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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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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4) - 회심과 성령 하나님

요한복음 16:8-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4-28

말씀내용
<회심과 성령 하나님> 요 16:8~11



회심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회심은 근본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께서 죄인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만드시고 참된 회심의 은혜를 입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깊고 상세하게 다루지 못하는 한계는 있지만, 회심에 있어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아직 회심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물론, 회심하신 분들에게도 선명한 빛을 비추어주리라고 확신합니다.

1.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현대 교회의 오해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성령님의 사역을 생각할 때, 은사나 능력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령님의 사역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가르치셨을 때 그것은 오늘 본문과 같이 죄인의 회심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은 받았지만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 사울 왕과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신약 성경의 시대에는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오늘 우리는 이런 은사와 능력이 아니라, 회심에 초점을 맞추어 성령님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2. 회심의 출발점: 죄의 각성
죄인의 회심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님께서 먼저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8). 성령님이 책망하시는 죄가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그것은 불신의 죄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죄 중의 죄요, 가장 극악한 신성 모독의 죄입니다. 만일 이것이 이해가 되고, 여러분 마음에 깨달아지신다면 이미 여러분 안에서 성령님께서는 선한 일을 시작하고 계신 것이라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본성으로 이것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와 그 비참함을 깨닫는 것은 절대로 단순한 양심의 작용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1문의 답은 이렇습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로서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 또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능히 우리를 권하여 복음 가운데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와 죄의 비참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울부짖었던 것입니다(행 2:37).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죄인을 회심하게 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첫 번째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와 그 비참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탄식을 한다고 해서 회심이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3. 회심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두번째 사역: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심.
성령님께서 두 번째로 책망하시는 것(여기서는 확신케 하시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은 의에 대하여 입니다(8). 주님은 10절에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는 완전한 의를 필요로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너희는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한다.” 죄인이 필요로 하는 완전한 의로움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분이심을 확신시키십니다. 이것이 앞에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또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밝히 보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죄인은 비로소 자신의 의로움은 더럽고 추한 누더기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써 성령님은 죄인의 더러운 자기 의를 폭로하십니다. 성령님은 죄에 대한 각성을 일으키신 후에,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고 구원이며 모든 은혜의 원천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4. 회심에 관한 성령님의 세 번째 사역: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다.
세 번째로 성령님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11).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텐데, 그 십자가에서 세상 임금으로 불리는 사단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고(요일 3:8),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를 멸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 2:14).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게 될 모든 사람은 다 마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듯이 그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확신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고 그때 여러분의 더러운 의가 드러날 것을 성령님께서 확신케 하시는 것입니다.

5. 마음을 비추시는 성령님의 사역
그러면 우리의 질문은 성령님께서 어떻게 죄와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고 각성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마음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흑암, 영적 흑암입니다. 하지만 이 흑암은 아주 희미한 빛을 가지고 있는 흑암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 정도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는 빛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그저 어두움을 인식할 수 있는 빛일 뿐이고, 로마서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면 감사치도 아니하는(롬 1:21)” 빛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심령은 ‘이 세상 신이 그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영적으로 소경된 상태입니다(고후 4:4).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이 회심할 때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행 26:18). 그래서 사도 바울은 회심은 “어두운데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런 죄인의 심령의 어두움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빛을 가지고 있고 그 빛을 비추어준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을 많이 듣고 배워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이 이유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죄인의 마음의 어두움과 무능함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혀 말씀을 못 알아 듣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자연적인 이해로 인식할 수 있는 진리들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성을 통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중생한 사람이 가지는 반응과 흡사해서 분명하게 구분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복음이 요구하는 진정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소리를 들을 때 화음을 듣고 그 아름다움에 취하는 사람과 그저 시끄러운 소리로 듣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주시는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의 그 찬란한 빛을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심령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런 죄인이 회심을 하기 위해서 성령님은 먼저 그 어두운 마음을 비추어주심으로써 영적 비참함을 보게 하시고, 자신이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달아 알게 하시는 역사를 행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그 전에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던 그 동일한 말씀으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각성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늘 동일한 복음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작용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회심은 아닙니다.

