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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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4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8) -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

고린도후서 7: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7-13

말씀내용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고후 7:1


1.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여러분 개인에게 묻는 것입니다. 물론 두려워한다는 말은 설명이 필요한 말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뿐 아니라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와 관련해서 구약 성경에서만 300번 이상 사용된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대다수가 이방인 출신이었던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 본문을 말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라는 말을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 본질적인 신앙감정은 잊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경박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대신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고 지난 주에 상고한 바 참으로 겸손한 자만이 가지는 신앙감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의 관용적 표현이 되기도 했습니다(욘 1:9).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앙과 삶의 근본이라는 것은 성경이 수 차례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잠 14:27).”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런 몇 가지 말씀들만 보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2. 신앙은 경외하는 관계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신앙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합니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그 믿음이라는 나의 주도적 행위를 통해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맺은 그 새로운 관계가 내 삶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말들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이와 같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관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고 그 관념도 지식이 없는 천박한 관념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단지 관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영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주님은 또 주님 자신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신앙을 설명하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부터 몇 절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3~56).” 신앙은 이와 같이 관계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계적인 신앙을 수식해주는 동사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나님께 감사한다......이 외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가장 근본이 되는 단어를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함은 모든 신앙 행위의 근본 태도이다.
경외한다는 말은 성경에서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다른 신앙적 권면이나 명령들과 함께 나타나면서 그 모든 신앙 행위들을 행하는 마음상태나 자세로 요구됩니다. 가령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성령의 영감으로 하려는 말은 거룩하라는 권면입니다. 모든 주변의 악과 더러움으로부터 교회의 거룩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6장 14절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라는 말씀의 결론이 7장 1절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일을 하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라는 말이 불필요한 잔소리입니까? 아닙니다. 두려움(경외)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두려움이고 이것은 신자의 모든 행위의 동기가 되고, 성화에서 있어서도 그 동기요, 동력이 됩니다. 사도가 이 말을 쓰는 것은 우리의 성화의 삶 조차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행해지지 않는다면 헛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거룩과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여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냐고 반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고”(눅 16:14)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라”(눅 20:47)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폭로하셨습니다. 그들의 경건과 하나님 경외함은 위선이었습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경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거룩은 헛된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경외함을 근본(시작)이라는 말로 설명한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경외함이 없다면 시작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권면합니다(벧전 1:17). 막연한 두려움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든 삶과 행위를 지배하는 신앙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그 사람의 삶과 행위에서 나타나게 되고 나타나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원리가 있고 직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라고 말씀합니다(벧전 5:5). 교회의 통치 원리와 질서를 존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교회는 하나님 외에 누가 누구를 다스리는 권력 구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통치하시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성령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벧전 5:3).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한 뒤에 말씀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엡 5:22). 어떻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말씀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1~2).” 여기서도 ‘두려워하며’라는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이나 위정자(정부의 권위자)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앙과 삶의 시작이요, 근본입니다.

4. 문제: 경외함이 없는 신앙 교육
이와 같이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경외함이 빠진 모든 신앙 교육은 내용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 교육에 대한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4장 10절입니다.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신앙 교육은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제자 훈련 과정을 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게 하는 것이 신앙 교육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신앙 훈련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고는 결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사진에 있는 호랑이를 보고서 호랑이가 무서운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현대 교회를 진단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결여된 지식은 바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이 가벼운 기독교,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해내는 것이다. 오늘날 믿음이 그처럼 힘이 없고, 우리 예배가 활기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우리의 무지함이다.”

