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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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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성례 2016 (1) -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끄는 은혜

누가복음 22:14~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9-04

말씀내용
우리는 이제 4주에 걸쳐 <언약과 성례>라는 주제로 주님께서 제정하신 두 성례인 세례와 성찬에 대해서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주제는 사실상 교회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과 관련하여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대한 내용을 가르쳐줍니다. 이 주제는 오늘날 교회 현실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주제 중 하나가 되었고 성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지식을 아는 성도들을 만나보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상고하는 동안에, 이 주제를 무시한 결과가 오늘날의 교회에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존 칼빈은 바른 말씀의 선포와 함께 바른 성례의 시행을 참된 교회의 표지로 이해했을 만큼 이 주제는 교회의 사활에 중대한 요소입니다.
1. 주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기 전에 왜 성례를 제정하셨을까?
오늘 본문에서 먼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은 고난을 받고 죽으시기 전, 그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면서 성찬이라고 불리는 성례를 제정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주님은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고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본문이 강조하듯이, 때는 유월절입니다. 정확하게 이 날의 저녁식사가 유대인의 유월절 저녁 식사 시간과 일치하는지 아니면 그 전날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유월절기념식사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8절부터 16절까지 주님은 무려 5번이나 유월절을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식사를 마치시면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성례를 명령하셨을까요?
2. 주님께서 제정하신 두 개의 성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표(sign)
오늘 본문에서 성찬을 명하신 것 외에 주님은 대속의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실 때 사도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개입니다. 우리는 오늘 단순히 성찬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왜 이와 같이 세례와 성찬이라는 성례를 제정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목적과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은 늘 세례와 성찬을 행하는 교회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A. 성례는 언약의 맥락 안에 존재한다.
첫째로 우리가 성례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하는 요점은 성례가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약은 성경 전체와 구속사를 꿰뚫는 아주 큰 주제입니다. 5년 전에 제가 <언약과 구속>이라는 제목으로 전한 시리즈 설교를 듣지 않으신 분들은 꼭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복음을 천착하기 위해서 반드시 깊게 공부해야 할 주제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식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단어는 생소할 수 있을지 몰라도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많은 언약의 내용들이 나옵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는” 이 관계는 언약으로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셔서 관계를 맺으실 뿐 아니라, 그 언약을 당신의 신실하심을 따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과 봉신 사이에 맺어지던 종주권 조약이 구약성경의 언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 조약에서 왕은 봉신과 그 국가를 보호해주고, 봉신은 왕에 대한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그 언약의 내용이 규정됩니다. 그들은 언약을 세울 때, 짐승을 둘로 쪼개 벌려놓고 언약의 두 당사자가 쪼갠 짐승의 사이로 지남으로써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오늘날 사인(sign)을 하거나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된다는 경고도 여기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 체결의식에는 언제나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언약의 맥락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새 언약은 짐승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피로 맺으시는 언약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로 그 밤에 잡히셔서 심문과 고문을 겪으시고 다음날 오전이면 십자가 형틀에 달리시고 피 흘려 죽으실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날이 지나고 또 시간이 흘러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더 알게 되고, 이후 성령님이 강림하신 후에 그들은 현저히 이 내용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B. 유월절성찬: 어린양의 피(출 12:13)
그 저녁 식사는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을 때(요 1:29,36) 그것이 어떤 양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과 그 전에 제자들과 새 언약을 체결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주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언급합니다(고전 5:7). 유월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의 장자들을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간(pass over) 날의 이야기이고,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알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유월절의 중심에는 어린양과 그 피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입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 피가 표적이란 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유월절을 대대로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을 기념하여 어린 양을 잡고 식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되새겼습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의 행사는 사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지게 되는 죄의 권세와 그 권세를 주장하는 마귀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가리키는 표였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 저녁에 제자들과 체결하신 새 언약이 바로 유월절이 가리키던 실체였고 곧 유월절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신자들은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주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성찬으로써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들에게는 일년 된 양의 피가 표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하시고(16) 또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성찬은 또한 멀리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의식이라는 점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성찬은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C. 할례세례: 언약의 표징(창 17:10~11)
세례도 마찬가지로 언약의 맥락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옛 언약의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 모든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표로 명령된 것이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0~11).” ‘언약의 표징’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월절이 옛 언약의 표였다면 새 언약의 표는 성찬입니다. 이 둘 사이에 연속성이 있듯이, 할례와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가 옛 언약의 표라면 세례는 새 언약의 표가 됩니다. 할례가 옛 언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되었듯이, 세례는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될 모든 족속의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줄 것을 사도들에게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 이와 같이,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있지만, 그 표들이 가리키는 실재는 동일한 것입니다.
