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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하나님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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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정 (7) - 예배,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려는 열망

시편 42:1-2 / 김형익 교수 / 주일오전설교 / 2006-12-17

말씀내용
예배,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영혼의 갈망
시 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이 시편은 정확하게 언제 쓰여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스펄전은 추측하기를 아마도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쫓겨 도망다닐 때 지은 시같다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노래를 통해서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참 예배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헛된 예배는 존재한다
모든 예배가 다 예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헛된 예배가 존재함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제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깊이 알고, 알 뿐만 아니라 깊이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배는 공연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예배는 정말 훌륭했어”라고 평가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배를 내가 하나님께 드려드린다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이 초래할 수 있는 나쁜 결과는 예배 평가 기준이 우리의 ‘드림’의 질(quality)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준비와 정성과 진행만 괜찮았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흐름이 매끄러웠는가? 악기연주는 훌륭했는가? 기도는 뜨거웠는가?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떨리도록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을 추구했는가가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빌 하이벨스 목사가 말한 것을 생각해 봅시다. 금년에 한국의 온누리교회에서 하는 리더십 축제에서 그가 한 말을 일부 인용합니다:
<셋째,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예배를 하라
예배는 감동을 주고 기억에 남아야 하며, 교회의 모임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사실 창의력과 감동이 있고 기억에 남는 예배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 예배라면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데리고 오고 싶어 할 테니까 말이다. 영화관에 들어가 지루한 나머지 몸이 비틀리는 영화를 본다고 가정해 보자. 영화관을 뛰쳐나오지 못하는 게 단지 돈이 아까워서라면 누가 그 영화를 추천하겠는가?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를 생각하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감동적인 예배를 준비하기에 충분하다.
몇 개월 전, 런던에 있을 때 어떤 교회에 간 적이 있다. 오래된 성당 같은 교회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장내에는 성도들로 가득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예배의 한 순서에서 담임 목사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교사들을 일어서라고 요청했다. 이어 뒤에서 누군가 피아노 건반을 조용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매우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목사님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교사직에 계시는 모든 분들,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어려운 만큼 얼마나 고귀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나 마음이 망가질 때 우리는 당신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축복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회의 한 구석에 앉아 있던 나까지도 가슴이 찡해지며 근처에 서 있는 의사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그의 이름도 몰랐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영혼을 위해, 그가 수술을 집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온 성전에 기도와 격려가 가득 했다. 나는 그 예배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예배에 참석했던 모든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교사들도 그럴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무슨 비용이 들겠는가? 하지만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예배였다.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가 위대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를 위해 춤도 좋고 영상도 좋으며 드라마도 좋으니 계속해 실험 정신을 갖고 예배에 임하기를 바란다. 물론 설교와 가르침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예배가 살아난다면 성도들은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반드시 소문으로 이어져 주위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목사님들의 설교는 더 많은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어 가깝게 다가갈 것이다.>

언뜻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발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 전체가 아니라 일부를 떼어서 인용을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전문은 제가 교회 홈페이지에 올릴 생각입니다마는, 이런 제안은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는 설교를 평가절하하거나 가르침을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성은 결국 주변부의 것들을 예배의 본질로 오해하도록 오도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미 그런 현상들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저는 A. W. Tozer 목사님의 말을 잠시 인용합니다. 그는 <예배인가, 쇼인가>(규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부끄러운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기독교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희한한 단체들이 생겨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p.145)……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영광스럽기에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지 단지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p.186)”
그리고 이렇게 도전합니다. “할리웃이 교회의 스승인가?”

교회가 극장과 비교되고, 예배가 그리고 하나님이 한편의 영화와 비교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인지요? 극단적인 비유가 되겠지만, 우리가 정말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예배를 제공하고, 감동을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는 신학교를 나온 목사가 아니라 할리웃에서 성공한 영화제작자들을 큰 연봉에 모셔와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유사한 일들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배는 수단일 수 없습니다.
“오늘 예배는 감동적으로 드려서 모금액을 채워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예배를 수단화하는 것이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우리는 예배를 수식하거나 치장하는 다른 것들이 예배의 중심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배는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예배는 사역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위해서나 일군들을 리쿠르트하기 위해서 드리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예배를 수단으로 만들만큼 중요한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런 저런 기념 예배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결혼식 혹은 결혼예배는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의 결혼생활은 불가능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혼생활을 지배해달라는 간구와 갈망으로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개업예배는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가 한 걸음도 안 갈 것이며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의 성공은 무의미합니다 라는 고백과 갈망으로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언제나 예배여야 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인간이나 어떤 대상이 중심이 되고 주목을 받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수준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배는 진짜 예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
예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예배의 초점은 설교자나 설교, 혹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나 찬양의 감동 자체가 아닙니다. 설교도 찬양도 기도도 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찬송의 가사 하나 하나에 드러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의 말씀에 주목하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더욱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이 제대로 예배를 드렸다면 우리는 찬양이 좋았다거나 설교가 좋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취하고 하나님에게 만족하여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만 보인다고 노래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예배를 향한 갈망이 언제나 있어야만 합니다. 예배는 공연도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하나의 의식도 아닙니다.예배는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려는 영혼의 갈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영예롭게, 영화롭게 하려는 갈망이 여러분 안에 있으십니까?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안에는 말씀을 공부하는 것에서 나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아멘’하면서 내가 그런 마음, 그런 상태에 이르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는 갈망을 가지고 들으십니까? 저는 설교를 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말씀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저 또한 한 사람의 예배자로서 하나님께서 저라는 설교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만족을 누릴 때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배처럼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아온 것은 무슨 이유이며, 무슨 목적입니까? 예배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설교를 듣기 위해서나, 찬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찬양과 기도와 설교와 이 모든 것이 예배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모든 순서에 다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한 것과 같은 헛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실패했다, 아쉽다 하는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우리의 삶 전체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죠이선교교회는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예배가 실패한다면,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예배가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때, 율법이니까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정하신 것이 이 날이기에 우리가 예배를 우리 삶의 중심에 두겠다는 신앙의 표현으로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합당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중심
교회가 존재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구원받았고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입니다. 교회의 많은 활동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합당하고도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는 활동들이 교회의 존재이유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존재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배가 세워지면 다 세워질 수 있습니다.

