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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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60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4)- 열매를 맺고 사십니까 ?

히브리서 6:4-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8-31

말씀내용
<열매를 맺고 사십니까> 히 6:4~10


1. 열매 없는 교회 현실
여러분,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열매를 맺고 사십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열매가 있습니까?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길 수 있는 매우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근거는 그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삶에서 맺고 있는 열매입니다. 이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 즉 삶의 증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총체적인 문제는 그 삶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입니다. 그 구멍이 너무나 커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메워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행동과 실천 즉 열매가 없는 신앙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교회는 수치를 덮어쓰고 있습니다. 물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도 넘어질 수 있지만, 총체적으로 교회 전반에 걸쳐서 터지는 문제들은 쉽게 설명하고 넘어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물신숭배가 교회에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윤리적 삶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과 조금의 차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 있는 탐욕은 신앙이 감당할 수 없는 탐욕이고 심지어는 탐욕을 충족시켜주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소위 번영 신학이라는 것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단순히 “도덕을 개혁하자” 혹은 “삶을 회복하자”하는 식의 캐치프레이즈로 교회와 그 도덕이 회복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가 도덕적인 문제이기 전에 영적인 문제이며, 이 영적인 문제의 핵심에는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큰 주제인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 스스로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서는 어떤 열매도, 삶의 증거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제 한국의 한 대학생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청년은 팟캐스트로 제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하면서 그 말씀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과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조금 인용하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는 구원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고, 여기있는(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시고 잘될 거다, 축복이 있을 것이다 번영할 것이다 라는 식의 설교를 많이 하십니다......목사님의 구원론 설교를 아이튠즈를 통해 듣고 있는 중인데 거기서 말씀하시는 것과 저희 교회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나 다릅니다.” 자, 이런 혼란이 한국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전혀 혼란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목자의 음성이 들리는 주님의 양들들은 어떨까요? 성경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떨까요? 그들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한 단면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형국에서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맺어지는 참된 열매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 된 것입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외 없이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삶의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적 명제 앞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어 봐야 합니다.

2. 열매가 정말 믿음의 표지인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신앙감정론>에서 이 실천(열매)의 문제를 맨 마지막에 다루면서, 열매의 문제는 참된 믿음에 대한 다른 모든 표지들을 확증하고 그 으뜸이 되는, 표지 중의 표지라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참된 신앙의 믿을만한 증거들은 다 이 열매를 통해서 외적으로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열매의 문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언급했듯이, 먼저 이웃과 형제들에게 그 믿음의 신실성을 입증해주고 둘째로는 자기 양심에도 뚜렷하고 확실한 증거를 줍니다.

A. 열매는 이웃과 형제들에게 믿음의 신실성을 증명해준다.
주님께서는 열매로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7:16,20). 열매는 겉으로 드러나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또 착한 행실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앞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5:16). 착한 행실로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적어도 이 점에서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본문 4~6절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난해구절이라고 분류하지만 그 내용이 오히려 분명합니다. 배교자가 많이 있던 1세기 유대인 공동체 교회를 향해서 쓰여진 히브리서는 남아있는 신자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격려하고 소망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이 구절들이 말하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가 신앙을 버림으로써 구원이 취소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이들은 공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회개를 했고, 세례를 받았고, 성찬에도 참여하였으며 교회의 모든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인정할만한 신앙의 가진 사람들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배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았다’는 말은 2세기 초대교회에서 회심과 세례를 의미하는 관용적 용어였다는 점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말은 성찬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좁게 이해하거나,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표현을 묶어 그들이 명백한 회심의 증거를 보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라고 표현합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모습도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지도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의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배교를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흔들리게 되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들을 볼 때 그들에게는 많은 신자 됨의 증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열매, 실천 즉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 행위에서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신앙의 자리를 떠남으로써 그간 그들이 보여주던 신앙의 모습들은 사실상 참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논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교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은 믿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중생하지 않았고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의롭다 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구원을 받았다가도 한 순간에 다 날라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이 6절에 “다시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는 말씀을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어떤 것이 회개하게 할 수 없는 상황일까요? 여기서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이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회개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말씀을 보아도 전혀 두려움이 있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이 말씀이 가리키는 사람일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7~8절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앞에서 4~6절에서 말한 그 사람들은 다른 신앙적 모습들이 많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비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농부가 열심히 밭을 갈지 않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농부가 바라는 합당한 채소를 내지 않고 도리어 가시와 엉겅퀴만을 낸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열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같이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고 봉사하고 모든 은혜의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열매로 그들은 그들의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10절에서 권면합니다. 9절에서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니”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열매 없음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10절에서 그것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 즉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행위의 실천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는 것을 지적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거나 그것을 수호하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야고보서 2장 17~24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있다는 것이고 그 행함이 믿음의 참됨을 이루고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행위의 실천, 열매 보다 더 신앙의 참됨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B. 열매와 행위는 자신의 양심에 분명한 증거가 된다.
지금까지 이웃과 형제들이 분별하고 판단하는 증거로서 신앙의 열매를 말했습니다. 열매라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자 자신이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고 참된 확신에 이르게 하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모든 형태의 위선은 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자기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위선이 아니라, 진짜 착각에 빠지게 되는 위선은 얼마나 더 무서운 자기 기만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각 그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십니다(렘 17:10). 예수님께서도 속지 않으셨기에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심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마 23:27). 야고보서도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하지만 여러분이 참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섬긴다고 해보십시오. 신자는 이렇게 스스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아, 하나님께서 내 안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주시는 거구나. 나는 지금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 예전에는 행하지 않던 일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자신을 보게 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때 그 심령에는 무엇이 오겠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귀한 확신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의 열매는 참된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신앙의 증거입니다.

