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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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7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11) - 하나님을 갈망하십니까

시편 12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8-10

말씀내용
<하나님을 갈망하십니까> 시 123:2


1.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갈망이 왜곡되고 다른 것들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다(요 4:13~14).
범죄함으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뒤로 계속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떨쳐낼 수 없는 채로 살아왔습니다. 그 상실감은 인간 내면의 갈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빈 자리를 끊임없이 다른 것들로 채워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 본유의 갈망은 막연한 행복과 그 조건들에 대한 갈망으로 왜곡되고 대치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중에서 아무도 행복을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행복을 갈구합니다. 다만, 여전히 그 행복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획득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조 섞인 태도로 행복을 포기해버린 듯 보이지만(이것이 극단적인 포기로 나타날 때 자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간절히 행복을 갈망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갈망, 무언가에 대한 목마름,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이 ‘막연한’ 갈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찾아오실 때 사람은 드디어 자신의 목마름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었던 것이지요. 사마리아 여인을 주님께서 찾아가주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이 깨달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목마름은 좋은 남자들을 통해서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미 다섯 번을 결혼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결혼 조차 하지 않은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녀를 만나 주셨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자기 갈망의 진정한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본문은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진짜 주님을 만났을 때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는 갈망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가 하나님을 떠난 존재이기 때문에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갈망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하심으로써 갈망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갈망은 세상의 어떤 다른 것으로도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으며 채워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생각하게 되는 참된 신앙을 입증하는 믿을만한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도널드 휘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할 때 그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비밀스런 생명이다. 본성대로라면 그는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육적인(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롭게 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빨리 다른 것을 갈망한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갈망한다는 것은 거듭난 본성의 증거다.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은혜의 역사이며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당신의 영적 건강을 진단하라』 p.31~32). 로이드존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과연 영혼 깊숙이 하나님을 목말라 하고 있는가? 당신이 이것을 갈망하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당신은 과연 하나님을 더욱 알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과연 당신은 죽음과 무덤을 넘어서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의 빛 앞에서 영원히 비추임을 당할 때까지 지식 안에서 자라 가고 있는가?’”

2.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의 고백과 기도: 시편(42:1~2; 63:1~2; 73:25~26; 130:5~6; 143:8)
하나님을 갈망하는가 하는 이 중요한 질문에 바르게 대답하려면 시편을 읽어보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고백과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고백들이 공감이 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이런 고백들입니다. 먼저 가장 전형적인 고백은 시편 42:1~2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몇 가지 구절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들으시면서 이 고백이 정말 내 가슴에도 있는가, 저것이 정말 나의 기도인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1~2).”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5~26).”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5~6).”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8).”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런 고백들이 있습니까? 이렇게 비슷한 말로 기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이런 심정이 여러분의 가슴에 분명하게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지요.

3. 순종을 강렬히 원하면서도 은혜를 기대하는 갈망(시 123)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2).”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갈망하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남자 종과 여자 종이 각각 자기의 상전인 남자 주인과 여자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물론 종들은 주인을 잘 섬기기 위해서 주인의 손끝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서 주인을 섬겨야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시편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종들이 주인의 손을 주목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주목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 시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눈’입니다. 1절과 2절에 모두 4번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는 ‘은혜’인데 2절과 3절에 3번 나옵니다. 시인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고대의 노예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주인의 은혜로운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은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주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은혜가 그를 살게 할 것입니다. 4절은 시인이 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지 그 상황을 설명합니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와 교만한 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들이 시인을 조소하고 멸시하는 것이 넘쳐납니다. 시인은 곤고합니다. 시인은 자기를 조소하고 멸시하는 그들에게 그대로 앙갚음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시편 121:1에서 말했듯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시는’(1절)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저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하는 심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시인의 마음을 아십니까? 공감하십니까?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은혜라는 말은 자기가 권리와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에게서 그것을 받아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격은 없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바라는 것입니다. 만일 은혜가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는 4절이 말하는 바, ‘안일한 자’요, ‘교만한 자’인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바라는 눈은 무엇이든지 빨리 알아채서 주인의 명령을 즉각적으로 순종하려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인자한 주인이 자기에게 줄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인을 공경하고 섬기려는 마음을 지닌 종을 향하여 주인이 무엇을 지시하려고 하다가도 자기 손만을 바라보는 종을 보면, 그를 향한 긍휼한 마음이 차 올라와서 종이 필요로 하는 은혜를 넘치도록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종의 눈이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시인의 눈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순종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무한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는 정상적인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이 마음은 신자가 사는 동안에 그 강도에 있어서는 변할지언정 계속 지속되는 것입니다.

