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오해에서 확신으로 59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3) -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

에베소서 5:25-3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8-24

말씀내용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엡 5:25~33


1. 교회가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일 수 있을까?
교회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입니다. 교회는 어떤 추상 명사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오래 친숙하게 경험하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에 그 대답이 쉬울 수 있지만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하고 우주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 역시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따라서 다른 의미의 질문이 될 것이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명제는 참된 신앙은 교회를 사랑함으로써 그 참됨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성경은 그 질문에 대해서 단연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십니까, 아니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일 후자 쪽이라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는가 보다는 교회 안팎에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듣고 배우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간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자신들도 그 비난이 전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렇게 못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말을 하면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교회가 아름답다고 여기고 교회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교회 안에 얼마나 될까요? 만일 조금 전의 그 명제대로라면, 참된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은 다 교회를 아름답게 여기고 자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에 대한 핵심적 가르침을 상고할 텐데, 이것을 알게 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의 심령에는 교회에 대한 사랑이 일어나게 되고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교회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30; 고전 12:27; 롬 12:5; 골 1:18)
오늘 본문은 결혼 주례에 많이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물론 에베소서 5장 21~33절은 결혼 안에서 부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더 큰 문맥을 보면, 부부관계에 이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6:1~4)와 종과 상전의 관계(6:5~9)가 계속 이어집니다. 사도는 에베소서의 전반부에서 설명한 복음의 내용과 그리스도인 됨에 근거해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복음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큰 문맥인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부부관계에 대한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사실 바울 사도가 부부관계를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32절에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사랑할 것을 명하면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 상반절은 분명히 남편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25절 하반절부터 27절까지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자기를 주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지만, 어떤 남편도 자기 아내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는 또한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여 남편과 아내가 한 육체(몸)가 된다고 말함으로써(31),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같고(28)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자기 몸인 교회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29~30). 그리고 이 대목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32).
결혼과 부부관계는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이고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으니 결혼 안에서의 부부관계는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마 22:30).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 안에서의 부부관계는 사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실재입니다. 저는 부부관계가 단순한 상징이거나 그림자라고 말하는 대신 실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분명한 실재인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가리키는 실재입니다. 부부가 결혼으로써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정확하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사실상 부부 안에서 경험되는 하나됨을 넘어서는 완전한 한 몸 됨을 보여줍니다. 30절은 “우리는 그(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고전 12:27; 롬 12:5).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십니다(골 1:18). 그리스도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할 때 주님은 사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행 9: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본문 32절에서 큰 비밀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범죄하기 전에 부부였던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에는 고통이나 문젯거리들이 있지 않았을 것은 자명합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와는 아담에게 복종하고 아담은 자기 자신을 주는 사랑으로 하와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고통은 범죄 후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고 그 앞에 영광스러운 신부가 된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완벽한 하나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은 교회의 존재적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는 교회가 인간들이 만든 조직이나 제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교회가 단순히 조직이나 제도를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보이고, 구원자를 보지 못하는 세상에 구원자를 보여주는 주님의 생생한 현현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눈이 열릴 때 교회는 죄로 저주받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3. 왜 구속 받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인가?
아직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질문을 생각해보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구속 받은 개인들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을 경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과 소외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나 홀로’의 경향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교제와 사랑을 누리는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범죄로 말미암아 깨어져버린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단순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관계만을 화목하게 회복시키신 것이 아니라, 이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그것을 나누고 그들의 찬양을 더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교회라는 영광스러운 사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은 언제나 교회의 특권이고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오해 속에서 하나님과 교회를 향하여 적대적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거워하고 그 기쁨을 세상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은 언제나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인을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회복한 개인들이 아니라 교회로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단지 하나의 단체나 조직이 아니라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4. 교회의 이상(신분)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이제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왜 이 모양입니까?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말에 많은 사람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모순입니다. 이것은 “나는 당신의 영혼은 좋은데 당신의 몸은 싫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 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왜 이런 말이 나오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딜레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똑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죄를 짓는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공사 중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사 중인 사람들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칼빈은 이런 교회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지상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 천상의 교회를 승리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은 반드시 끝나게 되고 교회는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지금은 공사 중이지만, 그들은 이미 완전하신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건축을 시작하신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공사를 도중에 미완성으로 끝내시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 있어서 조금도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과 교회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건축자이신 하나님은 이미 완성된 건축물을 생각하고 계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이미 존재하는 것과 조금의 차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미완성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면서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바라보실 때에도 그리스도를 보시듯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눈에 비친 교회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이며 또한 자신의 사랑이 머무는 대상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신 교회의 청사진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5.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조건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현실에서 이상을 향해 가는 것일까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가 몸이고 그리스도가 영혼이라고 할 때 영혼과 몸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인 몸은 영혼인 그리스도와 교통을 누림으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상세히 상고해보도록 하지요.

