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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하나님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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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정 (10) - 기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시편 50: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1-07

말씀내용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기도에 관한 책 가운데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P.T.Forsyth가 쓴 <영혼의 기도 The Soul of Prayer>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참 신앙이란 기도로써 능력있게 표출되는 신앙이다.”
기도에 대한 설교는 쉽지 않습니다. 자칫 왜 기도하지 않느냐하는 죄책감을 주기가 쉬운데 오늘 이 설교 말씀이 그런 반응보다는 여러분 안에 기도하고 싶다는 열망을 여러분 안에 일으킬 수 있다면 그보다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 안에 주시기를 구합니다.

기도는 신앙의 지성소다.
신앙생활은 본질적으로 속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신앙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가 매우 쉽다는데 이 속임의 요소가 더 강하게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조만간 이 주제를 주일아침의 성경공부 시간에 다룰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의해야 하는 핵심적인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데 익숙해있지만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마음)을 보시고 사람을 판단하시므로 속지 않으시는 분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삼상 16:7).

우리가 이 마음의 문제, 내면의 문제를 다룰 때 신앙생활의 핵심적 요소가 되는 것은 기도이며, 기도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수많은 외양들로 둘러싸여있습니다. 예배나 성경공부 참석하는 것, 헌금생활?이것도 숨겨진 것 같지만 상당 부분은 노출이 됩니다?또는 교회봉사하는 일 그리고 신앙적으로 말하는 태도나 그 말 등은 모두가 외면적인 것입니다. 빌 하이벨스가 쓴 책의 제목이 말하는대로,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Who You Are When No One’s Looking >(IVP) 이것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인격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우리가 하는 행동이다”라고 어떤 이는 말했습니다. 물론 이 책은 기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결코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처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아갑니다.

첫번째로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인식이 매 순간, 매 시간 있으십니까?
두번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도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대답을 하신다면 여러분은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NO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기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은 하지만 기도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대답 안에는 모순이 있게 됩니다. 모순을 피하는 유일한 대답은 ‘불신’이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신의 존재는 인정해도 나는 그 신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와는 아무런 인격적 관계도 없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앞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신다면 여러분은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앞에 언제나 계시는 분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의 반증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머리로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기도를 하게 만드는 요인(동인)이 있는데 첫번째로 말씀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이나 성경공부 또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적 만족으로 끝나거나 설교를 들은 감동의 일희일비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성소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굳이 비유컨대 말씀이 성소라면 기도는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서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보고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고후 3:18).

어떤 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도는 신앙의 지성소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지성소는 가장 깊은 곳입니다. The holy of holies 라고 표현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과 나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정직해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우리를 완전히 들여다보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가장 큰 적, 위선
그렇다면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이 내면의 활동인 기도는 없는데 외면적으로는 신앙의 표현들이 많이 드러나게 되는 위선입니다. 이것은 상당 부분 의도적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죄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5). 그러나 참된 기도는 결코 외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만큼 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점에서 얼마나 자기들의 내면을 감추는 울타리를 꼭꼭 걸어잠그고 있는가, 아니면 그 성을 허물고 내면의 솔직함을 가지고 만나는 자유함이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영적 성숙과 성장을 촉진하는가, 위선을 촉진하는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가 우리의 기도생활의 실재를 나눌 수 있는가가 우리 교회의, 코이노니아의 질을 가늠하는 한 요소라고 봅니다. 기도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기도를 경험하느냐가 나누어지면 좋겠습니다. 억지로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그것을 시작하고 함께 기도하다 보면 우리는 자유함을 더욱 누리게 되고 영적 성숙을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우리가 점잖은 수준에서 목사와 교인으로 만나게 된다면, 그리고 교인과 교인으로 만나게 된다면 우리가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인 기도에 대해서 나눈다는 것은 불편하고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런 수준에 우리의 만남을 제한시켜놓고 간다면 평생을 교회생활을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전혀 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는 거짓의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인간으로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는 이런 종교인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의 종교적 외식을 너무나 분명하고 강하게 드러내셨고 또 책망하셨습니다. 비록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지성소를 드러내게 된다면 우리는 그 댓가 이상의 축복된 결과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기도하게 되는 날은 환난날이다.
보통 우리가 기도하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환난날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환난이 없으면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절박함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여기에 두번째 기도의 동인이 있습니다. 환난입니다. 외적 필요가 내적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환난날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환난이 오고 절박함이 있다고 해서 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의 아사 왕은 비록 중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어도 여호와께 구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대하 16:12).
대하 16:12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이후에 아하스 왕도 주변의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앗수르의 도움을 구했지만 앗수르가 도와주기는 커녕 도리어 더 힘들게 압박을 하는 곤고함을 만났지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도리어 더욱 범죄하였습니다(대하 28:22).
대하 28:22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곤고함이나 환난 그리고 절박한 상황도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은혜로 다룰 수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다는 것도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를 거스리고자 하는 우리의 자연적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사와 아하스의 예입니다.