4. 대체로 만족하는 거짓 신앙 vs. 더욱 갈망하는 참 신앙
하지만 여기서 잠깐 우리는 거짓 신앙의 특징과 참 신앙의 특징이 이 점과 관련해서 어떻게 차이를 드러내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A. 물질과 환경에 대한 불만족 vs. 영적 불만족(시 131:1~3; 딤전 6:6~8; 시 16:6; 눅 12:13~21).
거짓 신앙은 영적으로는 대체로 만족하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것이 자족은 아닙니다. 성경적 자족은 물질과 환경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갈망하는 것이고 이것은 참 신앙의 특징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1~3).”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자족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바로 이것이 성경적 자족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주신 기업으로 알고(시 16:6) 만족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은혜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다릅니다. 그는 어제의 은혜로 만족해서 오늘을 살지 않고 오늘을 위한 은혜를, 더 큰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눅 12:13~21). 그는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어서 염려합니다. 곳간을 헐고 새로 크게 지을 생각과 함께 남은 여생을 놀고 즐길 생각을 합니다. 일면 그는 자기의 물질과 삶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에게서 영적 갈망 같은 것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비참한 것이 아닙니까? 대개의 경우에는 없어서 불만이고 그래서 더 가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대체시켜 버리고 마는데, 이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서 걱정이지만 결론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갈망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거짓 신앙은 영적인 갈망이 없고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족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려고 하기 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신앙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더라도, 정작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가 세상 것들에 대한 갈망은 많은 반면에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족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짓 신앙은 영적으로는 대체로 만족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더 큰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B. 영적인 맛을 본 적이 없다 vs. 영적인 맛을 잊을 수가 없다.(벧전 2:2~3; 출 33:18)
거짓 신앙이 영적인 갈망을 가지지 않고 대체로 만족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교회의 운영과 관련해서는 불만을 가질 수 있고, 그의 많은 생각과 말이 교회의 문제들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자기 영혼의 갈망, 은혜를 받고자 하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의 많은 일들은 사실상 세상의 논리와 아이디어를 가지고도 행할 수 있지만, 정작 영적인 갈망, 영적인 배고픔, 영적인 목마름은 오직 그 영적인 것을 맛본 사람, 마셔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는 그것을 맛본 적도, 마셔본 적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되고 기만된 기쁨과 신앙감정은 은혜를 받은 후에(사실 구원의 은혜가 아니다) 그 욕구가 사라지거나 줄어든다. 그는 자기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자기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만족한다. 은혜와 거룩을 갈망하지 않는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탁월한 것을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다. 이들은 마치 해야할 일을 다 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처음 체험 혹 과거에 가졌던 어떤 큰 체험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에 만연한 문제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하기도 전에 거짓된 만족에 빠져 은혜를 받았다고 느끼고 모든 영적 노력과 추구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인 은혜를 참으로 경험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요? 베드로전서 2:2~3을 보지요.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만이 영적인 젖을 먹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된 성도가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사랑하기를 갈망하게 되고, 자신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해 괴로워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참 성도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커집니다. 모세는 구약 시대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오랜 시간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맛본 적이 있기 때문에 구할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A.W.토저가 쓴 <하나님을 추구함>에는 이런 기도문이 실려있습니다. “오 하나님 저는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에게 만족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을 향해 더 목마르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더 많은 은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의식하고 있습니다. 제게 갈망이 부족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오 하나님,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저는 주님을 원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기를 원합니다. 제 안에 주님을 향한 열망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아직도 더욱 목마르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간구하오니 주님을 더욱 알도록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p.25~26).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은혜를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신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C. 사람 기준 vs. 그리스도 기준
거짓 신앙은 언제나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는 특징이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낫다’거나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기도를 잘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닮기를 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셨듯이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기가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참된 신앙은 성장할수록 더 은혜를 갈망합니다. 존 파이퍼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만나본 가장 강하고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갈망하는 이들이다.”

