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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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62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6) -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갈라디아서 4: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9-14

말씀내용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빛과 열의 균형> 갈 4:19



저는 작년 5월 5일 주일에 [오해에서 확신으로]라는 큰 주제 아래서 시작한 주제 설교를 오늘 62번째로 마치려고 합니다. 그 안의 소주제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라는 주제로는 16번째 설교입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율법과 복음>, <하나님 중심적 예배> 그리고 <고난과 영광>이라는 소주제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더 다루고 싶은 주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은 서둘러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로마서를 여러분에게 강해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여기서 주제 설교를 일단 마치려고 합니다. 이제 교회 창립 주일이 다가오기에 교회와 관련한 작은 시리즈 설교를 몇 차례 하게 될 것이고 종교개혁주일과 감사주일을 그 사이에 또 지나게 됩니다. 제 마음은 급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로마서 강해를 11월 초순 경에는 시작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1. 참 신앙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신앙이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명제는 참 신앙은 균형이 있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신앙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평생을 신앙 생활을 하시는 동안에 늘 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피면서 가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한 쪽으로 치우친 신앙이라고 할 때 대략 무엇을 말하는지 그림이 그려지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지만 성경은 등한히 하는 경우,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지만 미성숙한 경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우, 다른 사람의 죄에는 민감하고 통렬하나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는 경우, 사랑을 많이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것이 단지 자기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 한정된 사랑인 경우...... 다 열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너무나 미숙해서 그럴 수도 있으나 거짓 신앙이기가 쉽습니다. 그 성경적 근거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구원에 있어서 성화란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사람 안에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전인적인 변화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도는 로마서 8장 2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셔서 이루시려는 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바라는 목회의 열매는 신자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모든 목회자들이 신자들을 향하여 가져야 할 합당한 목표입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목표가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통해서 사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고(요 1:14),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셨습니다(골 1:19). 이런 그리스도의 형상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조화와 균형이라는 것은 참 아름답고 안정적인 것인데, 이것이 성 삼위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났고, 그 창조물 안에도 나타난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조화와 균형을 볼 때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것을 편안하게 생각하지만, 부조화와 불균형을 보게 되면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완벽한 세상의 질서와 조화를 깨뜨렸습니다. 구원은 깨어진 이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신앙이 심한 불균형과 부조화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균형의 요소가 참된 신앙 안에는 있는 있는 것이고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점점 더 온전한 균형으로 가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균형은 여러 면에서 다루어질 수 있지만 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빛과 열의 균형을 다루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식과 열정의 균형입니다.

2. 거짓 신앙의 두 양태
먼저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불균형적으로 드러나는 거짓 신앙의 두 양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A. 오해된 지식이 열심을 만날 때(롬 10:2; 갈 4:17)
첫 번째는 빛이 없는 열, 즉 지식이 없는 열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종종 보았듯이 로마서 10장 2절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거짓 신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여기에 거짓 신앙의 문제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는 거짓 교사들의 열심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갈 4:17).” 사람들은 열심을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열심은 분명히 성경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언제나 참된 지식과 함께 갈 때에만 바른 신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늘 분별하셔야 합니다.

B. 참된 지식이 냉냉함을 만날 때(계 3:19)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 경고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이들의 신앙은 미지근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믿는지 믿지 않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미지근했습니다. 주님은 열심을 내라고 명하십니다. 참된 신앙은 열심이라는 요소를 생략할 수 없습니다. 여기 ‘열심’이라는 단어는 조금 전 로마서 10장 2절이나 갈라디아서 4장 17절에서 유대인과 거짓 교사들에게 사용된 바로 그 단어와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바른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열심이 없는 지식이 이들이 문제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 신앙의 불균형성은 전적으로 거짓 신앙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참된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자신의 열심 없음을 정당화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주님의 이 경고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평생 신앙 생활을 하면서 주의해야 할 양 극단입니다. 참된 신앙의 조건은 빛과 열 즉 참된 지식과 열심의 균형입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참된 신앙: 빛(참된 지식) + 열(열심)