3. 중생이 가져오는 심령의 변화가 열매를 맺게 한다(렘 31:33; 32:40; 겔 36:25~28).
어떻게 이런 변화가 한 신자의 심령 안에서 일어나는지를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신자는 중생한 사람입니다. 중생(거듭남)은 사람의 심령 안에 행하시는 성령의 은밀한 역사입니다. 중생의 가장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결과가 믿음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죽은 영혼 안에 생명의 씨를 심어 살리셨기 때문에 그 영혼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영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어질 중생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처럼 돌판에 율법을 기록하여 주지 않으시고 마음에 기록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레미야 32장 40절을 보지요.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여기서도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를 경외함’을 마음에 두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고,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고 싶은 마음을 우리 마음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께 분노하던 죄인이 그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늘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간 역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경외함을 마음에 둔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3~24).”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집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중생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6~27절을 보지요.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서도 마음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중생하기 전에 우리가 가지는 마음은 굳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고 싶어하지 않고 자기 뜻을 고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그 목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것이 중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신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싶어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순종과는 다릅니다. 못된 주인을 섬기는 종의 마지못한 의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신자의 삶에는 의무가 있고, 그것은 언제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성이 여전히 이 땅을 사는 동안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사랑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고 주님의 뜻대로 다 행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심령에는 영적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싸움을 잘 감당하고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싸움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지만, 이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4.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믿음인가, 행위인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믿음입니까, 행위입니까? 대답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분명히 아는 대답은 ‘믿음으로 심판하신다’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기준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함께 분명히 행위로 심판하신다는 구절들이 있다는 것을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은 압니다. 몇 구절만 보지요. 고린도후서 5장 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마태복음 16장 27절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또 요한계시록 22장 12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일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믿음입니까, 행위입니까? 야고보서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행위로 심판하신다는 모든 말씀은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인정해 주시는 모든 행위는 반드시 믿음으로부터 발생한 행위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말이 아니라 행함이다라는 말씀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선한 행위, 모든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만이 심판 때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님께 말하겠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7:22~23). 그들의 모든 종교적 행위와 섬김과 봉사를 주님은 불법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아무리 멋지게 잘 지은 건축물이라고 할지라도 건축 후에 준공검사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법 건축물일 따름입니다. 불법을 행한다고 하신 것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원리를 따라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등으로 들어와도 규칙을 어기면 실격을 하는 운동 선수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원리는 믿음으로 순종하고 믿음이 행위의 열매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축물은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아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5.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행위와 실천을 강조하면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느끼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행위의 실천으로 구원을 얻거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통하여 신자가 율법을 기쁨으로 지킬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복음적인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6. 믿음의 실천으로 열매를 맺으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말로 증거할 뿐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증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을 믿습니다. 성경은 이 믿음이 만들어내는 행위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행위와 실천의 문제, 열매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얻기 위해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실천의 문제, 열매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실천, 행위, 열매의 문제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 참으로 중생한 신자는 그 믿음이 삶의 열매로 맺어지는 법입니다. 이것은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기적인 인생의 목적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선을 행하려는 노력을 전혀 이루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할 뿐 아니라(고전 10:31) 무엇이든지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씀했습니다(롬 14:23). 존 그레샴 메이천은 믿음으로 행한다는 개념을 이렇게 잘 설명했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참된 믿음은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믿음의 수동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우리는 믿음으로 어떤 일을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적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어떤 일을 하는 대신에 믿음을 통해 어떤 다른 분이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어떤 일을 할 수 있기 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우리의 삶에 들어오고 그 다음에 우리가 시작할 수 있도록 전투에서 우리로 강하게 하고 지원하는 그 힘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인 것이다.”(『믿음이란 무엇인가』p.207~208 ). 그래서 사람은 믿음으로 행할 때 그 행위가 자기의 의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어떤 율법주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온전하고 복된 믿음의 교리입니다. 신자의 행위는 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행위의 실천인 열매로 그 믿음을 입증합니다. 로마서 8장 4절은 말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완전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가 육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다 이루어졌다,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하는 모든 행위는 다 신자와 연합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행위이기에, 율법의 기준에 부합하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용납하시는 행위가 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에서 영원까지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부족한 행위가 온전함을 입게 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열매로 입증하게 되는 것이고, 더욱 열심으로 선한 일을 감당하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모든 선함의 원천이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알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을 때 회개하는 심령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내가 너무나 이 보배로운 믿음을 값싸게 여기고 살았구나. 믿음의 열매를 드러내지 못한 제 삶을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는 심령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임을 알고 회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행위의 실천을 가볍게 생각했고 너무나 소극적인 실천만을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19세기의 복음 전도자 D.L.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 명 중의 한 사람은 성경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그리스도인들을 읽고 있을 것이다.” 우리를 보고 우리를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아직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분들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믿음을 달라고, 중생의 은혜를 달라고 자비하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마지막 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비참한 말씀을 듣지 않도록 지금 구원의 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자는 영원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모든 것을 성취하고 누린다고 할지라도 결코 진정한 만족도 평안도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유일하고 참된 만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18세기의 복음 전도자였던 존 웨슬리의 말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때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