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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하나님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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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정 (4) -우리는 다 죄인이다

로마서 3:23, 1: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6-12-07

말씀내용
우리는 다 죄인이다 롬 3:23; 1:18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표준에 미치지 못하였으나(현대인의성경)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7세기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John Ow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생각을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자신에 대해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의 위대하심, 영광, 거룩하심, 능력, 위엄, 권위 등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우리의 천박하고 비참하고 죄악된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읽은 두 구절의 본문을 통해서 너무나도 무서운 선언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다 범죄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우리의 불경건과 불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모두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성경의 놀라운 선언을 우리는 여기서 만납니다. “
하나님의 진노는 그 표현에 있어서 정서적인 또는 감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어떤 자제력을 잃고 폭발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비이성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 정도가 너무나 크다는 점에서 ‘진노’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혐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선언을 하나님의 감정과 떼어서 이해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은 죄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 즉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어서 이런 가공할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성경의 타협없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나쁜 소식을 알지 못하면 복음은 결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우리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기껏해야 기독교를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종교로 치부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바로 우리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은혜의 크기를 제대로 알며, 또 알고자 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바로 이 나쁜 소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죄’: 죄는 불경건과 불의(롬 1:18)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고 있다고 이렇게 말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교적 괜찮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더 나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보좌 앞에 서게 될 때에는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기준을 인간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롬 1:18에서 사도 바울이 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죄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도 이해할 것입니다.

A. 불경건이 불의를 낳고, 경건이 의를 낳는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죄를 두 가지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킨 것은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바로 불경건(ungodliness or godlessness)과 불의(unrighteousness or wickedness)입니다.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낸다면, 불의는 인간관계 안에서의 죄들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바로 이 두가지 안에 귀속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십계명을 생각해보십시오. 십계명은 두 개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일계명에서 제사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오계명에서 제십계명은 사람들에 관련된 죄를 다룹니다. 즉 전자는 불경건이요, 후자가 불의입니다.

이 두 가지의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언제나 불의는 불경건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경건은 의를 낳는 것입니다. 불의가 불경건을 낳지 않고 의가 경건을 낳지 않습니다. 포도 나무가 포도 열매를, 무화과 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불경건과 불의를 죄라고 할 때, 죄의 진수는 불경건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경건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기 위해서 사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이런 소원이 없거나 약한 것이 바로 불경건의 본질입니다.

i. 죄의 반대말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타락 후, 인간은 죄인이 되어 짖는 것이 개의 본성이듯이, 죄가 인간의 본성이 되었습니다. 죄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불경건으로 대표되는 죄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경건(godliness)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마땅히 가지고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죄를 범한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하고 결핍하고 있다는 상태를 지적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를 닮아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감이 경건이라면 우리는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ii. 죄는 불의의 목록이기 전에 불경건의 상태이다.
성경이 죄를 논할 때, 술취함이나 음행이나 이런 저런 죄의 목록들이 왜 먼저 나오지 않는가에 대한 해답은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경건과 불경건의 문제?에 달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불의가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경건치 않음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경건하면서 불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불경건과 불의의 큰 주제를 다루고 1장 24절부터 32절까지에 걸쳐 그 불경건과 불의의 목록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죄의 목록들이 불경건의 상태에 앞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는 행위 이전에 우리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요, 의를 행하는데 무능한 우리의 상태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생각해 보십시오.

B. 첫 사람 아담의 실패

i. 죄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창 3:1~6)
아담과 하와는 배가 고파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감과 불신 그리고 반역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주시지만 우리는 금지된 것을 마음대로 하게 될 때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어린 시절 남의 밭에 들어가 배를 서리한 것을 고백합니다. 그의 집 밭에도 배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쾌감을 주었던 것은 배 자체가 아니었고, 도둑질하는 죄였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죄를 정의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형편에서의 불만족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불경건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 최상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스스로 최고의 만족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난 주, 우리가 아침에 공부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최고로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조금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그 영광을 모독 당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만과 불평을 통하여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이것,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 가운데 나는 죄없다고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ii. 죄는 독립선언
뿐만 아니라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기준이고, 주인입니다. 내가 설정한 원칙과 기준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한 채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 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고백록 1:1)

하나님을 떠나 살겠다는 독립선언은 최초의 사람 아담 안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에덴을 쫓겨난 타락한 자의 후손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로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다 진노의 자녀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엡 2:2).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우리의 본질적 성향들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선한 삶을 인간 세상에서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C.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과 경건을 완벽하게 보여주신 삶
비록 첫 사람 아담은 실패했지만, 그리고 우리는 모두 실패한 아담의 후손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지만, 둘째 아담?사람의 아들로 오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죄와 무관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참 경건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살아내심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소원만을 추구하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유일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이 본래 우리가 살도록 부름받은 삶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소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고 그를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의 뜻을 행하는데 우리의 모든 힘이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불경건의 반대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D.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의 특별한 죄’
누군가 성경에 나오는 죄의 목록들(롬 1:24~32)을 살펴보면서 나는 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준 삶을 사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도 다 죄인인 것입니다.

E. 경건한 목사와 악한 살인범은 같은 자격으로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선다.
오직 이런 죄에 대한 관점에서 비로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목사와 악한 살인범은 같은 자격으로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선다.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불의보다 불경건을 앞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의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불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불경건은 사실상 불의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는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게 되는 것이고 마지막날에 그 진노가 퍼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사와 강도가 구별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표준에 이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부적격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은혜의 의미 자체가 역설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가 은혜라면, 은혜는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한 더 이상 은혜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질 때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 자격없음에 대한 인정은 하나님 앞에 죄인되었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받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이땅을 마치고 영원을 지옥에서 보내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행복하든지 비참하든지, 부자이든지 가난한 자이든지, 도덕적이든지 부도덕적이든지, 배운 자이든지 배우지 못한 자이든지, 여자이든지 남자이든지, 살인강도이든지 목사이든지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 죄인임을 기억하십시오. 이것만이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는 슬픈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슬픈 소식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기에 결코 영영 슬픈 소식일 수 없는 오히려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아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복음 안에서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 곧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서 풍성하게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1:17). 그것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는 다 나타났고 거기서 만났습니다.

모든 불경건과 불의를 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남김없이 다 쏟아부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죄없으신 성자이실지라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도록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 위에 쏟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죄인들에게 나타난 방식입니다. 이것은 구원하는 은혜입니다. 여기에 좋은 소식인 복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보아야만 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사랑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하게 나타나 부어졌기에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도,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결코 지나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남김없이 찌꺼기까지도 다 마시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조금이라도 미쳐지지 않도록 완전하게 그 잔을 드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갈 오직 유일한 이유는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깨달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