선교는 열심히 하지만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가 존재할까요? 구제는 열심히 하나 예배는 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그것은 선교기관이나 구호기관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에 선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예배가 없는 곳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언젠가 구약의 선지서들을 공부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무너지는데에는 예배가 먼저 무너지게 되었는가를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중심이요, 교회의 중심입니다.

세 종류의 예배자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 인한 넘치는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러 나아옵니다. 그런 기쁨은 없지만 어떤 예배자는 그 기쁨이 없기에 깊은 갈망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예배하러 나아오는 참된 예배자는 기쁨도, 갈망도 없지만 갈망조차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큰 한숨과 답답함 그래서 마음 속의 울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마음 속으로부터 동의하는 외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십니다’라고 하는 외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기쁠 수 있고, 기쁨이 없는 대신 깊은 갈망이 있으며, 갈망도 없을 때 ‘나는 이게 아니다’하면서 하나님께 더 깊은 울음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기쁨의 원인이 되시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만이 나의 만족함이 되는 줄을 알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참 예배자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들 중 어느 마음에 속하여 오늘 나오셨습니까?

예배자의 마음은 가난한 마음, 갈망
저는 비록 위의 세 종류의 예배자들 중에서 두번째가 깊은 갈망을 가진 예배자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갈망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세 종류를 모두 포괄하는 갈망입니다. 기쁨이 있어서 더 큰 기쁨을 구하는 갈망?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으시니까?그리고 기쁨이 없어서 가지는 깊은 갈망, 마지막으로 갈망조차 없기에 한숨과 울음에 가까운 갈망입니다.
오늘 시인의 마음은 그런 것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대로라면 ‘가난한 마음’입니다. 여기 시인은 그 가난한 마음을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와닿도록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예배자의 마음을 잘 표현한 성경구절이 있을까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그의 마음은 갈급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스펄전은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기진맥진한 가련한 암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혹은 쫓기는 수사슴이 피 흐르는 옆구리를 씻기 위해, 사냥개들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강을 찾듯이, 핍박받아 지친 내 영혼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시인은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더 이상 경험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시인은 자기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솔직하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만족스러울만큼 누리고 사십니까? 지난 주에 그런 만족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갈망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배부른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른 자에게 진수성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증거는 그가 더 큰 은혜를 간절히 갈망한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아, 나는 괜찮습니다. 워낙 은혜를 많이 받아서요. 지금은 그런대로 만족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하게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나 왕궁을 떠났을 때,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안락한 삶을 살고 싶다고 구하지 않습니다. 다시 왕좌의 영예를 회복하기를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배를 갈망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했습니다. 물론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구했던 것은 하나님의 성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예배드리는 삶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습니다. 한가하게 예배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구했습니다. 만일 시편 84편을 다윗이 쓴 것이 맞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대단한 갈망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왕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자기가 구하는 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랑의 빛 안에서 사는 삶 다음으로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을 소유할 때까지 불행해 하는 것이며 매 시간 그것을 갈급해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불행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다윗이 경험하고 고백하는 이런 갈망을 경험하십니까? 이것은 우리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이런 갈망을 가지게 됩니다. 오랜 세월 은혜를 받지 못하여 우리의 마음이 둔해질대로 둔해져서 더 이상 갈망도 가지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른다 할지라도 남아있는 갈망은 언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자극을 받으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불변하는 본질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예배의 형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누리는 마음의 만족이고 우리가 그것을 가지지 못해서 갈망하게 될 때의 떨림입니다.

갈망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빈 손으로 나오는 것이다.
갈망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은 빈 손을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마치 하나님께서 뭔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릴 것을 두 손 가득히 가지고 나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받기 위해서 나옵니다. 빈손으로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고 나옵니다. 우리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단순한 기분 전환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지지 않는다면, 목이 말라서 죽고 말 것이라는 갈급함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빨리 드리고 나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최소한의 의무로서의 예배를 드리고 정말 나의 만족과 즐거움이 되는 골프를 쳐야지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골프와 비교되는 한, 하나님은 영광받으실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런 일들이 쉽게 경험된다는 사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런 분들의 종교생활의 편의를 봐드리려고 이른 아침 예배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거짓된 위로와 함께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이 그런 종교생활을 이 세상에서 마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게 될 때 받게 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찬송도, 성경읽기도, 기도도, 헌금도, 설교도 다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며, 하나님께서 내게 다가오시는 수단이라고 이해를 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예배하러 나올 때마다 다 다윗이 말하는 갈망을 가지고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 31:19
(NIV) How great is your goodness, which you have stored up for those who fear you, which you bestow in the sight of men on those who take refuge in you.
(NLT) Your goodness is so great! You have stored up great blessings for those who honor you. You have done so much for those who come to you for protection, blessing them before the watching world.
(The Message) What a stack of blessing you have piled up for those who worship you, Ready and waiting for all who run to you to escape an unkind world.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이 깊을수록 영광을 받으시고 그 갈망을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할 갈망이 없어서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그 갈망을 요구하십니다. 영혼의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려는 영혼의 갈망입니다. 그런 예배를 죠이선교교회가 이 땅에 존속하는 하나 계속해서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