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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오해에서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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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61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5) - 인내하십니까 ?

히브리서 6:1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9-07

말씀내용
<인내하십니까> 히 6:11~12



1. ‘한 철 신앙’은 아무리 뜨거워도 참된 신앙이 아니다(히 6:4~6).
우리는 지난 주에 참된 신앙의 증거로서 행동의 실천이라는 열매가 중요하다는 주제를 상고했습니다. 신앙의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배교를 하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실상 가시와 엉겅퀴라는 열매를 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적 활동들이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참된 열매를 내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이 거짓이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많이 속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양상들을 열매로 착각하여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게 되고 그 사람이 넘어지면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뜨거울 수도 있고 성경에 해박하여 가르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구원에 속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히 6:9~10). 히브리서 기자는 3~4장에서 그 예를 들었습니다마는, 6장 4~6절은 구약 시대에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신 4:33).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안식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한 철 신앙’은 아무리 뜨겁고 종교적 향기를 내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 참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인내로 자기를 증명합니다. 끝을 봐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어지는 본문에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라고 말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계속해서 맺되 끝까지 맺으라는 권면임과 동시에 참된 믿음은 그렇게 하도록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빌 1:6).

2. 참 신앙은 인내한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12)”
인내가 참된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은 사실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중요한 명제입니다. 본문 12절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라고 한 것은 동의어 반복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믿음과 인내는 본질상 같은 성질에 속하는 단어들입니다.

A. 성경(히브리서)에서 인내와 믿음은 동의어다(히 6:11~12; 3:6, 14)
실제로 성경이 인내와 믿음을 동의어 반복처럼 사용하는 예는 먼저 히브리서 3장 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자칫 이 말씀은 구원이 인내라는 조건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는 말은 인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굳게 잡고 있지 못하면 그의 집, 그의 백성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떻게 죄인이 구원을 받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들이 받은 그 믿음은 끝까지 굳게 잡고 있게 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는다는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3장 14절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이 말씀도 구원이 복음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조건으로 성취된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구원은 잃어버려질 수 없고 끝까지 복음을 붙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인내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인내에 의해 구원받는다. 구원이 달려있는 이 믿음 중에서 인내야말로 믿음을 구원에 합당하게 해주는 기본 요소다. 인내 없이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비록 죄인이 그의 첫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지만 그 칭의에서 하나님은 인내가 그 믿음의 첫 행위 안에 암시되고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인내는 따라오게 되어있기 때문이다(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인내는 (첫번째 믿음의 행위에서 보여졌던) 믿음에 포함되어 있는 속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가 첫 믿음의 행위에 포함된 것으로 받아들여짐이 없이는 죄인이 처음 믿었을 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며 죄인이 믿음에서 끝까지 인내했을 때까지 칭의는 보류되어야 할 것이다.”

B. 신자는 믿음으로 죽는다(히 11:13).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박국을 인용하여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했습니다(히 10:38). 그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죽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시작만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끝도 믿음으로 마친다는 말입니다. 평생 신앙 생활을 하다가 임종의 순간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죽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시험에 들 일이 아니라 슬프고 안타깝지만 분별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은 평생 주님을 믿고 산 적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 자는 믿음으로 죽습니다. 인내와 관련해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 그 결말은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는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고 인도했던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주의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한 때 그들이 얼마나 탁월한 설교자였는가를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 때 그들이 얼마나 큰 능력을 행했는지를 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적지 않은 지도자들의 배교로 인해서 힘겨워하던 교회를 향하여 그 지도자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 깊게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믿음을, 그들의 인내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주의를 가볍게 여깁니다. 결말까지 볼 여유가 없이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지도자를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추종하는 사람 자신의 영혼에도 매우 해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죽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어주실 것을 바라는 소망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그들은 여전히 약속을 이루실 것을 소망하면서 임종을 맞았다는 말입니다.

