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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하나님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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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정 (12) -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

이사야 48:9-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1-21

말씀내용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드렸을 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 여러 가지 간구들 가운데 이것을 제일 먼저 놓으셨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는 간구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조되고 반복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이런 표현들입니다.

성경을 읽어내려갈 때,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깊게 읽으시는 분이시라면 이것을 결코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비중입니다. 그 이름은 단순한 name 이라기 보다는 fame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의 명성(fame)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 절대적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비중
저는 먼저 특정한 몇몇 성경 본문들을 선택해서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사무엘의 고별메시지의 한 본문입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로서 백성의 원대로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어 세우며 그의 사사직을 마치면서 마지막 설교를 하였습니다.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황을 좀 더 살펴봅시다. 사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절한 것을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구한 것은 그들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을 거절한 행위였습니다(삼상 8:7).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버려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고 인간 왕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십니다(삼상 12:17). 그리고 비와 우뢰가 쏟아지자 백성들은 두려워 떨며 그들의 죄악을 고백합니다(삼상 12:18~19).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복된 소식을 주십니다. 그래도 계속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 12:20~21).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사무엘은 말합니다(삼상 12:22).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의아하게 들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을 대할 때, 그리고 반복적으로 대할 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고 말입니다.

두번째로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봅니다.
겔 36:20-23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세상의 많은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반복하여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행위의 동기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동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선언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착하고 선해서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셔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평판과 명성을 위해서 하신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만이 아니라, 열방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어떤 평판과 명성을 얻고 있는지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선지자 다니엘의 기도도 인상적입니다. 이 본문은 포로로 잡혀와서 바벨론 제국에 살고 있는 다니엘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렘 25:12)을 읽다가 이 포로생활이 70년 만에 마칠 것이라는 말씀을 읽고는 너무나 놀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단 9:17-19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그는 이미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본토에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간구하고 있는 기도의 근거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시고’, ‘주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입니다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의를 의지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뭔가 우리의 일상적 기도와 다른 점이 느껴지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말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의미하는 바가 다니엘의 이런 기도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정말 많은 이상과 계시를 본 선지자로서 지금 너무나도 놀라운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살펴볼 본문은 우리 주님 자신이 지상에 계실 때 성부 하나님께 드리셨던 기도의 내용으로부터 입니다. 대제사장의 기도로 알려져있는 요한복음 17장의 이 본문은 역사적으로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본문으로 여겨져서(이것이 성경의 모든 영감된 다른 본문들과 비교해서 더욱 영감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마는)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는 것 조차를 부담스러워할 정도였던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 17:4-6a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은 지상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맞으시면서 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고 성부 하나님께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사역의 가장 중요한 것, 사역의 본질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서 온전하게 삶을 산 인간은 아담 이래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오셨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사셨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부활하시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본 이 본문들은 단지 제가 성경 전체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뽑은 본문들입니다마는(사실은 이와 관련된 본문들은 성경 전체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여러분이 성경을 제대로 주의깊게 읽으시는 분들이시라면 어렵지 않게 발견하셨을 본문들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며, 또 너무나 소중히 여기신 나머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내용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이라는 주제 시리즈로 전하는 12번의 설교를 마치는 마지막 설교에 너무나도 합당한 주제요, 또 본문이라고 생각됩니다.

2. 명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다 나름대로 신앙에 대한 정의, 그리고 신앙의 성숙에 관한 정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물론 완전한 정의를 만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저 역시 신앙과 신앙 성숙에 관한 온전한 정의를 여러분에게 드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 역시 목회자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도로서 이 주제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과 신앙 성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때, 성경 전반적으로 흐르는 중요한 관점으로부터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우리의 열심의 정도’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깊이, 그리고 사무치도록 그 이름에 집착하는가 하는 것이 신앙 성숙의 척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신앙의 오르내리는 기복(up-and-down) 현상에 의해서도 이것은 현저하게 영향을 받습니다마는, 우리의 신앙이 점점 성장해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마치 순교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겼기에 기쁨으로 그 순교의 잔을 마시기를 원했던 교회 역사의 많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보여주었던 것 처럼 말입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1:5에서 ‘그 이름을 위하여’라는 언급을 통해서 자기가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 복음 전하는 직분을 감당해가는 근거를 하나님의 이름에 두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자기 이름이 설 자리는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죽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명예를 추구하거나 자기 명예를 유지할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종종 자기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직분자들을 선출하는 투표를 할 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안 되서 섭섭한 마음이야 신앙과 무관하게 감정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마는, 어느 직분이 되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은 매우 비신앙적이고 불신앙적인 것인가 하는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렇게 하는 사람 자신은 신앙이 없거나 신앙이 아주 미숙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판단은 소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는 수준에서의 판단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조차도 없기에 교회 안에서도 무분별하고 부끄러운 일들이 전혀 부끄럽지 않게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죠이선교교회의가 이제 세월을 더해 가게 될 때 언제라도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해야 하는 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그리고 신앙 성숙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며 내 이름과 내 명예는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고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이름입니까?

