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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하나님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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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정 (6) - 왜 믿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로마서 4:1-5, 창세기 15: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6-12-10

말씀내용
왜 믿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구원의 방법-
롬 4:1~5; 창 15:1~6



기독교 복음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믿음이 유일한 기준
기독교 복음이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다른 핵심은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가 행위의 구원을 말하는 반면, 기독교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행위나 선행이나 업적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라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있는 우리 모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평가는 세상에서 하는 평가와는 전혀 다른 부분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를 교양과 학식과 재물과 직위와 인격 등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오면서 얻게 되는 아무리 많은 명예와 칭찬이 있을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살았을지라도 믿음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인 것입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를 하던 시절, 교회의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노래 가운데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도 역시 믿음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읍니다.

떠오르는 질문들
하나님께서는 왜 믿음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믿음을 구원얻는 방법으로 제시하셨는가?
선한 삶을 살았는데 믿음을 갖지 않았다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사람에게는 불공평한 처사가 아닌가?

이런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들은 마땅히 성경적으로 대답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설명을 주셨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루터와 칼빈이 싸웠던 것들
먼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믿음과 관련하여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다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 시대를 기독교회사의 입장에서 암흑 시대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중세에 예술과 문화와 기타 학문의 진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화려한 로마 교황의 권세 아래 복음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가려졌다라는 표현을 쓸 때 중요한 핵심은 바로 믿음의 요소가 간과되고 경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믿음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는 행위의 공로를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믿음과 동일한 비중을 두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뒤집은 사건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와 존 칼빈과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것들을 종교개혁의 다섯 Sola 들(Five Solas of the Reformation)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a Fide(오직 믿음),
Sola Gratia(오직 은혜),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개혁자들은 이 다섯 개로 요약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생명을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교회의 복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싸웠던 것?오직 믿음
이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싸웠던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교가 강조하는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오직 믿음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상고할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가 싸웠던 ‘오직 믿음’의 싸움은 결코 옛날 1세기의 유대교와 관련된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 본문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싸움은 오늘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저와 여러분의 죄악된 본성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싸움이며 가장 무섭게는 카톨릭 교회가 아닌 개신 교회의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이해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의 교리를 설명한 후에, 이제 4장에 들어와서 그 예로 구약의 아브라함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는 이의를 달 수 없는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1절에 “그런즉 육신으로는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한 말은 아브라함이 얻은 것, 발견한 것, 깨달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나가는 것은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2절에서 대답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믿음은 자랑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행위로 된 것이면 자랑할 것이 있었겠다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은 본질적으로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수 없다는 바울 사도의 논지가 강하게 깔려있는 것입니다. ‘자랑’의 문제는 ‘믿음’과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자랑할 수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았다면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자기 힘으로얻은 것인양 자랑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 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마치 물에서 건짐받은 자가 자앙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자랑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구원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겸손합니다.

바울 사도는 조금 더 깊이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여기서 바울 사도는 창세기 15:6의 너무나 중요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 6은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러분,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세 번이나 인용이 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과 함께, 갈 3:6과 약 2:23에서 인용됩니다. 중요한 구절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보통 말합니다. 왜 그가 믿음의 조상인가 하면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기록된 첫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그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거나 의를 선물로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의를 주셨습니다.

다음 구절인 4절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군이 일을 열심히 하게 되면 받게 되는 임금을 ‘은혜’라고 여기지 않고 ‘당연히 받을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감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유대ㅐ교에서는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도움을 드린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고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일한 것에 대한 댓가로 주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 바로 죄사함이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해석은 근본적으로 믿음과 행위를 반대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믿음을 하나의 계명과 행위로 여겨서 죄사함과 의로움은 그 믿음이라는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오해하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종종 이런식으로 말합니다: “나는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는데, 넌 안 믿으니까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은 구원의 원인이 아닙니다.
말은 맞지만, 태도는 틀렸습니다. 오해했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믿음을 구원의 원인이 되는 행위와 공로로 여긴다는 점에서 유대교의 해석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원인이거나 공로가 아닙니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죄인을 믿음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이런 유대교의 해석을 바로 논박합니다.

