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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하나님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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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정 (8) - 주여, 우리에게 설교를 주시옵소서

고린도후서 3:18~4: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6-12-24

말씀내용
주여, 우리에게 설교를 주시옵소서.
고후 3:18~4:6



이 주제는 어느 목사의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설교자와 목사로 부름을 받은 저 자신의 기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하였습니다(8:11). 실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런 시대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풍성한 영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는 성도들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면 그것처럼 복되고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직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혹은 교회생활을해오면서, 이중에는 모태신앙도 있을 수 있고 그 후에 이민오셔서 교회로 인도되어 오늘까지 오신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마는,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만나셨습니까? 그리고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분을 만나면서 살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분처럼 여러분의 삶은 변해왔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참 성도들은 다 변화되기를 갈망합니다. 만일 이런 갈망이 없다면 우리가 거듭났다고 하는 증거를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이 더욱 매력적이고 그 아름다우심에 우리의 마음이 점점 더 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이야기는 생소할만큼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분이요, 가장 사귀기를 원하는 분이요, 가장 흠모할만 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분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며, 분명히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특이한 말씀으로 이런 영적 변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3:18을 보십시오. 여기 본문에서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결코 후일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새언약의 새로운 시대에 적용하는 말씀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본다’는 표현을 이렇게 썼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경은 매일 하나씩 적용을 열심히 하다보면 우리가 어느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나 자기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방법일 것입니다. 복음은 또 하나의 종교도 아니며, 자기개발 프로그램은 더더욱 아닙니다. 의지를 발동하여 일사각오로 살면 변화할 것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성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봄으로써입니다!