3. 본문 이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름 뿐인 백성들(1~2절)
먼저 1절부터 살펴봅니다. 1절과 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책망의 요지는 그들이 비록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실상은 불성실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의미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존귀한 이름입니까?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 영광스러운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창 32).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은 그 이름을 받은 야곱?하나님과 끝까지 씨름하여 축복을 얻어냈던?의 모습에 전혀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는 거룩하지 않으면서도 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자신들을 연관시키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마치 전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평소에 살지 못하면서도 자기의 삶을 교회와 연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들은 이름뿐인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혹시 이름 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닌가 돌아볼 일입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수준, 소망이 없다(3~5절).
3절에서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과 포로됨은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예언되어왔던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3,5절).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면서도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과 신상들로 인하여 이런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고 말할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하고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미리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예언하여 주셨다는 말입니다(5절).

이토록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4절)고 선언합니다. 그 완악함은 무쇠와 같아서 도무지 꺽이지를 않으며 그 이마는 얼마나 부끄러움을 모르는지 놋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들이 되었으며 완고한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후에 우상숭배의 죄를 끊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전과 같이 우상을 집단적으로 공공연하게 섬기는 일은 사라진 듯 하였지만 사실 사사로운 우상숭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회복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그것의 원인은 결코 그들 자신 때문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온전한 거룩함을 회복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을 볼 때 아무 소망도 없는 민족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수준을 볼 때에는 도저히 그들에게 구원의 소망이 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 가운데 내 삶의 수준을 보니 구원받을만하거나 구원을 받고도 남겠다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와 앉아계시다면 그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오해하고 모독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결코 구원의 소망을 보장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을 행하리라(6~8절).
이런 내용이 6절부터 8절에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일, 아직까지도 아무에게도 알리시지 않은 일을 행하려고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패역해서 듣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해서 포로로 잡혀간 후에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는 아무런 구원의 근거도 찾을 수가 없을테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해내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개전의 정조차 보이지도 않는 그들을 그렇게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신실하지 못하고 패역한 자기 백성에게 그렇게 하시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입니까?