5. 참된 경외함
성경이 강조하는 참된 경외함이 무엇인지를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제리 브리지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쁨>이라는 책에 소개한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꽤 스마트한 편이고 체력적인 조건이 남달랐던 버치 맥그리거는 18세에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기초훈련과정에서 그는 면전에 대고 “이 멍청하고 둔한 놈아”라고 소리치는 욕설을 퍼붓는 교관들 앞에서 떨어야 했습니다. 신병들은 막강한 권한과 힘을 가진 교관들 앞에서 경외심을 갖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훈련소를 관할하는 장군의 검열이 있다는 말에 훈련 강도와 수준이 더 엄격하게 끌어올려졌고 훈련소는 티끌 하나 없이 정리되었습니다. 콜린스 장군이 수행원들과 버치의 막사에 들어섰을 때 모든 신병은 호흡이 멈춘듯이 꼿꼿이 서 있었고 장군이 버치 앞에 멈춰 서는 순간, 버치는 그간 훈련소에서 얻은 자신감이 일시에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졸병인 자신이 해병대 장군 앞에서 서자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훈련을 마친 후 버치는 사단 수송부에 배치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인정받는 운전병이 되었는데 마침 콜린스 장군이 투 스타로 진급되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고 버치는 사단장의 운전병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첫날 사단장 앞에 섰을 때 그는 과거 훈련병 시절에 느꼈던 경외감이 다시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단장을 모시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의 태도, 말 모든 면에서 그는 점점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난 곳으로 콜린스 장군과 함께 배속되었고 어느날 그곳에서 지뢰를 밟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콜린스 장군은 차밖으로 튀어져 나갔고 버치는 불붙은 차에 끼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장군은 자신의 부상을 무릅쓰고 자기 생명을 돌보지도 않고 버치를 끌어내주었고 두 사람은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장군은 곧 회복이 되었지만 버치는 더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했습니다.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회복세를 살피기 위해서 병원에 들르는 장군의 관심에도 놀랐지만, 버치를 정말 놀라게 한 것은 사고 현장에서 장군이 목숨을 걸고 자기를 구해준 사실이었습니다. 장군이 자기 목숨을 걸고 일개 병사를 구해준 것입니다. 버치의 마음 속에서는 장군에 대한 경외, 존경, 숭앙하는 마음 외에도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해병대 장군들의 운전병 중에서 유사 이래 최고의 운전병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장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예, 장군님”, “아닙니다, 장군님”의 관계가 될 것임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장군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이것은 참된 경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존 머레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란 숭앙심과 사랑을 자아내는 두려움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권능과 거룩하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의 말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 속 가득 솟아오르는 존경심과 두려움과 기쁨과 즐거움과 경이로움이 모두 섞인, 딱히 어떤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두 경건한 신학자의 말에서 우리는 경외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A. 경외감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부터 시작한다.
첫번째로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경외감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은 모든 존재와 구별되고 분리되시며 초월하여 계시고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를 향해서도 나를 두려워하라고 명령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뵈면 어떤 존재라도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시는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다른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사 6:2). 하물며 천사도 아닌 죄인인 사람이야 어떠하겠습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했던 순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한 것이나(눅 5:8)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한 것(사 6:6), 엘리야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만 듣고서도 자기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던 것(왕상 19:13) 등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본 자들(엄밀하게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봅니까? 기도를 많이 해서 환상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까? 두 주 전에 상고한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다른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리를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존 번연이 <경외함의 진수>에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역사한다는 것을 올바르게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는 사람이 건전한 교리를 자신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는 정도에 비례한다. 많이 받아들이면 많이 경외할 것이고 조금 받아들이면 조금 경외하게 될 것이며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경험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 너무나 교회 강단의 메시지가 인간에 관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할 일 세 가지의 적용점을 가지고 나가서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거나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관한 것, 그분의 성품과 사역,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자 해야 하고 그 영광을 보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왜 오늘날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라져버렸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극진한 위엄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존 번연).

B. 경외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로부터 발생한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 속 가득 솟아오르는 존경심과 두려움과 기쁨과 즐거움과 경이로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가장 놀랍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의 총체를 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을 때 죄인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으로 충만해지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하신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감으로 충만해집니다. 존 브라운이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하나님의 공의가 그렇게 두렵게, 하나님의 자비가 그렇게 자애롭게,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깊이 있게 나타난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복음으로 충만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C. 참된 경외는 경건의 핵심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경건의 핵심입니다. 이런 경외함은 신앙 생활을 위한, 참된 경건을 위한 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디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 힘이 나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나옵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할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경건의 시작입니다.

6. 거짓된 두려움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아닌 거짓된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둔 사람이 주인에 대하여 가졌던 두려움입니다. 그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25:24~25). 그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합당한 경외감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숭앙심도, 존경심도, 사랑도, 감사도 없습니다. 다만 무서움뿐입니다. 잘못이나 죄에 대한 형벌을 무서워하고 지옥 가는 것만을 무서워할 뿐, 하나님 자신에 대한 단순한 무서움 외에 어떤 느낌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만으로도 사람은 어느 정도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경외는 아닙니다. 이것은 노예적 두려움입니다. 타락한 교회의 권력은 늘 이런 심정을 이용하곤 합니다. 중세 말의 교회가 그랬고 대다수 이단 교회들이 그렇게 합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사람들에게 있는 이런 심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무지함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실로 두려운 것입니다.

7. 자신을 점검하십시오.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기독교인이라면 비록 믿음을 많이 전하지 못하고 확신이 부족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고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의 증거는 그의 겸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경건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이 경외함은 신자의 신앙과 삶의 근본이고 시작입니다. 경외함이 없는 순종, 경외함이 없는 성경읽기, 경외함이 없는 기도, 경외함이 없는 봉사, 경외함이 없는 성장, 경외함이 없는 예배, 경외함이 없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헛된 것일 뿐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에 참된 경외함이 심히 드문 것을 인하여 슬퍼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경고를 알면서도 이런 일이 오늘날의 교회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한 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에 대해 약간이라도 경외심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느끼고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의 태도는 하나님을 엄격한 주인처럼 생각하는 노예적인 두려움은 아닌가? 나는 경망스러울만치 하나님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하고 마땅히 드려야 할 공경심을 갖추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혹시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고 죄를 지어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가?” 이런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점검이 끝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이 더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더 깊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깊어지기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경외함이 없이 행해지는 모든 것은 헛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생이 행하는 모든 노력과 성공은 모래성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충만하게 되고 이것이 우리를 주와 같은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시키고 또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 내용들을 우리 마음에 새겨 넣음으로써 새로운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여호와를 앙망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묵상이요, 묵상의 능력이다.” 존 번연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감명을 주고, 그 감명이 믿음을 만들어내며, 그 믿음이 경외심을 도출한다.” 참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윗과 함께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