D. 누가 참여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하나만 정리하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옛 언약 아래서 누가 할례를 받았고 유월절을 지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맥락에 있다 하는 말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적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세례와 성찬이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세례와 성찬은 주어집니다. 주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례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은혜 언약의 표와 인이며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3. 성례: ‘은혜 언약의 표와 인’
제가 ‘표’와 ‘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4장 11절을 봅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례는 이와 같이 표(sign)와 인(seal)이라고 말합니다. 표라는 단어는 본래 그 자체가 실재가 아니며 의미하고 가리키는 바, 곧 실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 특히 요한복음에는 ‘표적’이라는 말로 많이 사용됩니다. 표적은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표현한 말인데, 왜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기적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표적’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표적이란 단어가 ‘할례의 표’라고 할 때 ‘표’와 같은 단어입니다. 할례는 그 자체가 실재가 아니라, 실재를 가리키는 표인 것입니다. 세례도 이와 같이 새 언약 아래서 표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 주일에 상고할 주제이지만, 바로 ‘세례를 받은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다’하는 실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은 왕의 인장 반지를 연상시키는 단어이고 또는 어떤 소유권 주장과 관련된 말입니다. ‘성례가 은혜 언약에 대한 인이다’라는 말을 간단하게만 설명한다면, 성령님께서 당신의 소유로 인치신 사람이다 하는 것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만 하시지 않고 외적인 표와 인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로 더욱 확신하는 자리에 이르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이 바로 성례인 것입니다. 성례가 기본적으로 비언어적 의사소통 방식이기에, 성례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설교)과 함께 주어져야 합니다. 즉, 그 표와 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 그 표와 인은 더욱 신자들에게 은혜의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역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 없이 성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미사는 ‘설교 없이 행하는 성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성례 자체를 우상시하는 미신을 낳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4. 성례의 효력
여기서 우리는 성례의 효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지지 않는다.
제일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성례가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례를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진다고 잘못 가르칩니다. 적극적으로 성례의 은혜를 거절하지 않는 모든 자에게 성례는 자체로서 효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무의식에 빠진 사람이라도 그가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으므로 성례는 효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성례가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효력을 미친다고 하는 잘못된 가르침은 성례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편하고 위로가 되는 가르침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에 근거한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라 인간이 지어낸 거짓된 위로일 뿐입니다.
B. 단순한 기념의식이 아니다.
두 번째로 성례는 단순히 기념의식만은 아닙니다. 아마 개신교에 속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례를 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세례는 그냥 통과의례 같은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무슨 추도식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례에 대한 이런 이해가 만연한 것은 일차적으로 성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목사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성례는 기념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특별히 누리도록 주어진 은혜의 방편인 것입니다.
C. 표와 실체의 결합?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함.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일까요? 성례는 그리스도의 영적 실제적 임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경험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즉, 성례는 단순한 표와 인이 아니라, 그 표가 가리키는 궁극적 실재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R.C.스프로울은 표와 그 표가 의미하는 실재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약속으로서 믿음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만약 네가 믿는다면 나는 네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 나는 영적인 죽음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너를 살릴 것이다. 나는 너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할 것이다. 나는 성령으로 네게 세례를 주고 내주하게 할 것이다. 세례라는 표로 전달된 이 모든 것은 나의 말로 말미암아 진짜가 된다.” 이것은 세례라는 성례를 통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시는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약속입니까?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영으로서 성찬에 실제로 임재하시기에 그리스도인이 성찬을 받음으로써 그들은 실제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은혜를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례는 영적 의미와 실재를 가지고 있기에 공허한 의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듯이, 성례도 그렇습니다. 성례의 효력은 성례를 베푸는 사람의 경건이나 상태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성례의 효력은 오직 그것을 제정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실제적인 역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례는 믿는 자에게 복음을 확증하고 적용하고 은혜를 강화하고 더하는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은혜를 입은 성도들로 하여금 주 앞에 합당한 순종의 열매를 드리게 하는 힘이 됩니다. 이뿐 아니라, 성례는 참된 성도들 간에 성령의 교제를 더 긴밀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혜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과 구별해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5. 성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끄는 은혜
이런 방식으로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시행되는 성례는 교회를 세웁니다. 반면 성례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례의 본질과 목적을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은혜의 다른 확증 수단을 필요로 하게 되고 온갖 신비주의 체험과 은사와 기적들이 이 성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는 로마 카톨릭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성례가 그 자체로 효험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현상이 개신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7절에서 성찬의 문제를 다루면서 ‘합당하게’ 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합당하게 성례를 받는 사람에게 그 성례의 유익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합당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공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으니 세례 받을 자격이 있어”라고 말하거나 “내가 믿는 사람이니 나는 성찬을 받을 자격이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 위에서 다만 우리는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길은 ‘믿음과 회개’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회개로 성례를 받습니다. 세례와 성찬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 유익의 정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성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성례가 우리의 신앙을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 중심이 되도록 교정해 주고 이끌어 줍니다. 성례가 우리가 얻은 이 큰 구원의 은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엄청난 사실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성례가 오늘날 중심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교제를 다시 그리스도 중심의 교제로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성례가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을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기도와 성경읽기를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은혜의 수단들입니다. 그러나 선포되는 말씀과 함께 성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시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성례는 우리의 열심과 봉사와 헌신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헌신, 하나님의 자비를 은혜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보여주고 확증합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성례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믿음을 견고히 세워주시려고 행하라고 하신 은혜의 수단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나를 바라보아라. 나를 주목해라. 나를 떠나지 마라. 내가 너희의 생명임을 알아라. 내게로 와라.” 성례의 의미를 알고 행할 때마다 다른 것으로는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복된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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