5. 주의! ‘보다 덜 확실한 갈망 vs. 보다 더 확실한 갈망’
설명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 언급합니다. 영적 갈망 가운데서 참된 신앙의 믿을만한 증거라고 여길 수 있는 더 확실한 갈망이 있는가 하면 좀 덜 확실한 갈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짓 신앙과 참된 신앙의 특징의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확실한 갈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 보다 덜 확실한 영적 갈망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자면 그것은 성경을 더 깨닫기를 원하는 갈망,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맛보고 싶어하는 갈망 또는 하늘나라에 있기를 갈망하거나 죽기를 갈망하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더 확실한 갈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왜 이런 요소들이 덜 확실한 갈망이라고 여겨지는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더 확실한 갈망은 더 거룩해지고 싶어하는 갈망, 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갈망,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갈망입니다. 즉, 영적 갈망이라고 할 때, 얼마든지 영적인 이익을 누리고자 하는 이기적 욕망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살기도 괴로우니 천국을 갈망하거나 죽음을 갈망하거나 할 수 있고, 좀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원하기에 그것을 갈망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 개입되는 것이 아닌지 살피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증거로서의 영적 갈망은 결코 이기적 욕망의 발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흘러나오는 갈망인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딤전 6:6; 사 33:6)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교훈을 정리하면서 적용을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가지게 되는 본성입니다. 먼저 저는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내 안에 있기는 한 것을 아는데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안에 영적 갈망이 약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은혜를 충분히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세상 것들에 의해서 너무나 배가 부르기 때문입니다. 존 파이퍼는 Hunger for God (우리말 제목은 『금식기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한껏 취하여 만족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식탁에 너무 오랫동안 안주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혼은 사소한 것들로 채워져서 위대한 것들을 위한 자리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이렇게 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 욕구를 채워주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갈망이 여기에 질식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배부르게 한 세상의 식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 안에 영적 갈망은 저절로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기를 원하는 갈망이 있는 분들을 위한 격려와 권면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를 원하시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큰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 주님을 만나기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십시오. 이와 같이 회심을 위하여 찾고 구하고 수고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영적 갈망과 관련해서 구하게 되는 일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회심하기도 전에 거짓된 만족에 빠져서 은혜를 받았다고 느끼고 노력과 분투를 끝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진짜 구원을 받았다면 그에게서는 영적 갈망, 그것이 구원의 확신이든지 혹은 하나님을 더 체험하는 것이든지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갈망이 일어나면 그 갈망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게 되고, 채워지게 되면 그는 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바른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익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목마름을 가지고, 생수의 샘에서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한 자기 만족일 뿐입니다. 말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E.M. 바운즈가 말했듯이 영혼을 힘있게 하는 거룩,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더 큰 믿음, 더 많은 기도, 더 뜨거운 열심 그리고 더 깊은 헌신을 갈망하십시오. 경건을 최고의 유익으로 삼으십시오(딤전 6:6). 기억하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함이 여러분의 보배입니다(사 33:6). 존 파이퍼의 말로 오늘 말씀을 맺고 싶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경험이 되기를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동행할수록 더욱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되고, 천국을 갈망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더 바라게 되고, 죄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신랑되신 예수님의 재림을 더 갈망하게 되고,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으로 교회가 부흥되고 순수해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대각성을 더 원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세상 민족들에게 파고드는 것을 볼수록 거짓 세계관이 진리 되신 예수님의 힘에 굴복되는 것을 더 보기를 원하게 되고, 고통이 줄어들고 눈물이 닦여지며 사망이 멸망하는 것을 갈망할수록 모든 잘못이 바르게 고쳐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가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에 가득해지기를 더 갈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