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하나님의 열정 (5) - 십자가의 진실 하나님의 열정

주제설교 - 하나님의 열정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하나님의 열정 (5) - 십자가의 진실 하나님의 열정

이사야 53: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6-12-08

말씀내용
십자가의 진실 사 53:10



십자가는 기독교 최고의 상징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십자가가 치욕과 수치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에 십자가로 목걸이를 하고 치장을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혐오스러운 것이요, 상상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중세의 단두대나 근대의 교수형 밧줄이나 현대의 전기의자 같은 것으로 치장을 한 것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 십자가는 헌신과 희생의 상징물로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세우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헌신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헌신이 나타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또 다른 시각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나타났고, 예수님은 또 거기서 자신을 못박는 로마 병사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시각이지만 여전히 온전한 시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시각들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시각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몰라도 위의 시각들 정도는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고, 십자가 없이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는 로마서 1장 18절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며 죄의 진상은 불경건이고 그 불경건은 불의를 낳게 되고 따라서 우리 모두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한다는 것이 지난 주의 메시지였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보아야 하는 것은 모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게 죄없으신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직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것은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고전 1:18). 신비로운 것입니다.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진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육칠백 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놀랍게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 육칠백 여년 후에야 일어날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이토록 정교하게 그 의미와 함께 설명하는지 하나님의 지혜가 놀라울 뿐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와 ‘그’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물론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함을 받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는데에는 역시 삼위일체의 교리를 제대로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이 본문의 의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성 삼위 하나님의 관계는 영광 가운데 거하시고, 완벽한 행복과 최상의 기쁨을 누리시며 완전한 사랑을 하고 받으시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부께서 성자의 상함 받으심을 원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 말씀을 이해하려면 조금 더 단어들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상함’
먼저 ‘상함’이란 단어입니다. 상함은 단순히 다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가 전해주는 뜻은 ‘으깨다, (즙을) 짜다, 박살내다’와 같은 대단히 강한 정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KJV를 제외한 대다수의 영어성경이 선택한 ‘crush’란 단어가 바로 그것을 전해줍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의 으깨어짐을 원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원하사’와 ‘뜻’
더 나아가서 또 한 단어를 살펴봅니다. ‘원하사’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와 같은 단어가 10절 하반절에 명사 형태로 사용되었는데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에서 ‘뜻’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 뜻은 ‘기쁨’입니다. 어떤 기쁨인가 하면 큰 기쁨, 환희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10절 하반절은 ‘여호와의 기쁨을 성취하리로다’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KJV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the pleasure of the LORD shall prosper in his hand.(NASB) And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ill prosper in His hand.

그렇다면 앞에서 동사 형태로 사용된 ‘원하사’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기뻐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역시 KJV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it pleased the LORD to bruise him. (NASB) But the LORD was pleased To crush Him,.
십자가에서 성자의 고난과 죽으심의 순간이 인류를 창조한 이래로 성부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 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뻐하신 이유
이 말은 얼마나 놀라운 역설입니까? 성부께서 성자의 고난과 비참한 죽으심을 기뻐하셨다니요? 왜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죽으심을 기뻐하였을까요? 사람 중에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짐승 중에서라도 그렇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뻐하셨기에, 그 아들로 질고를 당케 하셨다고 합니다. 슬픔과 비애 가운데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슬픔과 비애를 뜻하는 ‘질고’는 하나님에게는 어울릴 수 없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아들로 짊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속건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성취였습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그 영혼을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그 영혼은 속건제물로 드리시면 그 씨를 보게 될 것이고,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기쁨’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씨를 본다는 말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하나님께서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속죄와 자비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그 죄의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요, 계획이었으며 성자께서는 자발적인 순종과 죽으시기까지 보여주신 순종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의 기쁨을 성취해드린 것입니다.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 자체가 기쁠 수는 없습니다마는, 성부 하나님의 기쁨이 된 것은 바로 성자 하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인들의 구원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이라도 피하지 아니하시고, 즉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신다 할찌라도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지불할 뜻을 가지셨으며 실로 아들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향하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것이 십자가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뒤에 있는 십자가의 진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예단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전에, 먼저 보아야만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사랑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죄인들의 불경건과 불의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 부어졌기 때문에,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3:25~2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에서 일차적으로 나타내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주시고 그 의로우심으로 예수 믿는 모든 자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의로우심을 포기하시면 어떻게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한 번도 당신의 의로우심을 양보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심지어 모든 죄인을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서도 그분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인 순종하심과 죽으심으로 성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과 의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시면서 동시에 당신의 사랑을 온전하게 드러내시고 성취하셨습니다.

