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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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5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9) -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

요한복음 8:4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7-20

말씀내용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요 8:47


우리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라는 주제를 오늘 아홉 번째로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참 신앙의 믿을만한 증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 후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두려워한다’는 말이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 매우 긍정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 자체에 대해서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지배적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은 대개 그것이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경외한다’는 말을 선호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이 우리에게 종교적 언어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하는 현실에 비추어 도리어 ‘두려워한다’는 말을 쓰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경외한다는 것은 어떻게 입증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존 번연의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것에 진지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의 말을 분리시켜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존중하는 분의 말을 존중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을 존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말을 전혀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로써 여러분은 실제로 그를 존중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존중한다는 것은 첫째로 그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다는 말이고, 무슨 말씀인지 깨달았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첫 번째로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한편으로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부정적 접근)를 살펴보고 다음 주일에 주의 깊게 들어서 깨달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이것은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지에 대한 긍정적 접근)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닌 것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라는 질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A.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라는 말은 아닙니다. 대략 지난 3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이나 강의 등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매우 보편적 현상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신학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말입니다. 직통 계시를 암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계시 위에 존재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었고, 신약 시대에는 성령의 영감으로 사도들이 쓴 말씀들이 절대적이었으며, 이 모든 말씀이 성경으로 완성된 후에 교회는 전적으로 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였고, 새로운 선지자나 사도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과 별개의 계시를 받는다고 말하거나 그런 계시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단에 속한다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이단 판별기준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모든 것이 이단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신학적으로는 꽤나 위험한 표현인데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는 것을 다루기 보다, 그때 그때마다 떠오르는 어떤 음성을 듣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이나 호기심이나 능력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를 더 잘 보여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과 별개로 듣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B. 설교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설교를 듣는다는 의미로 축소하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설교자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의 예가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님의 산상수훈/산상설교를 들은 후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인 반응입니다. 마태복음 7장 28~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들은 분명히 주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보통 서기관들을 통해서 들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설교를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설교는 형편없고 저 설교는 아주 성경적이고 바른 말씀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목사를 추종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높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소위 목사들이 연예인과 같은 인기인이 되는 경향도 다 그런 데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분별함이 없이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말씀을 듣고 목사를 따르며 교회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함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 때의 일로 가보지요. 에스겔 33장 30~33절을 봅시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이 말씀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설교를 잘 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그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습니다. 선지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노래의 형식으로 전하곤 했는데 사람들은 에스겔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아주 즐겁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들은 설교자의 화술이나 인품 혹은 어떤 요소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C. 하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나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경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대신,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번민이 생기거나 혹은 말씀으로 인해 기쁨이 생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그런 경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곳곳에서 말씀합니다. 가령, 이사야 66장 2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 떤다는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 떠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예를 보지요.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학살한 잔인한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의 분봉왕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빌립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정분을 나누고 결국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엄밀히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출 20:14,17) 간음이었을 뿐 아니라 헤로디아에게 헤롯은 이복 삼촌이었기에 이 결혼은 근친상간에 해당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왕의 범죄를 책망하였습니다. 마가복음 6장 20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세례 요한의 말씀에 대한 헤롯의 반응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았고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 약간의 번민이 아니라 크게 번민했습니다. 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와 같이 크게 번민하는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헤롯은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또 한 사람을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가 파견한 유대 총독 벨릭스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의 고소로 붙잡힌 사도 바울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유대 출신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사도를 불러서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개인 교사로 둔 성경공부였으니까요. 벨릭스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 24:25).” 그도 말씀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 절이 보여줍니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행 24:26).” 그의 숨은 동기, 그의 마음에서 원한 것은 로마 시민인 바울에게서 뇌물이라도 받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은 두 마음 사이에서 방황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번민이나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만이 아니라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쁨의 반응은 다양한 이유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논리 정연함과 지적으로 깨달아지는 원리들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감정적인 사람이 그 말씀이 가지는 감정적이 요소에 의해서도 마음이 움직여지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는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이 들려져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비판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선지자적인 말씀을 들을 때 그렇게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지는 말씀이 아니라, 어떤 다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소 기쁨의 반응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거나 두려워한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 중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네 가지 밭 중에서 돌밭의 경우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 13:20~21).” 말씀에 대한 기쁨의 반응이 잠시 있다가 그 사람의 인격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즉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여하한 이유로 끝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며 참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D. 지식을 위한 말씀 듣기가 아니다.
앞에서 지식의 충족이 기쁨을 주는 경우에 대해서 말씀을 했는데, 이 경우를 조금 더 설명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보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식을 더한다는 차원에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쁘고, 혹은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을 듣게 되면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들었을 때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희가 가진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채워질 것이라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도 알려주셨습니다(렘 13:12). 그러자 사람들은 “포도주 부대가 포도주로 채워진다고? 좋은 소리네. 그런데 그건 우리도 다 아는 거야. 뭐 좀 새로운 것 없어? 공부도 안 하나보지?”하는 식의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백성들은 이와 유사하게 반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사 28:9~10).” 이런 것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경우들입니다. 사실 이런 일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2. 요하난의 사건이 주는 교훈: 자신을 속이는 태도를 조심하라(렘 42).
주전 586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모든 말씀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고 성전은 완전히 불타고 무너져버렸습니다. 약 40년의 세월 동안 특별히 마지막 20 여년 동안 예레미야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말씀을 전해야 했고 언제나 그 결과는 살해 위협과 저주와 물리적 박해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전한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가 참 선지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하난의 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편 바벨론은 자신들이 점령한 유다를 다스리기 위해서 유대인 가운데 그다랴라는 인물을 총독으로 세우지만 그는 3개월 만에 유대 왕족 중 하나인 이스마엘과 그 세력에 의해서 암살되고 맙니다. 암살 후 이스마엘은 암몬 땅으로 도망가고 모든 책임은 총독 휘하의 군대 장관이었던 요하난의 손에 떨어지게 됩니다. 비록 요하난과 지도자들은 그다랴 암살에 직접적 책임이 없었지만, 바벨론이 세운 총독을 죽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나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렘 42:2~3).”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숨김 없이 말하갰다고 하자, 그들은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렘 42:5~6).” 이 말은 정말 이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너무나 충분한 말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반응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10일이 지나 기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하난과 모든 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말합니다(10~22):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그대로 거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시겠지만 만일 너희 보기에 평안하고 풍부한 나라인 애굽으로 도망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이 너희를 쫓아가 너희는 거기서 죽어 저주와 수치가 될 것이고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선지자는 그들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마음을 속인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렘 42:22). 그러자 이제 그들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 43장 2절을 보십시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들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당초 애굽으로 가기를 원했고 그 마음을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애굽으로 도피하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거나 그렇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렘 42:3).” 이제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측근인 바룩의 부추김을 받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꾸며대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들은 남겨진 모든 자들을 이끌고 애굽 땅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던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때 원치 않게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집니다.

3.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요하난과 그의 일행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들은 것은 설교자인 예레미야의 말이었고, 그들이 본 것은 바룩이 부추겨서 지어낸 말을 하는 예레미야였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예레미야가 아니라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그것은 “아, 내가 지금까지는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구나”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거기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설교뿐 아니라, 매일 성경을 읽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신다면 여러분은 복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과 같이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 119:105)”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증거입니다. 잠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16:20).” 주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얻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와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