C. 참된 믿음은 시련 가운데서 인내한다.
인생을 사는 동안에 많은 시련을 통해서 연단된 믿음이 마지막으로 해내는 일이 바로 믿음으로 죽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2~34절을 보지요.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빛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6장 4절에서 본대로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아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고난의 큰 싸움이 왔는데 그들은 견뎌냈습니다. 또 비방과 환난, 사람들의 조롱을 받아야 했고 그런 사람들끼리 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혔고 소유를 빼앗겼으며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인내했던 것입니다. 이런 인내를 통해서 그들의 믿음은 더욱 연단되었고, 그 믿음은 죽음이라는 인생의 가장 깜깜한 시간에 가장 찬연하게 빛을 발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박해가 심했던 초대교회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주의 백성들에게 자기 집에서 임종을 맞는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그들의 믿음의 선배들의 모범을 11장 35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제시하며 격려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리고 37~38절에 계속 말합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렇게 참된 믿음은 모든 시련 가운데서 인내하는 믿음이고 그 믿음은 죽음의 시간에 가장 밝게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3. 소망이 인내의 연료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엡 1:18; 히 10:34,37)
좀 더 구체적으로 인내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들의 인내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물론 믿음이 인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좀 더 설명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라고 말합니다. ‘소망이 가득 차게 되기를’ 원한 것인데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 믿음의 공동체를 향해서 가진 목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에베소서를 쓸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8).”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자신들이 가진 소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왜 사도들은 성도들이 이 소망으로 가득 차기를 원한 것일까요? 그것은 이 소망이 인내의 연료였기 때문입니다. 인내라는 기관차는 소망이라는 연료를 태우면서 가는 것입니다. 다시 히브리서 10장 32절 이하의 말씀을 보지요. 34절 하반절에서 그들이 그 심한 시련과 고난을 견뎌낸 이유를 밝힙니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이것이 그들이 지닌 소망이었고 소망의 충만함이었습니다. 37절에서 다시 격려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신자의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유명한 11장,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이 바로 너희가 가진 소망이었어”라고 그들이 구약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이야기들을 나열하면서 입증하는 것입니다. 먼저 11장 1절에 믿음의 정의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소망의 확증이고 증거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다는 것은 바로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모세도 소망으로 인내한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인내는 소망을 필요로 합니다. 인내는 소망이라는 연료로 힘을 얻습니다.
이런 것을 기억하고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읽으면 이해가 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신 사람에게 성령님은 믿음과 함께 산 소망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로 로마서에서 썼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여기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말은 믿음이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인가 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소망으로써(by hope) 구원을 얻었다’가 아니라 ‘소망 안에서(in hope) 구원을 얻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소망이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이 성취되는 과정 혹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그 구원이 완성되게 될 날을 바라고 기다린다는 점에서 소망은 믿는 자에게 믿음과 함께 필수불가결의 요소이고, 이것이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을 보지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기서 역사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믿음이 만들어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만들어내는 수고(섬김)입니다. 지난 주에 살핀 히브리서 6장 10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리고 세 번째로 말한 것이 ‘소망의 인내’ 즉 소망이 만들어내는 인내입니다. 소망이 없이 인내는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흔들리는 이 공동체를 향하여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인내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4. 성도의 소망(고후 5:2; 롬 8:23; 빌 1:23~24)
저는 말씀의 결론으로 가기 전에, 성도가 가진 소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할 필요를 느낍니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할 이유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과연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종종 죽음을 사모하는 듯한 표현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가령, 빌립보서에서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2~23).” 또 고린도후서 5장 2절에서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 사도가 갈망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고,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순간 그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됩니다. 빌립보서의 말씀은 다분히 이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후서의 말씀은 그가 원한 것은 단지 죽음으로써 육체의 몸을 벗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 영화로운 몸을 입는 것, 즉 우리 구원의 완성인 영화(glorification)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부활을 위해서 지나야 할 단계일 뿐, 사도가 죽음 그 자체를 바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신앙감정론>에 이런 주의 사항을 덧붙여야 했습니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 갈망이나 죽고 싶은 갈망은 좀 더 거룩한 마음을 추구하는 갈망과 같이 참된 성도를 구분짓는 특징은 될 수 없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사실 이와 비슷한 갈망을 그의 일기에서 표현하곤 했습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뵈옵는 것이다. 오, 나의 약하고 지친 영혼이 내 아버지 집에 도착할 날을 갈망하나이다!”