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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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2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6) -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3: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6-29

말씀내용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습니까> 고후 3:18


1.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내 속에 형성되고 있는 것을 내가 아는가?
우리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섯 번째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교회 밖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 수많은 영혼을 기만하여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역사하기에 이 주제는 중요합니다. 참 신앙은 단지 교회를 다닌다거나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거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단순한 사실들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신앙이 참된지를 입증하는 참된 증거가 무엇인지 성경을 상고하면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어디에 처해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영혼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 번째 설교에서 ‘성령님이 계십니까?’라고 질문했는데, 그 질문으로부터 파생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외적 의무들을 행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모든 종교적 의무들은 속 사람의 변화로부터 흘러나오는 결과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품 즉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 열매로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습니까?’하는 질문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내 속에 형성되고 있는 것을 내가 아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어떤 일을 행하신 것이 틀림없어”라고 스스로 말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된 성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화는 영혼 속에 작용하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죄를 죽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가능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들을 맺어가게 되고,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하였습니다(갈 5:22~23).

2. 성품의 문제는 성숙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다.
여기서 한 가지 다루어야만 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있는가’하는 질문을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문제로 받아들이신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지금 제가 이 질문을 통해서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내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은 성숙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바울 사도의 논지는 무엇입니까? 참 신앙은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칭의가 일어났는데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속도와 똑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고 한 것입니다(히 2:11).

3. 참 신앙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만든다.
참 신앙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만듭니다. 회심을 했다고 하지만 이런 지속적인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감정적으로 고양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믿을만한 회심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종교적 구원의 표시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참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라고 못박아 말씀하였습니다(갈 5:16). 그래서 우리가 구분해야 하는 변화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 변화이고 하나는 복음적 변화입니다. 종교적(혹은 율법적) 변화는 모든 종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성품의 변화입니다. 이것은 자기 노력의 결과로 일어나며 상당한 수준까지도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질의 변화가 본성의 변화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기 본성을 스스로 바꾸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하나님만이 인간의 본성을 바꾸십니다. 그것을 중생 혹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살고 싶어하는 새로운 욕구, 본성을 주십니다(겔 36:26~27). 그는 새 피조물이 됩니다(고후 5:17). 물론 회심을 하기 전에도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중생하고 회심한 자라야 본성이 죄를 미워하게 되고 거룩을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의 과거 본성적 기질이 완전히 뿌리 뽑혀서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새 마음, 새 본성이 지향하고 바라고 원하는 것이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사람은 최초로 하나님을 영광 가운데서 보게 됩니다. 이때 그 영혼은 처음으로 자신 안에서 거룩함을 향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변화는 그 영혼의 심령 밑바닥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일평생 그 사람이 지상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온전하게 만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저절로 그리스도의 성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에게 바울 사도는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미 새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본성을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는 이제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근거와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신자는 이 변화를 원하는 심정을 가집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의 정신과 유행과 풍조를 더 따라갈 수 있을까 고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잘 분별하여 거룩하게 변화할 수 있을까를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만 하고 앉아있으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 사람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거룩한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가는가를 보여줍니다.

4. 어떻게 성품이 거룩하게 변하는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직분과 자신이 받은 사도의 직분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주었으나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직분과 새 언약의 직분의 차이입니다. 모세가 조문(글자), 정죄의 직분을 가졌다면 바울은 영과 의의 직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직분도 영광스러운 직분이었고, 산에서 하나님과 사십 주야를 보내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남아있었습니다(출 34). 비록 시간이 가면 없어질 광채였지만 모세는 백성들이 그를 보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였지만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들을 정죄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보기를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이 아니라,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영광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세가 자기 얼굴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수건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에 비유합니다. 그것이 14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이 완고함은 영적인 무지, 고집, 편견을 가리킵니다. 지성이 아니라, 마음과 의지가 굳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설교를 들을 때 그들은 논리적으로,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는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건이 그들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 그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합니까?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말합니다. ‘주께로 돌아가면’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대로(요 3:3), 거듭나지 않으면 수건이 그 마음을 덮고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니고, 많은 봉사를 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수건이 벗겨지는 것, 중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건입니다. 중생으로 죄인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17절에서 ‘주는 영이시니’라고 할 때 이것은 바울 사도가 받은 새 언약의 직분의 영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더 이상 정죄함 아래 있지 않고(롬 8:1)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요 1:12) 성령의 거하시는 전이 되었습니다(고전 6:19). 이와 같이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율법의 구속과 얽어 맴이 아니라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 자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유이고 하나님 편에 서는 자유입니다.