A. 그리스도가 다스리셔야 한다.
교회가 교회이기 위한 일차적 조건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모든 지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시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과 조화의 원천입니다. 각 지체는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거나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않는 지체들이 있을 때, 교회의 하나됨의 조화와 아름다움과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 저해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하나됨의 조화와 영광과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것이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깨어지거나 손상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그 몸인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B. 각 지체들이 사랑 안에서 결속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은 세워진다.
교회가 교회이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이 서로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각 지체들이 서로 깊이 결속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그 지체들이 그리스도께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지면에 깔린 수많은 마른 뼈들을 생각해보십시오(겔 37). 그것은 그 상태로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이 하나님을 대언하여 명할 때, 마른 뼈들은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힘줄과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이고 마지막에는 생기가 들어가서 살아나 극히 큰 군대를 이루게 됩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교회 회복의 이상입니다. 지체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만큼, 그들은 성령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이 형제 사랑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해 보자’는 식의 인간적 구호와 노력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은 조직이고 제도이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단순히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는 것으로 세워지지도 않습니다. 물론 목사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세워지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께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지체들이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결속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을 보십시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형제들을 사랑하고 더 잘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에베소서 4장 12절이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것이 11절에 지도자들을 세우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되어서 영적으로 성숙하고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며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C. 성령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워진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말해야만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말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함께 말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저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능력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각 지체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각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심으로써 일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입니다. 어느 한 지체도 어리거나 연약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존귀하고 모든 지체가 다 몸을 세우는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각 지체에게 은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참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은 마땅히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일에 여러분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 은사 목록에 포함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록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완전한 목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그 은사를 열심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게 되고 우리는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6. 교회가 누릴 장래의 아름다움을 주목하라(계 21)
저는 마지막으로 성경이 주의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미래의 교회의 아름다움을 여러분과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이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먼저 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장면은 성경과 역사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창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창조를 하십니다. 여기에는 지상의 피 흘리고 전투하는 교회, 공사 중인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승리한 천상의 교회가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것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부는 성령에 의해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가지시는 교제는 더 이상 눈물이나 사망이 애통함이나 곡함이나 아픈 것으로 방해를 받지 않은 교제가 될 것입니다. 이 성은 영광으로 빛나는 성입니다(11). 그리고 그 안전함은 144 규빗 두께의 성벽(약 65m)가 보여줍니다(17). 과거의 예루살렘은 성전으로 영광을 얻었다면 새 예루살렘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 친히 계심으로써 영광을 누립니다(22). 이것이 천상의 교회, 승리한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교회의 아름다움이요, 곧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교회와 다른 교회가 아닙니다. 바로 그 교회입니다. 우리는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교회를 내가 왜 보지 못했는지, 왜 더 풍성하게 누리지 못했는지, 왜 더 사랑하지 못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7. 우리가 기억하고 적용할 것

A. 교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누리는 살아있는 교제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누리는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한자어로 교회는 가르칠 ‘교(敎)’자를 썼지만 사실 성경적 의미를 살리려면 사귈 ‘교(交)’가 더 합당합니다. 교회는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모든 선하심이 세상 속에 구현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이 실제로 임재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실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몇 명이든 참된 그리스도인이 함께 예배하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선하심에 대한 가시적 증거가 존재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모일 때마다 그리고 헤어질 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이 아름다움을 보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B. ‘나 홀로’의 성향을 꺾고 서로를 향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혼자 살아가도록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짐을 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으며 교회는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지면에 가득한 마른 뼈 조각들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서로 상합하고 결합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형제는 형제를 사랑하고 그 허물을 용서해야 합니다. 어떻게 형제와 형제 사이에 상한 관계를 풀고 용서하고 용서받지 않은 채 품고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원수로 행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허무는 모든 행위를 그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사 중인 부족한 사람들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서로 사랑함으로 무너지지 않고 세워집니다. 어떻게 몸 전체가 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곪아터지고 상하고 썩어가는 지체를 보고서 수수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작은 지체의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 몸의 문제이고 온 몸의 지체들이 상관해야 할 문제입니다(고전 12:26). 심하게는 몸 전체를 위해서 지체를 잘라내야 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고전 5:2).

8. 교회는 기독교 최후의 변증이다(Francis Schaeffer)
20세기 후반, 프랜시스 쉐퍼는 교회는 기독교 최후의 변증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말로 전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도록 자기 백성을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무수한 물방울들이 태양 빛을 받아서 만들어내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에 비교했습니다. 햇빛이 물방울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물방울에 비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미치게 되며, 물방울 하나 하나의 아름다움보다 이 물방울이 하나로 결합되어 드러내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신자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함께 세상에 빛을 비추어질 때 특별한 신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개별 신자들이 함께 모인 교회는 천상의 빛을 받아 반영하는 미술품 전시회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살면서 포기할 수 없는 교회에 대한 이상이고, 이것을 알기에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선택된 모든 자들과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자신도 교회로 말미암아 충만하게 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스도는 교회를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랑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영광스럽고 교회를 아름답게 하신 후에 그 교회의 아름다움 안에서 만족을 얻으십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처럼(범죄하기 전에 제정된 결혼으로 부부가 된 두 남녀와 같이) 서로가 서로로 말미암아 끝없이 기쁨을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아는 참된 신자는 그래서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면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