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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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7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 - 당신은 그리스도인 입니까?

고린도후서 13:5, 베드로전서 1:6-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5-25

말씀내용
1. 정체성(identity):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던지고 받는 수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이것 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는 다른 서신들처럼 분명하게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서두에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소아시아의 특정 지역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쓰여진 편지입니다(고후 1:1).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에게 쓰여진 편지이지만, 서신을 마치면서 사도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테스트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번 설교 시리즈의 주제인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 구원 얻는 믿음인지를 테스트할 수 있습니까?
2. 그리스도인의 정의(definition)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은 의당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수리아 안디옥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레이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수식해주는 많은 조건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가령, 남자이고 남편, 아버지이고 목사와 같은 수식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섰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냐?”는 질문일 것입니다. 네 믿음이 진짜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3. 참 신앙과 거짓 신앙,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
비록 초대교회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였지만, 거기에도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은 공존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거짓 신앙을 가진 위선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자들을 멀리할 것을 경고합니다(딤후 3:5). 또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는데, 이와 같이 명목상의 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계 3:1). 주님께서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혼인 잔치의 문 앞에 이를 때까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마 25:1~13). 열 처녀는 모두 등을 들고 있었고 모두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등 안의 기름이 있는지의 여부는 겉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그들 모두가 혼인잔치의 문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거짓 신앙을 가지고도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증거들을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영접 기도를 했고 강단 앞으로 나와서 결신을 했다는 것, 또는 세례를 받았고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있다는 것,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등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 내면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신비한 사건이기에 객관적이고 외적인 모양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4. 하나님의 판단과 그 기준(고전 4:3~5; 7)
성경은 우리에게 남의 신앙을 판단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 조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기준이 무엇인가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세상에서 그랬듯이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성공과 명성으로 판단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가장 귀한 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7절에서 설명한 대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유무가 결국은 오늘 설교 제목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하는 질문과 통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분명히 사도 베드로는 믿음을 금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금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통화 기준의 하나입니다. 지폐는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는 일이 있어도 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믿음은 금보다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9절에서 말한 대로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하나, 믿음뿐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하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는 것입니다.
5.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주제가 왜 중요한가?
이제 우리가 다룰 주제,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왜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지를 좀 더 설명 드리지요.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신앙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성경이 전반적으로 그런 기준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유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하나의 목적은 무엇보다 우리가 스스로 착각하지 않고 참된 신앙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거짓 신앙을 가지고 안심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거나, 우리 자신이 위선적인 신앙의 자리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경고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 위선적인 자리에서 착각을 하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지옥의 문 앞에서 깨우는 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듣게 될 때, “나는 한 번도 제 신앙이 거짓일 것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도록 미리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 그저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이런 주제의 말씀은 더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 시리즈의 부정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신자들이 최소한 거짓 교사들 그리고 거짓 신자(위선자)을 분별함으로써 실족하는 일을 예방하는 차원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갈 것을 경고하셨고 그들을 열매로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5~27).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자기의 믿음을 허물게 되는 치명적인 실족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런 주제의 말씀을 듣다 보면 연약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낙심에 이르게 되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펄전이 그렇게 말했듯이, 참으로 이런 말씀을 듣고 자기 영혼에 대해서 근심할 수 있다면 그를 위해서는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히려 소망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말씀을 듣고도 자기 영혼에 대해서 별로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심각한 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자신의 영혼에 대한 낙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사 42:3)”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연약한 믿음 가운데 계시는 분들이 “아, 내가 너무나 연약한 신앙 가운데 있구나. 더 확실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더 견고하고 확실한 데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6. 시련(trial)과 분별(6~7)
오늘 본문 6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시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을 언급합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1절에서 보았듯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련이 믿음과 관련해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A. 시련은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준다(6).
첫째는 시련이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준다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었기에 그들의 ‘믿음의 확실함’은 시련을 통해서 더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산 소망을 가지고 시련을 견딜 수 있었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6절에 ‘그러므로’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3~4절을 보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산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입니다. 참된 믿음은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나를 아시며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하여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히 11:6). 그들은 장래의 소망이라는 렌즈로 그들이 경험하고 살아가는 현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여러 시련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라고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장래의 소망과 은혜의 렌즈로 현재를 보는 사람이고 그러기에 그들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라본 장래의 산 소망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늘에 간직하여 두신 것이었습니다.
B. 시련은 신앙을 연단하고 강하게 한다(7).
시련은 믿음의 진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불로 금을 연단하듯이 믿음을 연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수 많은 불순물들과 함께 섞여 있는 우리의 믿음은 시련을 통해서 순수한 믿음으로 정제됩니다. 이것을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썼습니다(7).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자는 시련을 통해서 불을 통과한 금처럼 순수하게 된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롬 8:28). 이것을 알았기에 시련을 인하여 잠깐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저들이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7.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안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전반기에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제1차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매우 격정적이고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종교적 현상들을 보면서, 참된 신앙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확실하고 믿을만한 증거들인 것과 아닌 것들을 제시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쓴 책이 Religious Affection (신앙감정론)입니다. 그 책의 서두에 그가 채택한 구절이 베드로전서 1장 8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가 왜 이 구절을 선택했을까요?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자의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이며,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말했던 종교적 감정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중에 살펴보더라도,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신앙감정(religious affection)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사도는 예수님을 본 사람이었지만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육신으로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와 수신자들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도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두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볼 수 없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사랑하는 주 예수님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락방에 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 의심하던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사도 베드로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여러분, 단지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 예수님을 ‘사랑했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예사로운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로 모든 박해와 핍박이라는 시련을 감당할 힘을 주었고,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이 아니라 전인격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기울어지는 자입니다. 이 사랑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유한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하고 영원하시며 완전한 아름다움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하늘의 기쁨이고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이고 주님이 누리셨던 기쁨입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 질문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현실적으로는 시련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산 소망과 믿음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힘이 있어서 일평생을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부인하는 자는 아닙니까? 여러분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는 아닙니까?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