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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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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성례 2014 (4) - 한 몸으로의 부르심과 성찬

요한복음 13:34-35, 고린도전서 11:17-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12-07

말씀내용
<한 몸으로의 부르심과 성찬> 요 13:34~35; 고전 11:17~34


언약과 성례라는 주제로 우리가 네 번째로 상고할 제목은 <한 몸으로의 부르심과 성찬>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사도 바울이 표현한 것은 언제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숙제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갈 5:6).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언제나 사랑, 서로 사랑으로써 표현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성찬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는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토드 빌링스라는 신학자의 말입니다. “칼빈의 성찬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연합은 언제나 이웃과의 수평적 결합에 연결되어있다. 이웃과의 결합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칭의)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는 것(성화)이 모두 (성찬 안에) 한데 수렴되어 있다.”(『그리스도와의 연합』 p.233).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형제와 자매들과 서로의 연합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1. 고별강화(Farewell Discourse): 성찬이 제정되는 정황(요 13~17)
지난 주에 성찬의 의미를 살피면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 14장 18~20절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본문 자체는 성찬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찬이 주어지는 정황은 바로 주님의 고별강화가 나타나는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 좀 넓게는 17장에 주님의 대제사장의 기도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네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만이 주님의 성찬 제정에 대한 말씀을 생략하고 있지만, 그 대신 그 저녁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셨고, 어떤 말씀들을 주셨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 정황을 중심으로 이 주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날의 식사가 정확하게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를 하는 바로 그 저녁이었는가의 논란은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주님께서 그날 제자들과 함께 하신 그 식사를 유월절 식사로 의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식사 중에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에 내가 보여준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1~17). 그리고 18절에서 주님은 이 말이 너희 모두에게 하는 말이 아니며 너희 중에 배신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유다가 그 자리를 떠남으로써 마무리됩니다(요 13:18~30). 유다가 나간 후에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요 13:31~35). 이 말씀에 따라나오는 것은 베드로의 부인 예고입니다(요 13:36~38). 자, 이 흐름을 보십시오. 서로 섬겨야 한다고 하신 후에 바로 유다의 배신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후 바로 베드로의 부인이 예고됩니다.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후에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받아주고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는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15장 12절을 보십시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다 포도나무인 나에게 접붙여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이고, 한 몸이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는데 그것이 대제사장 기도인 17장입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에서 가장 많이 반복하여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11절에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21절에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22절에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고, 23절에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 교회가 서로를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로 여기고,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이 마지막 주님의 기도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것이 성찬이 성례로 제정된 저녁의 정황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저녁,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그 식사에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2. 애찬(Love feast/Agape)과 성찬(Eucharist)
성찬이 이렇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식사와 성찬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무엇을 했는지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 교제, 식사(성찬), 기도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교제와 떡을 뗌을 생각해보지요. 교제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물질을 나누는 것 혹은 교회 안에서의 구제를 포함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성찬에까지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일 때, 서로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이 때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을 행한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음식을 가지고 올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종들이 있었는가 하면 부유하고 여유로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로 부유한 사람들이 음식을 충분히 가지고 와서 가난한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성찬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애찬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유다서 12절을 보지요.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여기서 애찬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가페’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 거룩한 애찬을 흥청망청 마시고 먹어댐으로써 더럽힌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아니더라도, 이 거룩한 식사는 종종 부작용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 사도가 주님의 성찬 제정에 대한 말씀을 꺼내는 이유입니다. 17절에서 사도는 성찬이 유익이 아니라 도리어 해롭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교회 안에 분쟁과 파당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음식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자기 것을 먹고 배부르고 마시고 취하는 한편, 남의 집에서 일을 하는 가난한 종의 신분을 가진 형제들은 늦게 도착해서 이 거룩한 식사에 참여하려고 하면 이미 다 먹어버려서 남은 것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 일들이 민망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21절 말씀입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그들은 늦게 오는 형제들은 기다려 주는 배려를 하지 않았습니다(33). 자기 것을 가지고 와서 먹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의 교제 자체를 깨뜨릴 뿐 아니라, 명백히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신 의도를 무시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교회를 깨는 일이며 성찬을 더럽히는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셨던 그 저녁의 정황을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이런 부작용들이 아마도 후대에 성찬과 애찬을 구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2세기 중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의 기록에서 처음 그런 구분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예배 안에 들어가는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애찬과 성찬이 구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조금 더 지난 4세기 말 크리소스톰은 애찬이 또 방탕해졌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4세기 말 어거스틴은 성찬식은 예배 가운데 행하되, 방탕함의 요소 때문에 애찬 자체도 금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일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고, 인간의 죄성이 주님께서 제정하신 은혜로운 성찬을 얼마나 더럽힐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본래 성찬식은 ‘주의 식탁’, 주님께 속한 만찬이라는 의미인데(고전 11:20), 그것이 육신적 의미로는 배부른 식탁이 되지 않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성찬은 언약 공동체에게 주신 성례
