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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오해에서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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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3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7) - 겸손하십니까 ?

이사야 57: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7-06

말씀내용
<겸손하십니까> 사 57:15


1. 미묘한 질문
“당신은 겸손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라는 시리즈로 설교를 하면서 앞에서 제가 던졌던 질문들과는 다른 미묘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는 질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 저는 겸손한 편입니다”라고 대답하신다면 이미 그 대답으로서 여러분은 겸손하지 않은 사람일 수 있고, “아니요, 저는 교만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신다면 오히려 여러분은 겸손한 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이 마음 속으로 어떤 대답을 하시든지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겸손한가 그렇지 않은가(교만한가) 하는 문제는 사람이 덕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겸손한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신앙고백을 하며 그의 신앙이 얼마나 뜨겁든지, 또 그가 교회에서 얼마나 잘 가르치는 사람이든 간에 그가 겸손의 영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참된 겸손을 만든다.
겸손이 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나눌 만큼 중요한 문제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저는 정말 이 본문이야말로 성경에 쓰여진 수많은 말씀 가운데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말씀 중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놀라야 마땅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분이시며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이 비록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얼마나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라는 표현을 우리는 이해합니까? 세상에는 매우 존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만나기 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과 점심을 먹을 수 있는 티켓을 얻기 위해서 해마다 경매가 이루어집니다. 지난 달에 한 사람이 결정되었는데 2백 2십만 불에 낙찰되었습니다. 워런 버핏은 매우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와 개인적으로 점심 한 끼를 먹기 위해서 2백 2십만 불이나 드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에게 ‘지극히 존귀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 중에 그런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영원이 무엇인지 알지 조차 못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거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적 개념에서 이름은 속성을 드러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된다, 분리된다는 말입니다. 티끌 하나만한 오점이 있어도 그는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십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을 때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봉헌할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대하 6:18).” 하나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다 이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 안에 거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라고 말입니다. 하늘의 하늘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통회하고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다니요? 이것이야말로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지극히 존귀하고 거룩하시며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존귀한 사람도 아니고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통회한다는 것은 회개하는 마음, 깨어진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영과 통회하는 마음을 소생시키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A.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본문은 참된 겸손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참된 겸손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참으로 알게 될수록 그 사람의 영혼은 겸손해집니다. 겸손은 연기도 아니고 애써서 취해야 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성경적 겸손은 지극히 거룩하고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본질적 지식이라고 칼빈은 말했습니다. 인간이 이 이중 지식을 제대로 가지게 된다면 그는 참으로 겸손해질 것입니다. “겸손하십니까?”하는 질문에 대해서 “예, 저는 겸손합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겸손하지 않고, 오히려 “아니요, 저는 교만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 교만의 확실한 표지 한 가지는 사람이 자신의 겸손함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p.468).” 거짓된 신앙 감정은 거의 전부 다 이런 교만의 특성을 내포합니다. 그것이 신앙 체험이 되었든지, 영적인 지식이 되었든지 그는 이 모든 면에서 자신의 그 체험이나 지식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체험이든 지식이든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께 관계된 것이라면 그는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작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사람이 자기가 참으로 겸손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기준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무명의 목수로 삶을 사셔야 했으며 사람들에게 잡혀 모진 욕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벌거벗겨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을 그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주님과 같은 겸손함을 갈망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동료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그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더욱 깊이 보게 될 것이기에 그는 노력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티끌이나 재와’ 같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창 18:27). 또 자신은 아브라함처럼 고백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겸손하기를 더욱 원하게 됩니다. 이런 겸손은 오직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 특성인 것입니다.

B. 겸손은 자기 자신을 주목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다(고전 4:3~5; 막 14:72).
참된 겸손은 또한 자기 자신을 주목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체험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당하여 더 이상 자신의 존재에 주목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입니다. “산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눈이 부실 정도로 모세의 얼굴이 빛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얼굴이 빛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한 마디 말에는 겸손이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 자기를 주목하지 않는 것임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제자였습니다. 이 정황을 묘사할 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주님을 배신한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듣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눅 22:62)고 기록했는데 유독 베드로의 제자였던 마가가 베드로에게 의존하여 마가복음을 기록한 것을 보면 단순하게 “생각하고 울었더라”(막 14:72)라고 한 것은 주목할만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부분을 더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자신에 대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겸손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도 삼층천에 올라갔던 경험을 매우 겸손하게 쓰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고후 12:1~5). 참으로 은혜를 받아 겸손해진 사람은 자신의 겸손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 사도의 사도성을 의심했을 때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고린도전서 4장 3~5절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스스로에 대한 자기의 평가 조차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정확하게 경험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즉 그가 참으로 지극히 존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자기 중심성을 떨쳐낼 수 없을 것입니다.