A. 빛: 성경 + 성령님(시 119:18; 고후 4:6; 3:18)
조나단 에드워즈는 빛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적이고 영적인 빛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들의 신적인 탁월함을 참되게 깨닫는 것이며, 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에 대한 진리와 실재를 확신하는 것이다.”(대표설교선집, p.219). 본래 중생하지 않은 자연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과 반감 그리고 진리에 대한 편견이 본성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연인에게는 사고할 수 있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진리의 지식이 들려질 때 그것을 어느 정도 지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거나 지적으로 동의하는데 까지도 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 안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인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듭나는 은혜를 입기 전까지는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설교를 듣는 일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도리어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반이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을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몫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지요. 이 진리의 지식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머리에 교리에 대한 개념을 심어줄 수는 있지만 우리 가슴에 교리가 신적으로 탁월하다는 감각을 주지는 못합니다...... 비록 교리나 명제 자체는 말씀으로 전달되지만 그 교리의 탁월함을 보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스도가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성에 전달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은혜로우심이 탁월하다고 깨닫는 감각은 직접적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대표설교선집, p.225). 이 말은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할 필요를 잘 가르쳐줍니다.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사람 모두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헛된 수고를 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그 놀랍고 기이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눈을 열어서 보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이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로 앞의 5절에서는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셔야만 한다는 것이 6절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전해지는 복음, 가르쳐지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 자체가 빛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신자의 마음에 성경의 진리를 비추어주시는 것, ‘조명’(illumination)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때 신자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이 말씀하듯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경적인 바른 진리가 선포되어야 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바른 진리의 지식 위에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한 사람의 인생에 처음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중생과 회심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그러므로 참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사용하여 성령님께서는 죄인의 심령을 거듭나게 하십니다(벧전 1:23 참조). 이 은혜 이후에도 신자는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복음을 아는 바른 지식을 추구해야 하고 그와 함께 성령님의 조명을 늘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B. 열심(사 9:7; 룻 3:18; 롬 12:11; 고후 11:2)
그러면 이제 열심의 문제를 보지요. 먼저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열심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 그것이 질투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질투라고 소개합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 그것은 부정적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질투는 긍정적 의미로 ‘맹렬한 보호(fiercely protective)’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도록 맹렬히 보호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약입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질투라는 것이 결혼이라는 언약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언약은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자기 백성의 사랑과 충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임스 패커의 말대로, “하나님의 질투는 지극히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칭송 받을만한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완전하고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되돌려 놓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질투 곧 열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은 열정적으로 자기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령,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다”는 구절이 구약 성경에 나옵니다(사 9:7; 37:32).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질투하시는 사랑으로 이루시겠다고 하는 일종의 자기 맹세와 같은 것입니다. 그 일을 마치기 까지는 결코 쉬지 않으는 열심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하나님 자신이 참되실 뿐 아니라 열심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과 작정은 참된 진리이고 그 참되신 뜻이 성취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그저 며칠 뜨거워졌다가 식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아들을 율법 아래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갈 4:4). 하나님의 뜻은 이루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는 열심은 이와 같이 지속적이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까지 행하는 열심입니다. 룻의 남편이 된 사람 보아스의 성품에 대한 성경의 간접적 칭찬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시어미인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보아스에 대하여 하는 말인데, 룻기 3장 18절입니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을 닮은 한 단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복음의 영광스러운 교리를 설명하기를 마친 뒤에 권면하기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고 합니다. 여기서 ‘열심을 품고’라는 말을 직역하면 ‘영혼이 불붙게 하라’는 말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나귀 같이 늘 게을러서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오직 우리의 영이 활활 타올라야만 우리의 게으름은 고쳐질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선한 일을 행하는 데 부지런 하려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그런 열심을 불 붙여주어야만 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열심은 성령이 주셔야 하는데도 왜 바울은 우리에게 이러한 열심을 품으라고 권면하는가 반문할 수 있다. 나의 대답은 그런 열심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 성령을 질식시키거나 소멸시키려는 까닭에, 자신의 나태함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에 의해 불 붙여진 열심을 품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본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의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복음을 아는 증거는 어떻게 드러나야 합니까? 성령님께서 복음의 말씀으로 붙이신 불이 그들의 심령에 계속 타오르도록 복음을 견고히 붙잡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성취되기까지 쉬지 아니하고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진리를 압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는 어떻게 드러납니까? 바로 이 심령의 불로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이 불은 활활 타오를 때도 있지만 불씨만 남은 듯 약해질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열심을 품고’ 즉 ‘영혼이 불붙게 함으로’ 주를 섬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 열심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 열심은 또한 언약에 대한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과 복종에서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충성과 복종과 사랑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열심을 다하는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복음의 진리를 알고 경험했다면 그들은 뜨겁다는 오순절 교회보다 더 뜨거워야 합니다. 그 뜨거움은 그저 예배 시간의 뜨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며,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완전히 꺼져버리지 않는 불입니다. 보아스가 그랬듯이, 그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열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열심입니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바울 사도에게도 있는 것을 봅니다. 무엇이 이런 열심을 만들어냅니까?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열심입니다. 그러나 이 열심의 정도는 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칼빈의 말대로, 우리의 나태함이나 세상을 사랑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열심에 의해서 우리 심령의 열심은 질식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3.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빛과 열을 균형 있게 추구하는 것(빌 2:12)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고 그 일을 열심으로 행하십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열심으로 수고하는 것은 바울 사도만이 아니라 실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 기초 위에서 우리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을 받습니다(빌 2:12).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부르심에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성경은 적당히 믿어서 지옥에 가지 않을 만큼만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A.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십시오(딤후 3:14).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빛과 열을 균형 있게 추구해야 합니다. 요즘과 같이 진리의 혼돈이 깊어지고 있는 시대에 여러분은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기 위해서 더욱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자리로 가셔야 합니다(딤후 3:14; 2:15). 그 말씀이 아무리 옳아도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저는 개척해서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성경을 읽으시라고 귀가 따갑게 강조해왔습니다. 이제 좀 더 말하겠습니다.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부지런히 연구하십시오. 성경은 여러분이 평생 공부하고 배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SV 스터디 바이블과 같은 도구들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그 일을 행하십시오.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이 심령에 확신을 주고, 주의 모든 말씀이 성취되도록 열심을 품고 순종하며 살아가십시오. 세월이 흐른 만큼 기독교의 초보자의 자리를 벗어나십시오(히 5:12). 이것이 우리가 받은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온전함과 균형과 조화를 이룬 그리스도인으로 자라십시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어른이 되는 길입니다. 10년 후, 혹 20년 후 여러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경건한 어른들인 여러분 자신과 경건한 어른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로 채워지게 하십시오.

B. 그리스도만 바라보십시오(히 12:2).
이제 한 가지만 더 권면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란 주제의 말씀들을 들으면서 많이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셨을지 모릅니다. 그 고민만을 붙잡고 앉아있는 것이 구원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만을 살펴볼 때 구원의 확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목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서 구원의 확신과 즐거움을 앗아갑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매일 매순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은혜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찬과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부지런히 나아가십시오. 물론 신앙 생활을 잠깐 하고 말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하여 제시되는 기준들을 가지고 종종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여기에는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려는 모든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근거로 삼고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나 세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나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더 잘 믿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두신 복된 은혜를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시 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