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오해에서 확신으로 58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2) -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

요한일서 3:10,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8-17

말씀내용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요일 3:10, 14


1. 이신칭의(以信稱義)냐, 이애칭의(以愛稱義)냐?
오늘 본문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돌려서 말하는 대신 직선적으로 명확하게 그리고 달리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에 이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대 유신론자들 가운데서 마치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인 양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녀들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은 그들만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마귀의 자녀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 영역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이 문제에 관하여 본문 10절은 하나님의 자녀는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주제인 형제 사랑은 14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이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믿음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말하는 대신,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다고 말씀합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일단은 이 말씀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려는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문제가 됩니다.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이되, 이것이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 성경 해석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본문은 마치 이애칭의(以愛稱義)를 말하는 듯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신칭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그 믿음은 사랑과 본질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해석하는 기초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았으면 좋겠는데, 요한일서의 문맥적 흐름 속에서 몇몇 주요 구절들을 추적하면서 이해해 보도록 하지요.

2. 요한일서의 형제 사랑: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하나님을 사랑하는 것=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3:16, 18~19, 23, 24; 4:7~8, 11, 12, 19, 21; 5:1, 2~3)
먼저 본문 뒤에 나오는 3장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복음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형제 사랑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깨닫고 복음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서 죽는다거나 가족 간에 그런 사랑의 이야기를 때때로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 복음이 그렇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 보지요. 3장 18~19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여기서는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구원을 확증하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요, 구원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제 3장 23절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계명을 지킨다고 말해왔습니다. 이것은 3장 10절에서 ‘의를 행한다’하는 말씀과 관계가 있고 우리가 두 주일 전에 상고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십니까”하는 주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는 별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데 (주 안의) 형제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4:1~6에서 믿음에 대해서 다루고, 4:7~12에서 사랑에 대해서 더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다음 절인 3장 24절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또 주가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또 이 사람은 자기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자기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님을 믿고 형제를 사랑하는 삶 속에서 점증하는 확신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경험하게 됩니다.
다음에 살펴볼 말씀은 4장 7~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서로 사랑은 형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합니다.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즉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서로 사랑은 거듭남의 시금석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4장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다시 한 번 사도는 3장 16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의 형제 사랑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의 마땅한 반응이고 증거라고 말합니다. 다음 구절인 12절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거하시는데 여기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목적을 이루는데, 어떻게 이루는가 하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4장 19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또 말합니다. 우리의 형제 사랑의 원천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4장 21절과 5장 1절을 보지요.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은 이제 5장 2~3절에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정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 형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다.”라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의 범위와 대상을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지시해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즉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자기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제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5장 2~3절에서 내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같이 가는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일서가 강조하고 있는 주요한 하나의 요점인 것입니다.

3. 서로 사랑의 범위
매우 분명하고 모호함이 없는 이 말씀들 중에서 요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사랑’이라고 한 것의 범위와 대상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할 것을 분명히 말씀할 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마 5:44; 눅6:27,35).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말씀하는 ‘서로 사랑’은 형제 사랑입니다. 형제는 5장 1절이 말하듯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 사랑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임을, 그가 참된 신자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형제 사랑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누구에게라기 보다는 그 자신에게 증명하는 표인 것입니다.