3. 신앙은 논리 이상이다.
그래서 신앙은 논리 이상입니다. “믿는 자 안에 성령이 내주하신다고 말씀하였고, 나는 믿는 자인고로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논리 이상입니다. 참된 신자는 “어떻게 지극히 존귀하고 거룩하시며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더럽고 추하고 먼지 같은 존재와 함께 계실 수 있으신가?” 질문합니다. 그는 성령님께서 자기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혹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을 정말 가장 큰 기적, 은혜의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경험하고 알아가게 될 때, 신자는 이런 겸손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논리를 넘어서는 겸손함인 것입니다.

4. 팔복과의 관계(마 5:3~4; 15:21~28; 약 4:6; 벧전 5:5)
팔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 대한 주님의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오셔서 그 심령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심령은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팔복은 신자가 지켜야 할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신자의 특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이사야서의 본문은 ‘마음이 겸손한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 왜 애통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기의 죄와 죄성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사야서 본문은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찾아오셔서 거하시며 그 영과 마음을 소생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보여주는 한 예를 소개합니다(마 15:21~28).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자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절박하게 소리를 지르며 다가 왔습니다. 주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다가 제자들의 재촉에 한 마디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무시를 당한 그 여자는 절을 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절히 매달립니다.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더 무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겸손하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다음의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이런 겸손으로 이끌었습니다. 주님은 그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 겸손이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지닌 겸손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벧전 5:5 참조).”

5. 겸손의 참된 특징

A. 자기 부인: 겸손
그러므로 참된 겸손의 중요한 특징은 자기 부인입니다. 성경적 자기 부인은 이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욕구들을 부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높이려는 자존심의 욕구를 거부하고 주님을 높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도 첫 번째 수준의 자기 부인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있고 또 교회 안에서도 거짓된 겸손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겸손에 속한 자기 부인은 두 번째 차원을 언제나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절대로 자기를 높이려는 자존심의 욕구를 거절하고 하나님만을 높이려는 욕구로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존귀한 거룩하심과 그 영광과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은 그 하나님을 더 높이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살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B. 회개: 통회하는 마음
겸손한 영은 회개하고 통회하는 영입니다. 무엇을 회개합니까? 어떤 행위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교만함을 회개합니다. 그것이 행동과 태도로 나타나지는 않았을지라도 누군가를 무시하는 마음을 가진 것 때문에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무시당하거나 부당하게 대우를 받은 것을 인해서 고통스러웠던 마음도 회개합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기 부인은 통회하는 심령을 낳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예민한 부분이 아닙니까? 하지만 참으로 겸손의 영을 가진 사람은 결국에는 회개로 나아가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이 점에서 많이 넘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매우 실제적인 사례와 관련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좀 더 인용합니다. “자신의 악함에 대해 많이 말하는 사람 가운데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탁월하고 훌륭한 성도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기대한다......어떤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그들이 정말 자신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러하다고 말하고 그들이 매우 저급하고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그들은 엄숙하게 자신들의 열매 없음과 무익함 그리고 자신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뒤쳐져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려주면 그들은 이 모든 말을 결코 수용하거나 소화해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들은 목회자에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이 생기게 될 것이다(p.448).” 저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6. 은혜 없이 겸손은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 정도에 있어서는 다를지언정 겸손의 영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것은 “당신은 겸손합니까?”라는 대답에 “예, 저는 겸손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겸손해지기를 구하고, 오늘 말씀 가운데 드러난 참된 겸손의 영을 갈망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마음 중심으로 받아들이며 여러분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면서 “오, 주님 제게 겸손의 영을 주시옵소서. 저로 지극히 존귀하고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시고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로 하나님 앞에서 저의 참된 모습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참된 은혜 가운데 있으시거나 은혜에 아주 가까이 계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자기 자신과 삶이 만족이 되지를 않아서 절망스러운 생각 가운데 처한 분들은 없습니까? 그런 심령의 상태는 물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통회함’도 ‘겸손함’도 아닙니다. 그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의 상태는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 불만족이 참된 겸손과 참된 통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자기 만족이 아닌 불만족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려는 자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는 다 은혜를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은혜의 정의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의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같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한 은혜입니다. 무한한 은혜를 맛본 자들은 자기가 탁월하게 거룩해져야 할 무한한 이유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점점 더 하나님의 크심과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에 압도당하게 되고 동시에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은혜가 그 심령을 참으로 겸손하게 만들고, 통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참된 은혜 없이 참된 겸손은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그 사람이 참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만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오셔서 그 안에 거하시며,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시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히 자비로운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겸손은 은혜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 참된 겸손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순환 논리가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계속해서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영적 원리입니다. 은혜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