(1742년 6월 12일 토요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이런 성향에 대해서 그의 전기를 쓴 존 쏜버리(John Thornbury)는 이렇게 잘 설명했습니다. “그가 자주 죽고 싶다고 표현한 것은 단지 이생의 고난과 역경을 회피하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런 동기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는 천국에서의 최종적인 모습이 생애 최고의 목표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에게 매달려 있는 죄의 굴레로부터 그를 궁극적으로 해방시켜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17세에 목이 부러져 어깨 아래 전신 마비로 지금까지 47년을 불구의 몸으로 책을 쓰고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조니 에릭슨 타다의 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육체를 얻는 것이 나의 관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죄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의로움으로 옷 입게 될 날이 기다려져서 안달이 날 지경입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천국이 주는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23절에서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말씀했을 때 의미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탄식하는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경지의 신앙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탄식이 있습니다. 바로 몸의 속량,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비록 더 이상 죄의 노예는 아니지만 아직도 죄 가운데 종종 넘어지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로서의 탄식입니다. 참된 성도는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우리 몸이 부활하여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날, 우리를 넘어뜨리고 불행하게 하고 비참하게 하는 모든 죄의 세력을 짓밟아버릴 날을 탄식하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 소망의 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그 날에 우리는 그 모든 죄악을 짓밟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인데, 죄는 종식되고, 우리는 부활하여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혼인잔치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런 성도의 소망에 대하여 이렇게 도전합니다. “여러분이 천국에서 찾고자 하고 소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천국의 안식입니까? 고통과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입니까? 여러분은 그런 모든 것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천국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그분의 얼굴을 보고 또 보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갈망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열망하는 천국은 거룩함의 천국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면서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내 마음은 천국과 그곳에 있는 즐거움, 완전한 거룩함과 겸손 그리고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묵상으로 온통 사로잡혀 있다.” 여러분, 이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거듭난 자들에게 주신 산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소망이 너희 안에서 작게 존재하지 않고 가득하고 충만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5.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할 이유가 명백하다.
이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부분들을 살피면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A. 본받는 자가 되라.
히브리서 기자는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미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의 예고편을 띄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본받기 위해서는 먼저 그 믿음의 선배들의 모범을 주의해서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인내)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할 한 가지 이유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반드시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의 전기를 사서 읽어야 하고 그들이 쓴 경건서적들을 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 큰 가치를 지닌 것이지만, 그리고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책들을 읽으시라고 강력하게 권고 드리지만, 사실 성경 한 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이 말씀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B.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추구하라.
이제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그리고 ‘게으르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보십시오. ‘동일한’ 부지런함이라고 말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 교역자와 직분자들은 부지런하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똑 같은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믿음과 오래 참음(인내)을 배우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다시 ‘게으르지 아니하고’라고 강조합니다. 이 일을 가끔 시간이 주어지거나 한가할 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휴가를 보낼 때 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언제나 매일 우리는 부지런히 그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존 오웬은 신앙의 주적(主敵)을 우리 안에 있는 ‘게으름’이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이 글을 읽었을 때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내 이것이야말로 정확한 성경적 지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게으름이라는 환경 속에서는 질식 당하여 그 힘과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리처드 필립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에 있어서의 부지런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늘어가는 기쁨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풍성함을 점점 더 많이 인식하고 소유하게 한다.”
여러분, 참된 믿음은 끝까지 인내합니다. 그저 죽지 못해서 견디는 것을 인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인내 속에서 참된 기쁨을 알고 누리게 합니다.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다”고 한 말을 보십시오(히 10:34). 이것만이 아닙니다. 성도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너머에서 하나님을 뵐 것입니다. 성도는 부활의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원히 하나님을 대면하고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살 것입니다. 저는 종종 저의 죽음의 자리를 생각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내느라 장례식을 하고 있겠지만, 정작 저는 생애에 경험해보지 못한 성대하고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왕의 환영식에 참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천군과 천사들은 나팔을 불며 노래하며 저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영원토록 사랑하는 구주와 함께 하나님을 뵈올 것입니다. 제 인생의 어려운 시련을 지나야 할 때마다 이런 소망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인내하게 하는 연료가 되는지를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소망이 여러분 안에 가득해지기를 저는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부지런함으로 매일 게으르지 말고 믿음의 선배들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그리고 믿음과 인내를 배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