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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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6 - 참 신앙과 거짓 신앙(10) -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십니까 ?

요한복음 10:27, 요한일서 4: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8-03

말씀내용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십니까> 요 10:27; 요일 4:6


1. 하나님을 경외함 =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 =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함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계속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두 번의 설교에서 참된 신앙의 증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고 자기 기만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지난 번 설교에서 저는 먼저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다 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생각할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신앙이 거짓 신앙이듯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신앙도 거짓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두 구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과 '따른다'는 말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만일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되게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요한일서의 본문이 보충해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어떻게 분별합니까? '우리의 말을 듣는가 듣지 않는가'로 판단한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의 말’은 사도의 말,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면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청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속한 자가 아니라 미혹의 영을 따르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약 히브리어에서 '듣는다'는 말은 단지 귀로 듣는다는 의미를 넘어 순종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우리 말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너 내 말을 들을거야?"라고 말할 때 단지 귀로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것인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2. 성경의 사례들: 아브라함(창 22:12), 산파들(출 1:17, 21), 그리고 오바댜(왕상 18:3)
성경에서 세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말합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증거가 그의 순종을 통해서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사례입니다. 출애굽기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는 것이 두려워서 남자 아이를 낳으면 바로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령합니다. 하지만 히브리 산파들은 바로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 1:17).” 또 21절에는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를 거역할 수 있었던 용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세 번째 사례는 북 왕국의 악한 왕 아합 때의 일입니다. 엘리야의 말대로 그 땅에 삼 년 반의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아합의 극악한 부인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대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을 궁궐에서 먹게 했습니다. 이때 왕의 대신 중 오바댜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선지자 백 명을 굴에 숨기고 봉양했습니다. 오바댜에 대한 성경의 소개는 간단합니다.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왕상 18:3).” 오바댜의 용기는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 근원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는 세 가지의 사례를 다루었을 뿐이지만 성경에는 이와 같은 사례들이 무수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손해나 불이익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것이나 설교를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신 6:2).”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함의 결과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것은 권위 아래 사는 것이다(마 8:8~10)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이 명제는 성경 안에서 매우 명확합니다. 이 명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를 다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산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 드리는 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것은 100% 실수나 실패 없이 복종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상황 속에서 갈등하고 주저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심각하게 불순종함으로써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신자가 가진 마음의 상태는 이런 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해서 괴로워하고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못하는 자신의 불신앙을 인하여 괴로워합니다. 이것은 단지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나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는 불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을 인해서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관계를 회복하기까지는 그 마음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양심에 화인 맞은 것입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사실상 이런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고 본질상 믿음에 들어온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고 복종하는 자들입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말을 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권위 아래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순종이라는 말 보다는 '복종'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 이것은 군대의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군대의 질서는 소위 '상명하복'이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위에서 명령을 내리고 아래 사람은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의제기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군대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항명 즉 명령 불복종입니다. 군인은 권위 아래 있는 자입니다. 모든 군인은 그것을 압니다. 군대 총사령관도 정상적 상황이라면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나 수상의 권위 아래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중풍병에 걸린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나온 로마의 백부장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자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8~9).” 주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을 이례적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탁월한 점이 무엇입니까? 복종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권위 아래 사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여러분 생각에 좋은 대로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은 신자로서는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권위 아래 있는 자는 그렇게 자기 좋은 대로 결정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잠깐 잊어버리거나 실수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군인이 “아, 나는 해외근무가 싫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 부대를 박차고 나가게 되면 그것은 탈영이고 심각한 불복종의 죄로 간주되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는 권위 아래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여쭙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살핍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그냥 마음대로, 마음내키는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최종 권위가 아닙니다. 부부의 경우에 이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고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종 권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목사나 당회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가 그 머리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다면 어려움이 예상되고 반대가 있을지라도 그 뜻을 따라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교회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신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목사나 장로나 어떤 지도자들이 개인적으로 골방에서 은밀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식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대한 이해 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신자라면 여러분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배우자가, 직장 동료들이 여러분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고 인정합니까?