6. 양심을 깨우시는 성령님의 사역
성령님은 죄인의 마음을 비추어주실 뿐만 아니라 죄인의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죄인의 양심을 깨우심으로써 하나님의 법과 심판을 각성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정죄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각성된 양심이 죄인에게 행하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깨워주신 양심이 아니면 자연적인 양심은 이런 일을 하지 못합니다. 성령님께서 일단 양심을 깨워주시면, 적어도 세 가지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두려움과 수치 그리고 자기 정죄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이고, 수치는 자기의 죄와 모든 삶에 대한 것이며, 자기 정죄는 죄인의 마음에서 모든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이런 깨어난 양심이 강력하게 역사하게 될 때 그 사람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됩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사람마다 그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는 있지만, 회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도 이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3~4).”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시 77:3~4).” 그래서 각성된 양심은 자신이 마땅히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7. 각성된 양심이 자동적으로 회심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각성된 양심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아직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며, 또 이런 각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 받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고 나서 이런 양심의 각성을 받았습니다. 그도 두려움과 수치와 자기 정죄를 경험했습니다. 슬프게도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절망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런 양심의 각성의 경험은 있다가 시들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오래 지속되기도 합니다. 평생 여러 번에 걸쳐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 자체가 자동적으로 참된 회심의 열매를 거두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양심을 깨워주심에도 불구하고 참된 회심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결과가 생길 수 있는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양심의 경고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증거를 무시하는 불신앙의 영향 아래 자신을 방치해 두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너무나 쉽게 육적인 평안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통 가운데서 시간을 보내느니 빨리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는 나머지, 누구라도(그 사람이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게 ‘괜찮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는 태도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천로역정에서 소망에게 죄의 각성이 시작되었을 때 그가 모든 종교적인 의무들을 행함으로써 자기 개선의 노력을 행하고 그 행위 위에서 평안을 누리려고 했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한 거짓된 욕구로부터 일어나는 일이기에 결코 참된 복음의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셋째는 양심이 깨어나면서 죄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자기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그 일들, 즉 자기의 정욕을 따라서 하는 일들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태도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들 때문에, 양심의 각성 그리고 죄에 대한 감각이 전혀 그 삶에 아무런 변화도 만들지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양심의 각성은 결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죄인은 이렇게 함으로써 성령님께서 자기 안에서 주시는 영향을 죽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8. 회심에 있어서 의지의 역할: 하나님께 나아가라.
회심은 지정의(知情意) 모두를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고 양심을 일깨우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죄인의 감정은 자신의 비참함에 울게 되고 하나님의 긍휼함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회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죄인의 의지를 움직이십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왔고, 자신의 영적 처지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깨닫게 된 죄인의 심령은 의지적 결단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지적 결심도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되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깨닫고 어린 아이와 같이 믿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회심으로 인도하는 영적 각성에는 그 죄인의 의지적 저항이 꺾여지는 요소가 반드시 있습니다. 죄인의 의지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결코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께 굴복하는 일을 허용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심에는 반드시 의지의 순종이라는 요소가 마음의 비침을 받고 양심의 각성에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여기서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의지적 불순종에 익숙해지는 일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마음에 비침을 받고, 양심에 각성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성령님께서 자신의 의지 조차도 굴복시켜주시기를 구하지 않은 채, 언젠가 되는 날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보냈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불순종이 여러분에게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 의지적 순종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멈추고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에 구주와 주님으로 나타내 주시기를 구하셔야 합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까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천로역정에서 소망은 믿음으로부터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회심의 은혜는 생각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 (저는) 기도하고 또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기도 할 때도 안 해 주시고 두 번째 기도할 때도, 세 번째 할 때도, 네 번째 할 때도, 다섯 번째 할 때도, 여섯 번째 할 때도 안 해 주셨습니다. 수백 번도 더 기도를 그만 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세상이 결코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말이 진실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 기도를 그만 두면 꼭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죽더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서 죽기로 한 것이지요. 그런 가운데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 2:3)’는 말씀이 마음에 떠올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계시해 주실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나아가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심령의 눈에 보여주셨습니다. 소망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고 가슴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울렁거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아직 회심의 은혜를 입지 않은 분들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소망이 하나님께 나아간 것처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의지를 꺾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그러면 산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을 어린 아이와 같이 믿고 나아가십시오.

9. 중요한 것은 출발점이다: 죄와 부패 그 비참함을 인식하는 일
사람들에게 회심의 필요성을 확신시킴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사실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의 결핍, 즉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고 오염되었으며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의를 부인하고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이런 메시지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가장 극악한 죄는 바로 자기 의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모르는 자입니다. 자신의 죄와 부패 그리고 그 비참함을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는 당연히 회심하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교회 안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오래 교회를 다녔고 직분을 받은 자들 가운데서 많이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여러 의무들을 열심으로 행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고 회개가 없습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복음 설교를 그들은 마음으로 거부합니다.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참으로 회심의 은혜를 입은 분들이라면, 여러분은 복음 설교를 들을 때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전적 부패에 대해서, 여러분의 죄성과 오염 그 부패에 대해서 듣게 될 때 도리어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참된 은혜가 있고 그 은혜를 인하여 기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주께서는 우리 모두를 향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우리를 부르고 또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나아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이렇게 기도하실 것입니까? “예, 제가 바로 그런 죄인이고 그 죄에 오염되었으며 부패하고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 저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모든 죄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주시고 제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제가 믿나이다. 저를 살려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의 눈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겨내시고 여러분 자신의 어둠에 쌓인 마음을 비추어주심으로 여러분의 죄와 비참을 보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주실 수 있으신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을 바라봄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의 은혜를 입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