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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하나님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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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정 (9) -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빌립보서 1:20-2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6-12-31

말씀내용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빌 1:20~26



오늘 우리는 2006년의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을 맞았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비록 받아들이기 유쾌하지는 않아도 자명한 것입니다. 오늘은 마지막을 생각하기에 좋은 날임에 분명합니다. 독일의 신학자였던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우리 모두는 섣달 그믐날 큰 소리로 떠든다. 마치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신앙을 반영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 큰 유익을 주는 일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대하게 하는 요소는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많은 시대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데 익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어느 날 우리 모두에게 천천히 대개는 갑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올 때에 우리가 미소로서 그것을 마주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문해야만 하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죽음을 깊이 생각, 묵상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몇 번 사용되고 있습니까? 세 번입니다. ‘죽든지’(20), ‘죽음도’(21), ‘떠나서’(23) 라는 단어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정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와 느낌 여하가 우리의 지금의 신앙을 반영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마지막을 주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죽음은 결코 유쾌한 일일 수 없고 두려운 것이 되기도 합니다. 유쾌한 일일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이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로서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통이요, 슬픔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또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도 슬프고 두렵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함은, 우리를 수식하고 치장해주는 외면적인 모든 것들을 다 벗어버리게 되는 순간을 생각할 때 비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되는 모습은 벌거숭이와 같이 서게 된다는 사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지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볼 때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두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죽음 자체를 환영할 만한 것으로 결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말해주는 죽음에 대한 정의와 태도는 사뭇 다른 것이고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죽음을 환영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태도를 주목해 보십시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 사도에게는 분명한 욕망, 욕심,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사느냐 죽느냐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가 더욱 원하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더욱 좋은’(훨씬 좋은)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크게 중요하다고 여길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듯이 내가 살아야만 내 가치를 실현할 수 있고 뭔가를 할 수 있으며, 무조건 일단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살아도 죽어도 그 삶과 죽음을 통해서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길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만드는 삶을 살고 싶어했으며,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죽음을 죽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거나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며 중요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우리 자신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며,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마치 거울을 보듯이 바울 사도의 고백에 비추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한가하게 앉아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감옥 안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풀려나지 않는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와서 다시 살게 되는 것과 여기서 그의 인생을 정리해야만 할 두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삶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21절에서 말합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내가 20절과 같이 말하는 까닭은…’하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이다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바울 사도는 갈 2:20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입니다. 더 이상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사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그 사실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죽음이라는 것은 그로 하여금 더 나은 상황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3절).

그는 이어서 ‘그래도, 많이 양보해서, 내가 살아야만 한다면’ 이라고 말합니다(22절).
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당연히 내가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 23절에서 바로 자기의 선택을 밝힙니다.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삶과 죽음 이 두 사이에 내가 끼어있는데 내게는 ‘(육체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선언합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좋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매우 강하게 죽음을 얼마나 더 선호하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욕망’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죄의 정욕을 의미할 때 사용되는 매우 강렬한 단어입니다. 참을 수 없는 욕구입니다. 바울은 너무나 원하고 있습니다. 죽기를 말이지요. 또, ‘더욱 좋으나’(very much better?NASB)라는 표현은 비교급 부사와 비교급 형용사를 같이 쓰면서 바울 자신이 얼마나 죽음을 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강렬하게 원하고 원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도 말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러나 바울 사도는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자신이 이 땅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24절에 말합니다.
빌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고 말입니다. 유익하다는 표현은 앞 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강렬한 욕망과 비교할 때 단지 이것은 원해서라기 보다는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5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빌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바울 사도가 죽음을 그토록 원하지만 살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이 진보하도록 그리고 그들의 기쁨을 위하여 내가 더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26절도 이것을 더욱 부연합니다.
빌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존재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기쁨을 넘치게 할 것입니다. ‘자랑’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입니다. 영광스러운 기쁨을 의미하는 자랑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기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뿌듯한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존재 때문에 말입니다.
이상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환영해야 하는 이유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특별히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특별히 사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읽는 태도입니다. 아니, 사도에게 적용되는 모든 진리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성도들에게도 바울 사도와 동일하게 죽음을 환영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성도들에게 죽음을 가르치는 방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실상 죽음의 공포가 근본적으로 제거되었습니다. 비록 죽는 것의 유쾌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죽음을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표에 있는 약속으로 보아야 한다. 죽을 때 신자의 몸은 거룩함에 있어서 온전하게 되고 하늘의 예배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화를 얻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결과로서 저주의 성격을 지닌 죽음으로부터는 완전하게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죽음이라는 통과의례를 지나서 사랑하는 구주의 품에 안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성도들이 두려워해야할 모든 이유는 제거되었으며 오히려 죽음을 환영하는 자리에 까지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한 가지 이유는 죽음 이후에 도대체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도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몸은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고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도 않고 자지도 않음) 불멸이므로 이를 주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이 때에 완전히 거룩해지며 최상의 하늘 속으로 영접된다. 이 곳에서 그들은 빛과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몸이 온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 연옥으로 가서 다시 기회를 가지게 된다거나 다시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가르치는데 이런 것은 성경적인 설명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죽은 후부터 부활 때까지 무의식으로 들어간다고 보는 견해도 비성경적입니다(눅 16:22; 23:43; 빌 1:23; 고후 5:8; 계 6:9-11; 14:13). 성도는 죽을 때 의식적인 관계와 기쁨과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도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은 몸과 영혼의 분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옷을 입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보다 더 좋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 때에 몸이 부활하여 우리가 영화로운 육체를 입게 될 때일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최상의 상태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최고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후 5:4~5).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생각하더라도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너무나도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 이후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우리 몸이 다 부활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믿은 성도들에게는 영생의 심판을 통하여 완성된 천국을, 그리고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어 영벌의 지옥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반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실을 우리가 성경적으로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죽음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성경적 이해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적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이 됩니다.
천국은 무한하셔서 결코 다함이 없으신 하나님 안에서의 점증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천국은 하나님 안에서 점점 더 큰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끝없이 점점 더 발견해가는 곳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주심이 너무나 완전하게 만족된 나머지 더 이상 줄 기쁨이 없다고 하실 수 있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며, 우리 자신이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도 결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천국에서도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성삼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천국은 결코 정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고 기뻐하기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그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셨다고 말합니다. 지옥은 무한히 영광스러운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거룩한 진노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의 가치를 입증하시는 곳입니다. 지옥은 말할 수 없을만큼 현실적이고 의식이 있으며 무섭고 영원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제 만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영원토록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는 둘 다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25:41, 46; 살후 1:8~9). 그러나 근자에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지옥의 존재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불신자들의 영혼을 멸하시고 지옥도 없애실 것이라는 이론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울 뿐 아니라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존 스토트 목사님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은 성경적으로 결코 지지받을 수 없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천국과 지옥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그들의 영원을 다함이 없는 기쁨 속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문에 들어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는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국문에서 천사가 말하기를, 네가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존재인지 내게 입증하라고 도전할 때,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만이 우리를 천국문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자격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면,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그림자가깃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라면 우리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죽음도 유익한 것이라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죽음이 유익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분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빌 1:21).