4 . 복종은 언제나 전적인 복종이다.
복종과 관련하여 좀 더 분명하게 짚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복종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전적인 복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전적이다'라고 말하는 조건은 '모든 명령에 대해서'라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명령이나 말씀에 대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실패와 실수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전적인 복종이고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생각 속에서라도 ‘내가 마음에 드는 말씀에는 순종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뜻대로 한다’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자신의 생명이나 매우 중요한 손익이 결려있는 일 앞에서 참된 믿음일지라도 순간적으로 믿음이 약해져서 주저하게 되고 갈등하게 되고 심지어 순종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마음을 언제나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전적인 순종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설명 드리지요.

A. 작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약 2:10; 삼상 15:22~23).
작은 죄와 큰 죄를 구별하면서 작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매우 전형적인 예입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군인이 “전쟁이 터지면 나는 상관의 모든 명령에 복종하겠지만 훈련 중에 사소한 일들에서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결코 권위 아래 있는 참된 군인일 수 없습니다. 살인이나 강간이나 거짓증거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순종하는 계명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불성실함),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늘 말로 불평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이 아닌 것입니다. 큰 죄를 짓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아무 신경도 쓰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조부이자 그의 전임목사였던 솔로몬 스토다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대포알뿐만 아니라 작은 총알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물이 새는 작은 구멍이 배를 가라앉게 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작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려는 신실한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큰 죄뿐만 아니라 작은 죄도 저주스러운 본질을 가지고 있다. 작은 죄들이 큰 죄들만큼의 형벌을 받아야 하지는 않더라도 저주와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경멸하신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여러분,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큰 죄를 범해야 죄인이 아니고 작은 죄를 범해도 죄인입니다. 그리고 중생한 신자는 그 심령 안에 신적인 본성이 심겨져서 죄를 미워하는 속성을 가지는 것이고 그 이유 때문에 신자는 전과 같이 죄를 범하지 않고 죄와 싸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스토다드 목사는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이것은 큰 계명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중히 여기고 다른 것은 작은 계명이어서 존중하지 않고 그 계명을 어긴다면 그는 멸망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p.541~542 각주 215에서 재인용).
이것과 관련해서 보충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의 명령을 순종할 때에도 온전한 순종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이 일에 있어서 매우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칠 때 모든 생명을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 아각을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좋은 짐승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부분적인 순종을 하나님은 '거역'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죽이라고 말씀하신 죄들, '점치는 죄,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사울의 왕위는 사실상 폐하여졌습니다. 성경은 엄중하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부분적인 순종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을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B. 태만의 죄를 주의하는 것이다(마 25:41~43,45; 약 1:27; 요일 3:17).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태만의 죄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명령에는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행하라'는 적극적 명령들이 또한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금지명령을 위반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적극적인 명령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르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최후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25:31~46). 그때 심판장이신 주님께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주목할 만 합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 25:41~43).” 주님은 그들이 하지 말라는 것을 위반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심판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언제 주님이 그런 상황에 계실 때 자기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냐고 항변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서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돌볼 것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적극적 명령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살인을 하거나 강간을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 즉 성경에서 금지하는 어떤 특별하고 큰 죄를 저지르지만 않으면 괜찮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내 돈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적극적인 명령의 대표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5. 적용
오늘날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소위 '신자'들이 가진 오해가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셔야 합니다. 돈은 중요합니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마 6:21). 여러분은 돈에 복종하든지, 하나님께 복종하든지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마 6:24). 여러분의 인생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기 인생을 계획함에 있어서 어떻게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고 주실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길지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특별하게 하나님께 헌신한 신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신자들의 정상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을 지금까지 오해해오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자신이 설정해 놓은 선 안에서 신앙 생활을 규정하고 ‘이만큼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매일 읽고 또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듣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러분은 늘 새롭게 복종하고 살아가십니까? 이 성경은 과연 여러분에게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그 말씀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까? 내 마음에 별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목사의 개인적이고 약간은 극단적인 견해라고 치부하고 맙니까? 이것은 매우 심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의 전체 삶에 대해서 절대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너무나 위험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깨닫게 하시고 교정해주시려는 것을 느끼십니까? 그러면 순종하십시오. 고치십시오. 존 번연의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것에 진지하게 복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