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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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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3) - 그 행복한 항복

누가복음 18:15-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4-20

말씀내용
<회심, 그 행복한 항복> 눅 18:15~23



회심이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항복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항복은 비참한 것입니다. 패배를 완전히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항복은 비참함이나 굴욕스러움을 제외한다면, 회심을 잘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회심한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의 힘과 권리와 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회심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조건을 걸고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됩니다. 비록 때때로 불순종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항복한 신자는 제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회심의 문제를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1. 죄인의 본성은 하나님께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누가 항복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자기 권리와 자기 힘을 다른 힘에 완전히 굴복시켜서 양도하기를 원하겠습니까? 아담이 범죄한 후에 인간은 스스로가 왕이 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본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본질상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본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억지로 무엇을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자율성을 가진 자신의 주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조금만 자의식이 생기고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모습을 여실히 봅니다. 인간의 자아는 너무나 커져서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자아라는 성이 무너지고 함락되기 전에는 결코 죄인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 죄인의 삶에 일어나는 회심의 역사는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심을 하려면 자아라고 하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정복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실 때, 먼저 우리의 한 없이 높아진 자아를 다루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자기 의를 깨뜨리지 않고는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주시기 전에 먼저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자기 의를 깨부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려면 먼저 이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가 스스로 이미 알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말씀의 의미(17)
오늘 본문은 두 존재를 서로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하나는 어린 아이이고, 또 한 사람은 부자 관원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어린아이)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16). 물론 어린 아이가 다 천국에 간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17절의 설명이 중요한데,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천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아이의 특성은 순진무구함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아직 때가 묻지 않았고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모태로부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시 51:5). 주님께서 여기서 보고 말씀하신 것은 어린 아이의 부모에 대한 전적인 의존, 완전한 신뢰입니다. 두 마음을 가지지 않고 온전한 신뢰를 가지고 부모를 바라보고 그 품에 안겨서 만족을 느끼는 아이와 같은 심정과 태도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두 주 전에 분명하게 여러분에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와 믿음 곧 회심입니다. 완전히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와 싸우려고 들지 않지요. 어린 아이는 자기가 부모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자기 부모님을 못 하는 일이 없는 하나님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전적인 신뢰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것은 곧 전적인 항복(absolute surrender)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항복을 아무도 비참하고 굴욕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행복한 항복이지요.

3. 부자 관원: 부분적 항복은 항복이 아니다(18~23).
어린 아이에 비교한다면 본문에 나오는 부자 관원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와 달리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의 질문이 이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말씀만 하시면 자기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복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적절하게 다루셨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이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부자 관원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어린 아이처럼 주님께 항복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는 항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아직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전히 내 힘이 남아있고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주님께 항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의 문제였고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는 물론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만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항복을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항복을 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저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재물을 사랑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가 믿고 주님을 순종하기를 원하오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어린 아이처럼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어린 아이는 부모의 능력과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해 줄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항복을 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든지, 할 수 없는 일이든지?그 말씀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자 관원의 태도는 부분적 항복이었고, 이것은 항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4. 주님은 구원의 문제가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되기 까지는 주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 자신에게 구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기까지는 주지 않으십니다. 이 부자 관원에게는 재물이 구원의 문제 보다 더 소중했습니다. 아니면, 그는 주님의 말씀을 어기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주님의 생각 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옳다고 여긴 것입니다. 존 에인절 제임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 영혼의 구원에 관해서 근심하지 않는 사람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문제가 정말 중요합니까? 여러분이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그 어떤 문제보다 정말 구원의 문제가 중요합니까?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혹 여러분이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힘써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구원 받는 일이 정말 중요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여러분에게 절박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그 순간에 그 사람에게 구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믿어 순종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참된 항복입니다.

