은혜를 제거한 기독교, 은혜를 제거한 복음은 기독교도, 복음도 아닙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이신칭의의 복음 (엡 2:1~9; 고후 5:10; 계 22:12)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교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신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죄인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죄인들이 행하거나 성취한 행위나 선행이나 업적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것이 이신칭의의 복음이 말하는 바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그 관점에 동의하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평가는 세상의 잣대로 재는 평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교양, 학식, 재산, 직위, 명예, 인격 등으로 평가하는데 익숙합니다. 우리를 치장해주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도 없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에는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본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규정하며, “그 때에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합니다(엡 2:1~2). 성경의 이런 판단은 인간의 자존심을 짓밟는 판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판단에 동의한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엡 2:4~8). 우리 안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어떤 장점이나 업적이나 성취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조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에 의하여’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엡 2:8).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엡 2:9).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리고 이신칭의의 교리에 의하면, 신자들은 이런 시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세상의 외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고 대하는 것에서, 그 사람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대하는데 점점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동시에,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를 우쭐하게 하거나 낙심하고 주눅들게 하는 모든 판단에서 자유함을 누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엡 2:9). 우리의 자연적, 세상적, 외적 시각이 변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자랑하지 않는 것, 이런 것이 은혜를 받은 신자의 삶과 태도의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온 인류는 모두 예외없이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설명드려야 합니다. 인간은 책임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3. 믿음과 행위를 나누는 새로운 관점 (약 2:10; 고전 15:10; 민 23:19)
분명히 우리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금 전에 읽어드린 구절들이 말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위로 판단하시고 심판을 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하지만,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는 문제다. 그리고 우리의 의로움에 대한 최종 판단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다 살고나서 우리가 행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있게 될 것이다.” 라는 설명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니,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하심은, 일단 의롭다고 가정하고 나서, 그가 인생 전체에서 이룬 행위를 보고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얼마나 의로워야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만한 의로움일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의 말씀을 볼까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이런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그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만일 우리의 구원이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과연 은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대로 갚아주신다거나 심판하신다는 말씀에서 우리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믿음으로 행한’, ‘믿음이 유발한’, ‘믿음이 만들어낸’ 행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은 믿음과 무관한 행위가 아니라, 모두가 믿음과 연결된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결점과 흠이 가득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으로 행한 것을 보시고 은혜로운 판단을 하시고, 그 행한 것에 따라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 사도가 고백하였듯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고백입니다(고전 15:10).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선한 행위 중에서 믿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며, 이 믿음 조차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이신칭의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그믿음 조차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은혜로 거저 주신 선물이지만) 우리를 영원히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법정에서의 최종 판결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후회함도 없으십니다(민 23:19).

4. 아브라함이 얻은 칭의(롬 4:1~5; 창 15:1~6)
로마서 4:1~5을 보지요. 로마서 3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설명한 사도 바울은 4장에서 그 예로 구약의 아브라함을 들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는 이의를 달 수 없는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1절에 “그런즉 육신으로는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한 말은 아브라함이 얻은 것, 발견한 것, 깨달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나가는 것은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창세기 15:6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식을 기대하기 힘들만큼 나이가 든 아브라함에게 상속자 아들을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십니다(창 15:4). 그리고는 밤하늘의 별들을 가리키시면서 뭇별을 셀 수 없듯이, 자손을 이렇게 많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창 15:5). 이제 창세기 15:6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여호와을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구절은 신약의 서신서에서 본문을 포함하여 갈 3:6과 약 2:23에서 모두 세 번 인용된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예를 사용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 삯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로 여겨질 것이 분명합니다(롬 4:4). 의인에게는 은혜가 주어질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당연히 받아야할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을 하지 않은 사람, 게다가 경건하지도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오직 그의 믿음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신칭의의 복음은 오직 은혜로만 설명되고, 이것이 복음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알아주실만한 일을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고, 일편단심 죄와 악을 행하였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를 좇아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지옥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야할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신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의롭다고 선언해주셨습니다. “다음에 네가 사는 것을 보고 나서 다시 한 번 최종적인 판결이 있을텐데, 일단 지금은 잘 했으니까 앞으로도 최종 판결에서 낙방하지 않도록 열심히 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이 방법으로써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5. 은혜만이 은혜로운 백성을 만든다(엡 2:7,10).
이제 의롭다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감사와 기쁨, 사랑과 은혜에 겨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여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언젠가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본문 10절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통과하기 위해서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은혜를 거저 주심으로써 우리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를 은혜롭고 선한 백성이 되게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맥락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증거하는 논지입니다.
본문 7절을 보지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은혜를 맛본 자가 은혜를 말할 수 있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맛본 자만이 은혜로울 수 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을 닮은 은혜로운 백성이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섬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은혜를 경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맛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닮아 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섬함을 나타내고 사십니까?