하지만 육신적으로 채움을 받는 것에 주의 만찬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식탁에서 영적으로 주님 자신을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과 연합함을 경험하게 되고, 이 식탁에 참여함으로써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교회의 지체들과도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이라고 불리는 성찬은 어떤 특별한 개인들에게만 한정하여 주신 식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소위 언약공동체에게 주신 성례입니다. 주님께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신 대로, 이 식사는 주님께서 교회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는 자리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짐승을 갈라 피의 언약을 맺고 나서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언약 의식을 승인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교회를 대표하는 제자들과 함께 새 언약을 승인하는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심으로써 이 성찬을 오고 오는 교회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행할 거룩한 규례로 제정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하겠다고 부탁을 드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맺어주신 새 언약의 효력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주시려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의 맹세를 우리에게 확증해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성실한 신자가 되겠다는 자기 서약쯤으로 여기고, 성찬을 주님 위해 살겠다는 헌신 정도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표와 인이라고 하는 말은,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서약하시고, 맹세하신 언약을 확증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표와 인으로 확증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 신자가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서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언약을 맺어주신 사람들, 곧 언약 백성들이고 주님께서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신 사람들,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4. 가시적 언약 공동체인 교회: 성찬은 누가 받는가?
그렇다면 성찬을 누가 받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성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즉, 신앙을 고백하고 고백된 신앙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신앙의 참됨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완전히 순수하지도, 완전히 참되지도 않습니다. 여기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이 땅의 가시적 교회는 천상의 교회와 같지 않습니다. 누가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인가 아닌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누가 참된 언약 백성인가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중생의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만, 그 사람의 신앙 고백을 점검할 수 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회원권을 결정합니다. 고린도전서가 보여주듯이,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은 사도들이 살아있을 때에도 타락하는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에 대해서 경고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합당하게 받는다’는 것은 28절에서 말하듯이 ‘자기를 살피고’ 성찬에 참여하고 29절에서 말하듯이 ‘주의 몸을 분별하고’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돌아보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회개와 믿음, 그리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회개함도, 믿음이 없이 성찬을 받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29). 이것은 거룩한 삶을 완벽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성도는 늘 회개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받기 위해서 자신을 살핌으로써 회개함으로 그리고 주께서 이루신 은혜언약의 표와 인을 믿음으로 받음으로써 성찬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확신이 없는 연약한 신자들은 다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붙잡고 성찬에로 나아가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더 견고하게 세워주시고 확신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바, 주의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그 피로 맺어진 은혜언약 즉 복음의 도리를 분별하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언약공동체인 교회를 알고, 몸의 지체들인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살펴본 것뿐 아니라 지금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주님의 성찬 제정을 문제삼고 있는 이 맥락도 동일하게 형제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분명하게 그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 사도는 합당하지 않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무섭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30).” 고린도교회에서 합당하지 않게 성찬에 참여한 자들이 병들고 심지어 죽게 된 자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징계의 표였습니다(31~32).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성찬의 남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찬이 남용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 성찬을 매주일 보다는 드물게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 대한 엄격한 제한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성경 보다 더 엄격한 인간의 전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횟수와 관련해서는 다만 초대교회 전통상 그들이 주일에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주님께서 성찬의 회수나 기간을 정해주시지 않았다는 것도 주지하여 지혜롭게 시행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성찬은 언약공동체인 교회에 주신 언약의 표와 인이기에, 분명한 신앙고백과 함께 세례를 받아 언약공동체에 들어온 교회의 회원들이 성찬을 받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제한적 성찬이라고 부릅니다. 이 제한적 성찬은 서로 인정해주는 다른 교단의 회원이 성찬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먼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의 믿음과 삶에 대한 충분한 만족을 제시한 후에야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가 성찬 시행에서 이런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연합이 교회의 교제의 근거다(고전 10:16~17).
성찬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대표로 하여 교회와 맺으신 새 언약의 표와 인입니다. 자기 언약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경험하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 그리스도의 몸 안의 지체들과도 깊이 연합됨을 경험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을 공급받습니다. 성찬, 주의 만찬, 주님의 식탁은 교회를 하나로 세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이 식탁이 언제나 기쁨이 충만한 식탁이 되었다는 것을 읽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이 기쁨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주어진 구속을 기뻐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주님의 식탁은 기쁨의 식탁이었습니다. 그들은 다 이 한 떡에 참여함으로써 참된 코이노니아가 일어났고 경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도행전 2장 47절에 기록한대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약공동체인 교회가 성찬을 통해서 언제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 중심을 떠날 수 없었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을 통하여 그들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6. 성찬을 준비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서 아직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고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은 어떻게 다음 주일의 성찬을 준비해야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주님의 식탁에 참여할 은혜를 간절히 구하심으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믿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내가 믿나이다. 내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라고 자비하신 주님께 구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주의 식탁에 참여한 자들이 마지막 날에 천국의 잔치에 앉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 여러분 중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교인들은 성찬을 합당하게 받기 위해서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하여 성도들과 깊이 하나가 되는 은혜를 구하며 성찬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형제들을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벧전 1:22). 성찬을 통하여 우리가 주를 더욱 사랑하고, 주께 접붙임을 받은 형제와 자매들을 향한 사사랑 불일 듯 일어나게 하시는 복된 역사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그 마지막 날에 그 복된 잔치에 참여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