바울 사도의 해석?오직 믿음
바울 사도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5절입니다.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아브라함이 죄사함을 받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은 자기 후손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결국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심어줄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창 12:1~3)을 믿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야심만만한 젊은이에게 주어도 그리 믿기가 쉽지는 않은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이미 75세였다는 사실도 놓치지 마십시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에 들어와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추정은 16:3에 명시된 것인데, 15장의 사건과 16장의 사건 사이에 시간 간격이 거의 없이 이어지는 사건들로 이해할 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85세가 되었고 열 살 아래인 아내 사라의 나이는 75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약속된 자녀는 주어질 기미도 없고 오히려 그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5장 1절에서 다시 반복되어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회의적인 대답을 한 것입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3).
엘리에셀은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는대로 아브라함의 집에서 길리운 종이었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 이라고 말씀하십니다(4절).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그 밤에 장막 밖으로 불러내시어 하늘의 뭇별들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셀 수 없이 많은 밤하늘의 별들과 같이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이 때 아브라함의 불신과 두려움은 가라앉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6절).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성
이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은 아브라함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셨고, 자기 영광을 더럽히지 않으시면서 아브라함을 온전히 축복하실 수 있게 되신 것입니다. 비로서 창 12:1~3에 선언하신 약속들을 이행하기 위하여 창조적인 능력을 아브라함에게 베푸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of Man)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이 이 의로움의 선언을 받을 당시 죄인이었고 경건치 않은 자(악한 사람)였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로마서 4:5에서 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아니, 구원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그에게는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인간의 전적 부패’교리라고 합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분적으로 부패하게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선을 외적으로 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사회적 수준에서의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사실, 이것이 진정한 선함입니다?은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능력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고, 그 믿음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그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전혀 아무런 선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창 6:5; 8:21).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선하게 살았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인간이 선하게 살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 판단일 뿐입니다. 인간이 죄인인 이래로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의 기준에 미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을 놓고 unfair 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세상의 재판관이 되겠다는 불경건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fair/unfair 의 기준은 이미 어긋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fair/unfair 의 기준이 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 자식은 여러분의 자기 확신, 자기 신뢰를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알면 알수록 자기를 더욱 신뢰하게 만드는 지식이라면 그것은 거짓된 지식일 뿐이요, 그 지식은 여러분이 아직도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 뿐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로우심을 제대로 알게된 때가지는 결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 충분할만큼 깊이 영향을 받거나 감동을 받지 않는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 곧 구원을 주시도록 정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을는 도무지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교리는 인간의 전적 부패의 교리를 확증해주기에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시면서 당신의 선하심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면, 그가 의롭다함을 받기 전과 후에 모두 그의 악함을 드러납니다. 믿고 구원받으면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으로 죄사함을 주시고 의로운 자로 보시기 시작한 이후에는 비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축복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은혜로운 분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
아브라함은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유용한 봉사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그의 보호자가 되셨고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베푸심을 받는 피후원자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믿음 곧 신뢰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후원자가 피후원자를 도와주려면 피후원자가 후원자를 신뢰하고 있으며 도움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환자가 더 이상 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의사는 환자에게 더 이상 진료를 해 줄 수 없고 진료를 하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피후원자는 후원자에게 마땅한 인정과 영예를 돌려야만 할 것입니다. 후원자가 자기에게 베풀어주는 모든 필요한 도움들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불신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뢰의 관계 위에서 모든 선한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는 베푸는 자에게 영광과 영예, 그리고 기쁨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은 이렇게 은혜로운 분으로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말은 찬양받고 예배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후원을 받는 자가 후원하는 자에게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뭔가를 준다면 그것은 전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후원자로 하여금 감사하고 신뢰하는 피후원자에게 성의를 다하도록 만드는 이 기쁨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는 갚아야 할 빚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것은 감사이며 찬송일 뿐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예를 들어보지요.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베풀어주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바꿀수없는 기쁨인 것과 비슷합니다. 자식은 결코 아버지가 자식에게 베풀어주는 것의 크기에 상응하는 일-아버지가 매우 필요로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자식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선한 인격과 자기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믿음과 신뢰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방법으로 믿음을 정해놓으신 것은 믿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행위로 얻는 구원은 더 이상 은혜일 수 없으며, 하나님도 더 이상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받으실 찬송도, 영광도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신 성품은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행위의 노력을 통해서 얻어낸 대가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구원은 자랑을 수반합니다. 나는 이렇게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식으로 비결을 소개합니다. 내가 벌은 것 입니다. 그래서 벌지 못한 자들에게 자랑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하여 가진 태도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얻은 것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얻은 것이기에 자랑할 수 없고 오직 자랑한다면 그 구원의 선물을, 일한 것이 하나도 없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로 베풀어주신 그 선하신 하나님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고전 1:31).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인생과 영원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으며, 주고 계시며, 주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선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셨습니까?
그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찬송이 있습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