환난의 일차적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롬 5:3,4). 이것은 매우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이것을 체험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환난 속에서 인내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사람들은 여러 경로로 주님을 믿게 되지만 적지 않은 분들은 인생에서 일어난 환난?내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한계상황?을 통하여 하나님께 처음으로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며 믿음으로 나오게 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실로 이런 환난은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 기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변장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환난은 그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환난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곤 합니다. 그리고 또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날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까지 우리의 삶에 간섭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 중 하나가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환난이 오래 가거나 반복되도록 하시는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환난이 기도하는 즉시 제거된다면 우리의 기도는 삶으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접착제로 두 물질을 붙일 때 밖에서 한동안 압력을 가해야 하듯이, 우리를 계속해서 누르십니다. 기도가 내면의 습관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말입니다.

물론 위에 언급한 아사 왕이나 아하스 왕처럼 어떤 때는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환난날에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결국에는 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환난은 다시 그 목적을 이룹니다.

환난의 일차적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부르라’라는 표현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실 환난 속에서 부르짖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좀 들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그의 저서 <고통의 문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라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떠나서 일어나는 환난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환난은 다 예외없이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선하신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환난을 사용하시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어떤 분에게 일어나는 환난은 정말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환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환난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지금 환난이 닥쳐 있거나, 혹은 언젠가 여러분의 인생에 환난이 찾아올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큰 환난을 통해서 무엇을 하시려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 질문을 어디에 던집니까? 하나님께 던지는 것입니다. 환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 바로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고통 중의 부르짖음이며, 환난 중의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능하신 분께 계속 부르짖습니다. 이 환난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말입니다.

부르짖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결국 환난날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됩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그렇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명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는 행위 자체가 ‘나는 할 수 없고, 다른 이도 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이 환난에서 나를 건지실 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지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여러분이 환난을 만났든지 일상 속에서든지 하나님께 부르짖는 삶을 사신다면 그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기도하는 자가, 그리고 그의 기도가 하나님을 이미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내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신뢰한 자에게 그 선하심과 능력을 입증해보이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보통 들을 수 있는 간증들에서 초점을 맞추는 대목은 바로 ‘기도했더니 응답하셨습니다’하는 이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기도한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래서 자칫 선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는 수단 혹은 행위를 신뢰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로 기도하여 응답받은 경험에 토대를 둔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되기 보다는 기도를 향한 믿음이 되기가 쉽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말을 쓴 액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나쁜 말은 아닙니다마는 언급한 우리의 실수가 일어나는 대목인 것입니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만사를 변화시키시는 능력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나는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고 너는 안 믿으니까 구원을 못받지 하는 식으로 오해하게 하는 것과 같이, 나는 기도해서 응답받아 잘 되는데, 너는 기도하지 않아서 응답 못받고 못 살고 있다는 식으로 되기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잘 됨이 모두 믿고, 기도한 나 자신에 기인한다는 오해를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의 생각이나 표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는 심히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며, 그분은 그분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기쁘게 보시고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 자신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가?
하나님의 본성 가운데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베푸시는 분이시며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아들을 주신 이상 못 주실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롬 8:32).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그에게 큰 민족과 위대한 이름과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1~2).
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의 기쁨 가운데 정말 큰 기쁨은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기쁨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렘 32:40~41).
렘 32:40~41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베푸심을 주시는데 사용하려고 정하신 수단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베푸심을 경험하고 누리게 되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더욱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그분을 즐거워하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필요한 것을 얻는 자동판매기(vending machine)가 아닙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기도는 우리를 기쁨에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어린 초청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이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를 기뻐하실지라도 그것을 기도를 통해서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신지를 알게 하시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 결과 우리는 세상에서는 얻을 수도 맛볼 수도 없는 기쁨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로 계획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여 주시고 우리를 벗어나지 못할 환난에서 건져내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기쁨이 충만해지게 되고 더욱 그분 자신을 향하여 이끌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시인은 앞의 3절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신뢰하고 그것을 자기 식물로 삼으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시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이런 기쁨어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들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뻐하지 않는 분과는 사귈 수 없습니다. 아가서야말로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구구절절이 표현한 가장 아름다운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 2:14)
이런 사랑어린 초청을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얼굴을 보고 싶고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주님의 음성을 아침마다 밤마다 들을 수 있다면 그보다 즐겁고 복되고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기쁨을 누리는 자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시인은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절정입니다.

여러분, 이 찬송의 가사를 기억하십니까?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시며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사랑은 알 사람이 없도다” (C.A.Miles 찬송가 499장)

아름다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어린 초청에 응답하여 작사자는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님과 함께 있을 생각을 합니다마는 괴론 세상에 할 일이 많아 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소명 앞에 응답하며 길을 나섭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을 이해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갈망, 이런 소원을 불러 일으켜주시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하여 비로서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그 부르짖음을 통해서 우리는 환난 너머에 계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그분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거하는 삶의 기쁨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까? 경험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분께 부르짖으십시오.
환난 너머에 계시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를 떠나서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십시오(요 15:5).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기도로, 기도의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