5. 절반의 복음으로는 항복할 수 없다(롬 8:7).
우리가 주님께 진정한 항복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가 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된 회심을 위해서 극복되어야 하는 내적 요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항복을 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는데 이것은 외적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반의 복음입니다. 절반의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절반의 복음은 죄인의 육신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참된 항복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절반의 복음은 절반의 항복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조건부 항복입니다. 문제는 완전한 항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일입니다. 바로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솔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토록 율법을 지키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절반의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에는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과 관련된 차원이고 하나는 의로우신 하나님과 관련된 차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차원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아 죽으셔야만 했다는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되어 있고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한 번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일이라고 설명했고(롬 3:25), 조금 더 뒤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롬 5:8). 그렇다면 제가 절반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날 때 그 복음은 절반의 복음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과 밖에 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복음이 이것만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자아를 한껏 높여주는 복음입니다. 소위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단순히 죄인의 자아를 높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죄인의 자아는 이미 높아질대로 높아져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복음이 그것을 더 높여준다면 어찌 그것이 복음일 수 있겠습니까? 이 복음은 자기 중심의 복음입니다. 인간이 주인되는 복음입니다. 이것은 물 탄 복음입니다. 적어도 십자가 복음의 나머지 절반이 주어지고 깨달아지기 전까지는 그렇습니다. 절반의 복음으로 죄인은 결코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6. 참 복음만이 절대 항복을 하게 한다.
나머지 절반의 요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합쳐질 때만이 복음은 온전한 복음, 참된 복음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것은 단지 죄인을 사랑하사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것 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을 율법의 원칙에 따라서 요구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미국 정부가 만일 보스톤 테러의 범인이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있기 때문에 용서해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번번이 이런 식으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용서해주는 정부라면 그 정부는 의로운 정부입니까? 국민들은 그런 정부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공정한 법이 집행되고 있는 것입니까? 그저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죄의 형벌을 면제해 주는 세상 정부는 없습니다.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만 의로운 정부이고 백성들은 신뢰를 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적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의 정부나 어떤 법정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에 대한 감각을 인간 양심에 새겨 넣으셨습니다. 여러분이 평안을 누리려고 애를 쓰고,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해보려고 하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읽어보고 회개도 하고 눈물도 흘리지만 양심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알고 회개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에 죄사함의 온전한 확신과 기쁨이 없고 그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절반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없습니다. 죄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율법의 원리이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를 사랑하여 모든 죄를 용서한다고 하신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당신의 독생자,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게 하셨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셨고 그를 향하여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죄의 형벌을 다 짊어 지워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내 죄에 대한 형벌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 남김없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받은 죄인에게 죄사함과 용서의 확신을 주고, 그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며,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저주하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만큼 죄를 미워하십니다. 이것을 빼놓은 복음은 절반의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랑 받을만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야 할 의무가 없으십니다. 자신이 사랑받을만 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 절반의 복음은 그 사람의 항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항복을 이끌어낼 뿐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존재들이라고 말입니다. 복음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할 수도 없는 값비싼 사랑입니다. 그것은 그 아드님의 죽음을 대가로 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거저 받은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편에서 거저 받은 것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당신의 아드님의 저주받은 죽음을 대가로 지불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복음의 진수를 알게 될 때, 바르게 알면 알수록, 더 깊게 이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여러분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반역과 죄를 깨닫고 투항(항복)하는 죄인들은 그 자비로우신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감동을 받고 그 사랑에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를 자신을 주어 사랑하시고 자신의 품에 안아 아들로 여겨주실 때 죄인의 가슴은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복음, 온전한 복음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참 복음만이 절대 항복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7. 절대 항복을 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경고를 여러분에게 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절대 항복을 하지 못하면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부자 관원을 보십시오.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부족한 한 가지 때문에 심히 근심하면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본문에 보면 그는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는 그 한 가지 부족한 것, 그는 주님 보다 돈을 더 좋아했다는 것 때문에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절대 항복을 의미합니다. 그 첫 번째 항복을 선언하고 경험하는 사건이 회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절대 항복을 선언한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절대 항복을 경험한 일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구세주로만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황제 숭배를 하던 로마 제국 하에서 많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재산과 직위를 몰수당하고 감옥에 가야 했고 때로는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유는 자기들의 주는 황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피할 길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구세주라고만 말했으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을 알고 있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을 죄에서 구해주시는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신서에 수 없이 나오는 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 그렇게 완전히 항복한 신자들이 드린 값진 고백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말 어떤 것 때문에, 영원한 천국을 포기하는 일은 과연 지혜로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물론 부자 관원처럼 여러분의 고집과 자아와 아집을 가지고 오늘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에 고통만을 더할 것입니다. 주님은 고집을 부리고 주님을 대적하던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고집센 황소가 말을 듣지 않으면서 뒷발질을 한답니다. 이 소를 길들이려고 주인은 거센 가시가 무성한 막대기를 황소의 뒷다리 뒤에 가져다 댔답니다. 소가 고집을 부리면서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자기 다리가 상하게 되고 아파서 결국은 주인에게 항복하게 되는데, 그 항복을 하기까지는 고통만 더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8. 항복을 결단하라.
여러분, 그러니 빨리 순종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복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 삼았던 것을 내려놓지 않고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여러분의 주인 된 것은 무엇이든지 우상입니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돈을 주인삼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족들의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돈을 위해서 그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을 만난 후에 보여준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그렇게 할 것을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항복하는 것입니다. 자기 우상을 그는 내려놓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그의 말의 진심을 아셨습니다. 그에게 왜 재산 전부를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중요한 것은 재산 전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느냐 주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린 아이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믿음이 삭개오에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가 주님께 항복하는 이 선언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자기의 주인되었던 것을 내려놓지 않는 회심은 참된 회심이 아닙니다. 자기의 주권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항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삭개오와 같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항복입니다. 이것이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주요, 나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안길 때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면서 나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삶의 주인을 찾았기 때문이고, 진짜 삶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구원받은 성도의 만족스러움을 이렇게 아름다운 비유로 묘사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이것이 행복한 항복입니다. 이것은 달콤함을 가져다 주고, 비참함이나 굴욕감 대신 만족함과 행복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로, 자신의 주인 삼은 것들을 내려놓기로 결단하셔야 합니다. 삭개오가 한 것처럼 말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부자 관원에게 요구하셨던 것이 바로 이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 부자 관원처럼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 가운데 아직 회심하지 않은 분들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항복하라고 말입니다. 내게 항복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려드리지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제게 무엇을 버리라고, 무엇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시든지 저는 이전에 제가 주인 삼고 살아가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포기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 마음, 제 고집을 꺾어주시옵소서.” 이렇게 지금 나아가십시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간절히 엎드리십시오. 오늘 밤이라도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고 결단하십시오. 이것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이런 사람을, 순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하며 주님께 항복하는 사람을 그 품에 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진정한 죄사함의 확신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참된 자유함과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죄 가운데 살고 죄 가운데서 죽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려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값비싼 사랑이고,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