4. 존재가 행위를 결정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특별히 신약의 서신서들을 통해서 한 가지 우리 신앙과 관련한 중요한 명제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존재가 행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명령이나 윤리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줍니다. 복음이 율법 보다 먼저이며, 직설법이 명령법보다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는 일을 실패하는데 기인합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은 이것을 어떻게 지적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종종 제가 인용하지만, 로이드존스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만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 그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가장 으뜸이 되는 단어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는 남자일 수 있고, 한 아내의 남편이거나 두 아이의 아버지일 수 있고, 직장이나 사회의 직함으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물론 그의 취미나, 기호, 그의 조국이나 지역으로도 설명됩니다. 사실 우리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저는 한 남자이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두 자녀의 아버지이고, 죠이선교교회의 목사이고, 한국 사람이며, 조상들이 이북 출신이고(물론 저는 서울에서 나서 자랐지만),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비하면 이 모든 설명들은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때때로 저와 매우 다른 목회 철학을 가지신 목사님들을 뵐 때가 있습니다. 기질이나 취향도 여러 모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분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며,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저는 그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반면, 저와 여러 모로 비슷한 생각이나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분이라는 것을 도무지 볼 수 없다면 저는 그를 향하여 제 안에서 사랑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설명할 때, 그리스도와 견줄 수 있는 요소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나게 될 때 비록 그와 많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너무나 커서 그가 가진 나와의 차이점이나 어떤 약점도 덮을 수 있을 만큼 크기에 그를 사랑하지 못할, 사랑할 수 없는 다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본성적이고 본질적인 마땅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한국 사람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외국 사람을 보는 것이 더 행복하고 더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지방색이나 다양한 ‘끼리끼리’ 문화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져야 마땅한 장벽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특히 심각한 현상은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 즉 진영 논리가 교회를 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혹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자신의 교회됨과 그리스도인됨의 영광스러움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는 정치 논리와 자기가 서 있는 진영이 그리스도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 보다 더 큰 요소가 여러분의 의식 속에 있다면 저는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의심해야 마땅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영광스러운 직함을 가졌을지라도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자신이 한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욱 크게 여길 것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우리는 시편에 있는 다윗의 많은 고백 속에서 그것을 봅니다. 존재가 행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5. 형제 사랑은 참된 신앙의 증거다.
자,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형제 사랑이 왜 참된 신앙의 증거일 수 밖에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자기가 사랑하는 그리고 자기를 낳으신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요일 5:1). 기질이 같거나 동향 사람이거나 동창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낳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인을 죄인 자체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죄악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거룩한 성향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너무나 기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형제를 알아보고 그를 자기와 한 가족이고, 천로역정을 함께 가는 순례자로 여기게 됩니다.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본성(신적 본성), 같은 인생관, 같은 거룩한 소원들과 관심, 같은 축복된 소망을 가진 같은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형제들 안에서도 역사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형제 사랑은 참된 신앙의 증거로 자기 자신의 신앙의 참됨을 확증해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그 본능을 따라 힘을 다해 행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것이 요한일서 3장 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리고 19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로써’ 즉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진리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형제 사랑은 기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가 그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형제를 미워한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기도가 문제가 없다면 여러분은 위선자이거나 자기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6. 사랑은 자연적 감정이 아니다(요일 3:16; 4:11, 19).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혹시 “나는 형제를 사랑하기가 어려운데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게 되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자연적 감정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기질이나 기호, 취향 등을 우리는 전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모두 몸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몸의 본능적 요소들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본능 또한 실재하는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때때로 이런 문제로 고통을 느끼지만, 그들은 그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자연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 그 형제를 향해서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이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용서받았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믿는 자들은 그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그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형제 사랑의 모든 원천은 오직 바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요일 3:16; 4:11, 19).

7. 형제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비례한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형제 사랑은 어떻게 자라날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의 논리를 따라가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가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더욱 알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더욱 알게 될수록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더욱 알고 느끼게 되고 우리의 존재에 대한 더 깊은 확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존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함께 간다고 말한대로 말입니다. 이런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신을 인식할 때, 우리는 동일하게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하나님께로서 난 다른 형제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더 성장하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인색하다면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방향 설정이고 거짓된 신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모순인 것입니다.

8. 적용과 권면
형제 사랑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요, 참된 신앙의 증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살펴봤습니다. 이제 두 가지 적용적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A.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힘쓰십시오.
첫째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힘쓰십시오.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으니 이번 주에는 형제들을 만나고 밥도 사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잠시 잠깐 자극을 받아서 하는 일시적 행동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세월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형제를 향한 사랑이 풍성한 존재로 가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을 알기를 더욱 힘쓰십시오. 복음을 묵상하십시오.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십시오. 경건한 서적들을 탐독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통해서 참된 경건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슴을 태워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러면서 형제에게 주도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일을 하십시오. 가장 보답을 기대하기 힘든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B.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로 제가 실제적으로 권면하고 싶은 것은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일은 어쩌면 신앙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영역일 것입니다. 잠시 잠깐 기도하는 것으로는 기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시간을 여유 있게 확보하고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하는 의식이 아니라, 기도가 여러분의 삶의 중요한 일정이 되게 하십시오. 기도를 위해서 적어도 1시간 정도를 확보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형제들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했던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엡 1:16). 하나님 앞에서 형제들을 기억하십시오. 그 자체가 형제 사랑일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은 형제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십시오. 이런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복된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랑이 기도 속에만 머물러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시간을 확보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와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이런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네 /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 그때 홀로 있지 못함을
누군가 널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네 /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형제 사랑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지요? 형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누리는 은혜와 복입니다. 이 은혜를 더욱 누리시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이 은혜를 아직 모르는 분들은 그런 은혜로 저를 불러주십시오 라고 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은혜의 공동체에서 형제 사랑의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