5. 주의 영광을 볼 때 일어나는 일: 주의 형상으로 변화함
18절은 수건이 벗겨지고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갑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영하는 변화를 가지게 됩니까? 본문은 ‘주의 영광을 볼 때’ 신자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한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주의 영광을 볼 때 거룩하게 변하고, 주의 영광을 보는 만큼 주의 형상으로 변합니다. 그러면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지금 고린도후서의 문맥에서 볼 때,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공부할 때, 혹 설교를 들을 때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내 내면에 파고 들어와 나를 중심으로부터 흔드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 진리 속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의 눈과 귀로 보게 되고 그 은혜 가운데 깊이 잠기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신자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고(시 34:8),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깊은 영향을 주십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은 그 사람의 영혼에 신적인 일들의 향기와 자국을 남깁니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서 그 얼굴에 그 광채가 반사되어 나타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통한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도는 또 여기서 단순히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한다고만 말하지 않고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변화의 성격을 잘 수식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중생과 회심을 통하여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고 얻게 될 영광의 보증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주의 형상으로 변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광스러운 변화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큰 은혜의 체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영원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게 되는 것과는 다른 제한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6.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다.
본문 18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변화는 의지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본문은 의지와 결단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면 변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습관을 고쳐서 만들어내는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종교입니다. 이것은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의 노력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기시는 중생으로써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키신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보게 하심으로써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변화시키신다는 것입니다.

7.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후 4:2)
그러면 여러분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으니 저들이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6).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성경 즉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한 가지 공통점을 보실 것입니다. 그들을 거룩하게 변화시킨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런 은혜를 구했고 그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은 종교 생활이 되고 맙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생명있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내면으로부터의 힘을 가진 성도는 늘 이런 은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오래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종교인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수건이 벗겨지고 여러분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또 보기를 원하는 자리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이런 변화를 원하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홀로 보낸 시간이 없이 우리가 변화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교회를 다니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홀로 서셔야 합니다. 그 말씀,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그분을 대면하십시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변화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 안에서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람입니다.
두번째로 여러분은 참된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과 마틴 루터는 참된 교회의 제일 조건에 대해서 한 목소리로 말씀의 바른 선포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약화되었습니까? 그것은 강단의 타락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2절을 보십시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바로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혼잡하게 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혼잡하게’라는 말은 물을 탔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 언제나 A.W.토저의 말이 생각납니다. “독은 독이로되 물을 타서 사람을 죽일 수 없는 독이 되었고, 약은 약이로되 물을 타서 사람을 살릴 수 없는 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20세기 중반의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이 물을 타서 전함으로 아무 능력이 없는 복음이 되었다고 그는 한탄했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참된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말씀의 바른 선포뿐 아니라 회중이 그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은 간절히 그 말씀을 원하셔야 하고, 분별하실 줄 알아야 하며,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이 벗어지는 중생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수건을 벗기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물 탄 복음을 평생 들어도 그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이 벗어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하게 은혜를 구하며 말씀 앞에 나오셔야만 합니다. 제가 7년 전에 했던 한 예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었고 복음을 전했는데도 그 부인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믿고는 싶은데, 믿기는 해야겠는데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지요. 그녀에게 복음을 전한 분이 말했습니다. ‘부인, 당신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이 있군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벗겨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십시오’. 부인은 그 말을 듣고 간절히 매어달렸습니다. 수 주일이 지나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있었답니다. 그녀는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하게 구했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겨주셔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겨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신 분들은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구하는 자마다 얻고, 찾는 이가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린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믿고 그렇게 구하십시오(마 7:8).