주의 영광을 볼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율법주의적 태도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그 얼굴에 그 영광을 반사하는 빛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얼굴에 수건을 쓰도록 하셨는데 왜 그랬습니까? 3:13의 설명을 보면 그 영광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는 빛이었기 때문에 그 영광이 사라지는 결국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얼굴에 수건을 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영광의 빛은 결코 쇠하지 아니하며 없어지지 아니할 영광의 빛이라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은 그 영광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은 도대체 ‘그 영광이 뭐냐’고 질문하시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이란 시리즈로 벌써 8번째 설교를 하고 있는데 여전히 그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내게는 와닿지 않는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에 대해서 알거나 모르거나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영광을 보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영광에 대하여 알지 못하거나 보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그분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온전하심의 광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온 세상에 알리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이 알려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도 바로 그 영광과 그 이름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제국에서 망하게 하시고 다시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도 바로 그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드려지게 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시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영광을 드러내시려 하심입니다. 마침내 역사의 끝에는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하박국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합 2:14).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했습니다(고전 10:31). 우리는 그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알고 계시고 그러기에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완벽하게 나타나시는 성자 하나님안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아시며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고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지식과 기쁨을 우리 안에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일서 4:8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무한한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쁨과 만족을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희생시키는 대가를 지불하시더라도 우리 죄인들과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봅니다.
말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고 그 근거 위에서 우리는 그 영광을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라는 표현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4:2에서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라고 했습니다. 많은 거짓 교사들은 언제나 말씀을 혼잡케 하였습니다. 말씀에 다른 것을 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자신은 언제나 ‘오직 진리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A.W.Tozer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에 물을 타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이 독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죽일 수 없게 되었고, 약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칠 수 없게 되었다.”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4:4을 보십시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오직 유일하게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거나 설교되지 않는 곳에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설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설교(preaching)는 그저 대화가 아닙니다. 설교는 강연이나 강의 혹은 그저 가르침도 아닙니다. 토론도 물론 아닙니다. 복음은 메시지입니다. 설교는 이 메시지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로우심의 감각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포(heralding)는 왕이 무엇인가를 백성들에게 포고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는 복음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허락된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무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들음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복음을 들음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21을 보십시오.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분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NIV?he revealed himself to Samuel through his word)
말씀을 통해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무엘은 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 사건?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은 나머지 사무엘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열쇠입니다. 사무엘게만이 아니라 이것이 모든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열쇠라고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의 주요임무는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목사의 임무가 있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목사는 설교자입니다. 목사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 복음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해야 하며 그 영광을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이 영광스러운 직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살고, 이것을 위하여 무릎을 꿇으며, 이것을 위하여 어떤 댓가도 지불하겠다는 자세가 바로 목사가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단지 여러분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죠이선교교회의 목사요, 설교자로 부름받은 저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에게는 가장 무서운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그 어떤 것과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의 주요임무는 설교를 막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기 위해서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하는 수많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교마다 목사를 하겠다는 학생들로 넘쳐나는 것도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마다 어마어마한 예산으로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짓게 만드는 일도 막지 않습니다. 선교비도 올리고 선교를 열심히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귀의 주요임무는 오직 유일하게 설교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건물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그리고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마귀는 하나만 방해하면 자기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교활하고도 똑똑한 존재입니다. 마귀는 오직 설교 하나만을 방해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합니다. 4장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복음과 복음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설교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없습니다. 이것이 중세말 마귀가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도록 설교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이었습니다. 그들은 신학자들이기 이전에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만드셨습니다. 복음이 회복된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말입니까? 바로 설교를 통해서 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멸망할 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어서 그들은 결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죠이선교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동안에 우리가 가장 힘써 지켜야하고 기도해야 하며 싸워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복음을 듣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며 그럼으로써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가 아니면 어디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를 기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을 봄으로써 우리가 누리게 되는 기쁨과 만족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선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라는 말에서 표현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가 보통 알고 누리는 기쁨이라는 것은 정말 너무나 가볍고 너무나 얄팍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또한 더욱 슬픈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원하는 설교는 성경에서 오늘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보다 유머러스하고 보다 재미있으며 좀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짧은 설교를 원합니다. 그들은 잠시 괜찮은 이야기를 즐기다가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일주일을 열심히 고단하게 지내고 나서 주일에 교회에 와서 그렇게 심각해지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약간의 기분전환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목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설교에서 복음의 요소를 제거시키려고 하는 마귀에게 동조하거나 복종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면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과 영원에서 가진 최고의 보화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7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리는 이 보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던 우리의 보배들을 더 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는 삶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 보배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 세상에 그리고 복음을 듣지 못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아낌없이 우리의 옛 보화들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애써서 헌신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참 보배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의 삶 안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한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죠이선교교회의 목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역을 설교라는수단을 통하여 감당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들으며 복음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저의 삶을 드리려고 합니다. 결코 목사로서 저에게 이것보다 더 크고 고상하며 영광스러운 소원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설교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설교입니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웁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로서 지탱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사상이나 유행하는 철학이 아니라 성경본문을 설교할 것이고, 복음을 설교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복음이 가진 메시지를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첫째로 복음은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받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둘째로 복음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이 성취한 것들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가령, 그리스도의 피흘림심으로 죄가 다 갚아졌다는 속죄의 교리와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순종의 삶을 완전하게 사심으로써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교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었다는 것과 같은 교리들입니다. 세째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들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전가되었다는 메시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이 전가됩니까? 이것은 선한 행위나 업적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네째로 복음은 그 성취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된 것들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었으며 우리는 칭의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 결과로 성화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 등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우리의 가장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최고로 만족이 되는 보배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복음이십니다.
저는 바로 이런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설교는 논리적 설명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설명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설교학의 용어로는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라고 합니다. 강해(exposition)라는 말은 설명하고 해설하는 것인데 무엇을 설명하고 해설합니까? 바로 복음이며 성경의 본문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의 설교에 대한 정의에서 이것을 논리(logic)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설교는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입니다. 논리라는 영어단어는 헬라어 logos에서 온 단어입니다. 헬라어 logos는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을 시작할 때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붙인 호칭이었습니다.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시니라”(요 1:1)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오셨기에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설교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미련해보이는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설명이거나 논리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론을 최대한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불과 함께 전달될 때에 온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열과 빛을 함께 가져야 한다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강조했던 적이 있습니다. 빛 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할 수 없습니다. 열 또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는 온전한 설교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설교자 자신의 영역을 현저하게 벗어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십니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과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구해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여기 ‘말’과 ‘전도’란 단어는 바로 오늘날의 설교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설교가 단순히 지혜로운 말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설교는 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설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달되고 사람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씁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느니라”(고전 2:14)

브레이너드가 뉴저지의 크로스윅성(Crossweeksung)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할 때 그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무서운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공로가 완전하고 부족함이 전혀 없으며 그분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기꺼이 구원하신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강하게 선포된 몇 마디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영혼의 고통 가운데서 소리 내어 울었다. 그들은 지체 없이 하나님께 나왔다.

이것이 설교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며,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 전해질 때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기 보다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우리 중에 행하시기를 바라고 갈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주셨던 그런 많은 은혜들을 이 시대에, 그리고 우리들에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참 설교를 회복시켜주옵소서!
여러분, 만일 설교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수단이라면, 그리고 설교가 정말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 요소라면, 우리가 설교를 위해서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죠이선교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전해지는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메시지만이 선포되도록, 그리고 논리적 설명으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불로 우리의 영혼에 쏟아부어지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수단으로 세우신 설교를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세대에 회복시켜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18세기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19세기에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을 그리고 20세기에는 로이드존스(Lloyd-Jones)를 일으켜주사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로서 지켜주셨듯이 그와 같은 설교자들을 이 시대 21세기에도 일으켜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복주시는 열쇠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종들이야말로 여러분들의 삶을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여러분을 쇠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막중하고도 두려운 소임을 저의 인생을 통하여 잘 감당할 수 있도록도 기도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