‘내 이름 위하여..내 영예를 위하여..나를 위하며..나를 위하여..내 이름을..내 영광을..’(9~11절).
그 설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 때문에 패역하여 그들 안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발견할 수 없게 된 자기 백성을 심판하셔서 완전히 멸절하지 않습니다. 연단하고 징계하여 그들을 구원해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연단하십니다(10절). 그러나 여기 놀라운 사실은 은처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참 여러가지로 해석을 하게 되는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저는 이런 해석이 타당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생활이라고 하는 역사적 비참함을 통하여 연단을 하실텐데 하나님께서는 그 연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은처럼 순수하게 정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연단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연단을 통하여 남는 것은 깨끗하고 순수한 은이 아니라, 도리어 더러운 찌꺼기와 불순물 같은 것들만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서도 그렇게 연단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절시키지 않으시고 고난의 불길(풀무) 속에서 연단하시고는 그들을 그 고난?바벨론 포로생활?의 풀무에서 구원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지요? 바로 자기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구원해내지 않는다면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이방나라와 사람들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 그토록 강조되는, ‘내 이름을 위하여’와 같은 표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영원토록 변치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 구원의 근거가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의 상태였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계산과 판단에 의하면 ‘공의로운 것’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은혜로운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근거가 그들 자신의 선한 행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선한 행위나 상태는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한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면 그 구원은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에 언제라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구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이름에 대한 기쁨과 의지와 헌신을 가지고 계십니다. 절대로 그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 이름의 영광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은 그야말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에게 두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내가 기도한 모든 것의 목적이고 근거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으며 물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 이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 무언가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의 충성과 봉사와 선교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는 오늘 한 해동안 섬기실 분들을 임명하여 세웁니다. 섬기시는 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충성이 가득했으면 합니다. 우리의 봉사와 섬김의 기초가 하나님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 섬김을 통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이 기도의 근거(동기), 소망의 근거이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너희는 은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이 떳떳하고 당당하고 싶은 동기와 태도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자존심입니다. 우리 안에서 원인을 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이런 죄된 본성의 태도가 뿌리깊어서 그것과 싸우지 않고서는 우리가 절대로 하나님의 이름에 마음을 두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우리는 자기 명예와 이름을 위해서 살고 싶어합니다. 금식기도라는, 기도 중에서도 가장 깊은 자리로 들어가면서도 우리는 ‘내가 금식까지 하니까’라는 행위로부터 하나님께 뭔가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당당하게 느끼게 됩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자칫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우리 자신의 당당함의 근거로 자리잡기가 쉬울 것입니다. 아무리 큰 헌금도 하나님 앞에서 나의 당당함의 근거가 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구제도 선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수많은 종교의 외적 행위들이 자기의 떳떳함을 세워주는 방향으로 향하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패역함인 것입니다. 더러운 것이며 우리의 불의이고 불성실이며 죄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은 온데 간데 없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다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위험한 것이 또 있습니다. 신앙이 당위성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그런 신앙 형태에 매우 익숙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외적 행위의 당위성에 묶어두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태도입니다. 기독교를 윤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잘못일까요? 당위성이란 것은 교묘하게도 자기의(self-righteousness)라는 우리의 죄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당위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결코 당위성이나 윤리로 축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영적 실재(spiritural reality)입니다. 제가 설령 그 모든 것을 잘 해냈다고 할지라도 저는 결코 그것들을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나의 양심과 다른 사람들의 눈 앞에서 한 것이며, 나의 이름을 위해서 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기를 “구제할 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지만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마6:3)? 우리의 본성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 할수록 더 패역해지는 것이 우리 자신들입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뼈저리게 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것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하며 구호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돌아다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게 두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제가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적, 사회적, 경제적 여건 때문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미래에 소망을 가진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아닙니다. 성도가 환난의 깊은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그리고 성도가 아무리 못났을지라도 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이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이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5.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열심이 구원(선택)과 선교의 근거이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구약의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10번의 재앙을 주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재앙을 주신 이유를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바로와 그 백성들에게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출 9:14~16). 광야에서도 그랬습니다. 라합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자기 명성을 가나안까지 드러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수 2:9~11).

처음에 읽은 사무엘상 12:22의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이유를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과 선택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구원의 대상인 사람들 자신에게 있거나, 죄인된 백성들의 영혼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그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선교가 존재합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온 세상에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이름에 대한 분명한 의지, 이것이 선교의 출발점이고 마지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신앙의 실재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신앙의 실재라는 사실을 많이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지적하는 신앙의 진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갈 2:20에서 고백했듯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자리로 갈 수 있습니까? 깊은 기도가 없는 삶은 결코 신앙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삶입니다. 아무 것도 말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는 사귐(요일 1:3)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전형을 존 번연은 그의 걸작인 <천로역정>에서 Talkative(수다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럴 듯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연합되는 이런 자리로 우리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롬 1:5)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집착만큼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그것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합니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여러분은 흥분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돈을 벌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을 하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여러분은 삶을 드릴 수 있으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여러분은 죽을 수도 있으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여러분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살아가십니까? 바울 사도와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노라” (고전 4:10~13).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하).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귀중히 여기지 않았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2000년의 교회역사에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조지 휫필드의 생애를 읽어 보십시오. 그는 생애의 마지막에 가까왔을 때 그를 열광적으로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거대한 칼빈주의 감리교 연합회의 책임을 맡기려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죽은 뒤 묘비에 이렇게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G.W. 여기에 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위대한 심판날이 밝혀줄 것이다.”

여러분, 평생토록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은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 그리고 죠이선교교회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구합니다.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