6. 교회의 현실
이 말씀 앞에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보지요. 물론 우리 벧샬롬교회를 생각하셔도 되고 오늘날 한국교회 전체를 생각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로운 백성입니까? 그런 명칭으로 규정될만큼 은혜롭고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드러냅니까? 믿는 우리는 늘 이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긴장을 자기 마음대로 떨쳐버릴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한편으로는 은혜의 복음, 이신칭의의 복음을 온전하게 선포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강단을 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은혜의 복음을 너무나 잘 전하고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은혜로움을 찾아볼 수 없음에 한탄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그 구원을 유지하고 마지막 날 심판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언약을 지키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적지 않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데에는, 한국교회의 윤리 부재 현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온전한 행위를 회복해보려는 시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가 전했던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는 오직 은혜만이 은혜로운 백성을 만든다는 전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에 아무 것도 인간의 행위를 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예수 그리스도의의 십자가 공로와 의 외에,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도 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드러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하지 아니한 자, 경건하지 아니한 자의 믿음을 의로 여겨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은혜를 입은 사람을 절대로 이전과 같은 기질과 성향으로 살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변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고 은혜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은혜받은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경의 교리와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 같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롭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이 옳습니까? 우리는 바른 교리를 배우고 있기에 모두가 옳습니까? 우리는 훌륭합니까?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우리는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고 교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는 사람이고 교회입니까? 우리에게 교만함에서 나오는 자랑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은 종교개혁 501주년을 기념하는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많은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특별히 마르틴 루터나 존 칼빈이 말했던 것은 분명히 바른 교리이고 바른 말씀이었지만, 그들이 말했던 것은 언제나 은혜, 은혜,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맛보고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를 말했습니다. 그들의 언어와 사상에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처방이었습니다. 이 은혜는 이신칭의의 복음 안에서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설교와 글과 책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설교와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경험하기는 커녕, 도리어 더 나빠지고 이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고, 이들을 대적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습니다. 은혜를 받고 받지 못하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큰 차이로 나눈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 은혜를 받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이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심령은 자기 인생에서 영적 파산을 인정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은혜를 받아 누립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계십니까?

7. 은혜를 절박하게 구하는 사람들
여러분, 은혜와 유리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목표가 단순히 지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성도의 목표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 일은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으로 알고 경험할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닮도록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여러분, 복음에서 은혜를 제거해보십시오. 거기에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주의만이 남습니다. 율법에서도 은혜를 제거해보십시오. 그렇다면 거기에는 복 없는 저주 외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요,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고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볼 줄 아셔서 나같이 괜찮은 사람을 구원하셨구나 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신뢰하십니까? 자기 확신, 자기 신뢰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칼빈의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로우심을 제대로 알게될 때까지는, 결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 충분할만큼 깊이 영향을 받거나 감동을 받지 않는다.” 과연 그렇습니까? 공감하십니까? 여러분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것을 반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은혜를 받고 사십니까?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주의 백성과 함께 나아갈 때에, 절박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함량미달이며, 결핍된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지만 은혜롭지 않은 설교자는 아닌지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여러분은 은혜의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혹시 비판의 칼날만 세우는 신자들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고, 그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존재로 살아갈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우리는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이것이 복음, 은혜의 복음이 없는 죄인의 비참한 실존이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어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를 위하여,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의 피로써 우리를 죄와 흑암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오직 이 은혜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은혜로운 백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은혜가 일을 합니다.
은혜를 받읍시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다.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알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게 나타내는 복을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