저는 잠깐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을 죽었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리차드 로버츠(Richard Robarts)라는 36세의 나이에 폐병으로 죽은 두 세기 전 영국의 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내 기침은 무서웠고 내 가슴과 옆구리가 너무 고통스러웠다……수일 후 찬란한 영원 가운데서 그와 함께 있을 것을 믿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내 아내와 친지들을 위해서는 더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랬다. 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난 자네가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을 기뻐해야겠지.” 그날 하루종일 그는 하늘의 기쁨의 환상을 체험했다.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찼고 찬양과 안위와 승리의 말을 하였다. “오, 난 나의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 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난 영원히 그를 소유할 것이다. 황금길이 깔린 천성, 새 예루살렘,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죽음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이런 죽음은 어떤 특별한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을 준비하라.
그 날을 준비하고 사십시오. 청교도들은 인생을 죽음으로 들어가는 예비학교나 탈의실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이 땅의 삶이 모든 부를 다 준다고 하여도 결국 우리가 천국을 준비하는 예비학교이며 옷을 갈아입는 방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가르쳤고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사는 것을 배우는 첫 단계로 생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시편 기자는 73편에서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4~26)
우리는 하늘의 유업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늘과 이 땅을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그곳이 훨씬 더 좋은 곳임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카드(Michael Card)라는 잘 알려진 크리스천 음악가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그가 쓴 <동행: 진정한 멘토에 관한 이야기>(죠이선교회)에 소개한 것입니다. 그는 어느날 신학교 시절부터 멘토로 모시는, 신학교수 윌리엄 레인(William Lane)으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참고로 윌리암 레인은 신학계의 뛰어난 신약 학자였습니다. 그는 마가복음에 대한 매우 훌륭한 주석을 남긴 분으로 특별히 알려져 있습니다. 마이클의 멘토인 윌리암 레인은 워싱턴 주에 있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자기가 복합골수암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개월 후 사모님이 다시 전화를 해서 제자가 있는 테네시의 내쉬빌로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윌리엄 레인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난 자네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죽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이사온 후 1년 반동안을 제자와 동행하다가 윌리엄 레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윌리엄 레인과 같은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누군가는 먼저 하나님께로 가게 될 것이고 나머지의 사람들은 먼저를 그를 하나님께 보내야 할 것이다. 누가 먼저 떠나는 사람이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죽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저는 죠이선교교회에 부임한 첫 날 아침 성경공부 시간에 이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죽음이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죠이선교교회의 첫번째 장례식을 치루게 될 것입니다. 저의 목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다면 그 장례식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장례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땅을 믿음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에 속지 마십시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 뿐입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에 새벽기도회에서 상고한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그것은 ‘큰 성 바벨론’일 뿐이며 하루 동안에, 그리고 일시에 망할 운명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 되는 한, 그것이 여러분의 주목을 끄는 한, 여러분은 결코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즐거워하십시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그리고 부귀영화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가장 즐거워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주는 것들로 인하여 만족을 느끼는 대신에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과 그 분과 사귀어 사는 삶 속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십시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이 이렇게 살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삶만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순서가 있었을지라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은 그 순서대로가 아니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들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아직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죽어서 내 영혼이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그리스도께 여러분을, 여러분의 영혼을 맡기십시오.

여러분은 죄인일 뿐이며, 죽음을 통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믿으며 주님의 자비로우심 앞에 영혼을 부탁하십시오. 자비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여러분의 주변에 사람들에게 고백하십시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고 사는 자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다가 모든 죄악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운 영원한 삶으로 기뻐하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께서만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