The Passion of God, the passion of the Christ
이제 우리는 Passion 이란 단어를 중심으로 이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에는 성부 하나님의 Passion과 성자 하나님의 Passion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인 passion은 중세 영어에서는 열정이 아니라 고난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이 단어가 현대에 와서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로 어의가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것을 너무나 열망(passion)하는 나머지, 그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수 있는 것’이 passion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아낌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도록 다 쏟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passion(열정)이 성자 하나님의 passion(수난과 죽으심)을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요, 십자가의 진상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부 하나님의 passion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passion의 합작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물론 그 구원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란 점에서 구원 역사는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만족하시는 그리스도
11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성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고난과 죽으심(passion)으로 아버지의 열정(passion)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도 하신 일을 보고 만족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도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였다’고 판단하십니다(11하). 그래서 그 아들을 높이사 존귀하게 하시고 승리한 자에게 주시는 전리품을 주십니다(12).

여기에 최고의 삶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의 기쁨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정(passion)에 자신의 삶을 복종하여 죽기까지 드리심(passion)으로 최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수고한 것을 보고 마지막에 만족하시는 삶입니다. 마땅히 감당할 수고를 회피함으로 지금 만족을 누리지만 마지막 날에 지옥으로 가면서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삶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단지 바라보십시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여러분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그저 바라보는 자마다 살았던 것처럼(민 21:9)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에 그 아들을 매달아 하늘의 진노를 쏟아부으신 하나님을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죄인을 사랑하시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들을 보십니까?
날마다 십자가로 나아가십시오. 어떤 방식으로이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로 죄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합니다.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나의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나를 인도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죄인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거룩과 의 그리고 사랑을 가장 정확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보여주고 말해주는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이 어떤 가치를 지불한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구원이라는 이야기는 그것이 값으로는, 우리의 목숨을 주어도 살 수 없는 무한의 값이기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싸구려라서가 아닙니다. 복음을, 여러분이 받은 구원을 싸구려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를 성경이 보는 방식대로 바라보는 한 결코 여러분은 구원과 복음을 싸구려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직도 분명하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신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이 불경건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여러분에게 이 십자가의 사건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은 무의미한 것일 뿐 아니라 여러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십자가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서 거기서 행하신 일이 자신에게 미치게 해달라고 구하신다면 선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용납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기쁨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그렇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열어주신 구원의 길인 것이요, 복음인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방법 외에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합니다.

“십자가의 방법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여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다.”(고전 1:18)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 밑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열정(Passion)을 위해 사십시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열정을 위해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죠이선교교회는 하나님의 열정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십자가의 진상을 알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에 삶을 드리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자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의 경력도, 업적도, 명예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여러분의 인생에서,
우리 교회의 앞으로의 역사에서,
우리가 만일 십자가 외의 것을 자랑한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죠이선교교회의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중심을 이루고, 십자가의 복음만이 증거되고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정과 미전도종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열정은 오늘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열정은 무엇입니까? 성공입니까? 자녀들을 향한 것입니까? 아니면 편안한 노후입니까? 그 무엇도 하나님의 열정을 대신할 수 없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을 위해 인생을 남김없이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열정이 나의 열정이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십자가의 진실을 아는 자의 본분이요, 인간이 살 수 있는 최고의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